라디오가 좋아서, 일이 좋아서

라디오가 좋아서, 일이 좋아서 ⓒ unsplash


5년여의 방송작가 생활 중 몇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대부분은 특정 인물이 아닌 구조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2014년 방송작가가 되고 난 뒤 외부에서 볼 수 없던 방송계 구조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방송작가들은 방송국의 한 귀퉁이 책상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근무'를 했지만 노동자가 아닌 프리랜서였다. 대부분은 계약서도 없이 일했다. 이들은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급여가 아닌 회당, 건당 '페이'를 받았다(2019년 현재 시점으로 서울지역 공중파 방송국은 프리랜서 표준계약서를 쓰는 추세다! 이 한 장의 계약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작가와 프리랜서들이 싸워왔는지 모른다. 선배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한 지역사에는 '작가 페이 기준'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 기준이라는 것이 A, B, C 등급으로 나뉘어 C등급의 경우 월 100여만 원 초반대 수준으로 아주 오래 멈춰 있었다. 5년의 경력을 쌓아 C등급에서 B등급이 되어도 10만~20만 원 정도가 오르는 수준이었다.

사측에 계약서를 쓰자고 하면 "여기는 원래 쓰지 않는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은 기득권의 언어다. 논리와 시대에 역행하는 가진 자의 마스터키다. '원래'에 의구심 품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직까지 여성들은 투표소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부당한 '원래'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니 질문이 늘었다. "작가 페이 기준은 (대체) 몇 년도부터 동결된 건가요?", "프리랜서라고는 해도 작가와도 계약서를 써야 하지 않나요?" 아무도 내게 속 시원하게 답해주지 않았다. 가끔 용기 내 윗 사람을 찾아가기도 했지만 계약서도, 야근수당도 받아낼 수 없었다.

날 지탱해준, 방송작가 선배들의 선의

그렇게 '대환장파티' 속에서 나는 왜 계속 방송작가 일을 했을까. 단순하다. 일이 좋아서다. 방송작가유니온을 통해 알게 된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눠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TV작가는 TV작가가 하는 일이 좋아서, 라디오 작가는 라디오 일이 좋아서 버틴다. 일은 좋은데 돈이 안 벌려 적금까지 깨고 자취생활을 하다 결국 그만두는 이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일이 좋다는 사실이 밥을 먹여주진 않는다. 원고를 보며 받는 스트레스는 통장에 찍힌 한 달 급여 백여만 원을 보며 받는 스트레스에 비하면 애교다. 나 역시 더러워서 못해 먹겠는, '실존적 위기'에 처할 때가 가끔... 아니 자주 있었다. 그럴 때면 선배들의 선의가 날 지탱해주었다.

시작은 '시급 2000원' 사건이었다. 행사에 투입되고도 시급으로 따지면 2000원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하늘이 노랬다. '앞으로도 이따위 돈을 받고 일해야 하는가...' 나는 짧은 번뇌 끝에 행사 담당자인 A 선배를 진심으로 설득했다. "선배. 이건 우리가 이틀 전에 방송했던 열정페이 사례와 똑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 A 선배는 지체 없이 윗선과 논의해 페이를 조정해 왔다.

A 선배와 같은 회사에 일했던 B 선배는 용돈벌이가 될 만한 단발성 업무가 생기면 잊지 않고 꼭 내게 "해보겠느냐"며 의뢰했다. 기본급이 턱없이 낮다는 것을 피차 알고 있어 해주는 배려였다. 함께 밥 먹을 일이 있으면 절대 내가 내지 못하게 했다. 이것 역시 내 급여를 빤히 알고 있어 해주는 배려였다.

그 방송국에서는 명절이면 작가들에게 과일이나 식용유 같은 선물세트가 제공됐다. 회사가 아닌 노조에서 조합원비를 털어서 주는 선물이었다. 갑이 을에게 주지 않으니, 을이 을에게 마음과 음식을 나눴다. 이제 와 생각하면 답읍하고 싶은 고마움이다.

작가들에게 휴가는 휴가가 아니라 휴직
 
 선배가 만든 휴가비 봉투를 받아들자 소주 생각이 났다

선배가 만든 휴가비 봉투를 받아들자 소주 생각이 났다 ⓒ unsplash

  
다른 방송국에서 일할 때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다. 한 팀에서 작가들과 피디들이 함께 근무했다. 노동자인 피디에게는 당연히 휴가비가 제공됐다. 작가들에게 휴가는 휴가가 아니라 휴직이었다. 휴가비는 고사하고 쉬는 날짜만큼 급여가 나오지 않았다.

휴가 전날 퇴근 준비를 하는데 C 선배가 자기 자리로 날 부르더니 미안해 하며 봉투를 내밀었다. 자기 사비로 마련한 휴가비였다. 꾸벅 인사를 하고 봉투를 받았다. 회사를 나가는 길, 휴가고 뭐고 소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선배는 왜 아이 장난감 살 돈을 아껴 봉투에 넣어 나를 주는가. 주면서 또 왜 미안해 하는가.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민망함으로 얼굴이 붉어져 머뭇거리는가. 고맙고 서러웠다.

수십 년간 쌓아 올린 방송계의 불공정 관행은 공고했고, 그 단단한 벽을 허물지 못한 나는 호의와 선의를 넙죽넙죽 받아가며 이 세계에서 버틸 수 있었다. 방송작가로 살면서 악인보다 선인을 압도적으로 많이 만나서 이만큼이나마 해 왔다.

나 개인에게는 다행이나 전체에겐 불행이다. 호의로 연명하는 직군을 과연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운이 나빠 선의를 받지 못한 신입 작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상근 하는 프리랜서로 노동의 단물은 빨리되, 노동자는 아닌 상태로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할까.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노동에 준하는 수준의 급여를 받고 싶다
 
 이젠 호의보다 동의가 필요한 시점

이젠 호의보다 동의가 필요한 시점 ⓒ pixabay

  
나는 이제 호의보다는 내 노동에 준하는 수준의 급여를 받고 싶다. 계약서를 쓰고 싶다. 독소조항이 없는, 깨끗한 계약서를 쓰고 싶다. 그 계약서의 테두리 안에서 근무기간과 휴가의 권리를 약속받는 직업인이고 싶다. 상주하지 않는다면 프리랜서로, 상주해야 한다면 노동자로 살고 싶다.

과정은 어려울 수 있겠지만 시작은 어렵지 않다. '원래'를 뒤집으면 된다. 방송작가는 원래 휴가가 없다는 말의 원래를, 프리랜서는 원래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는 문장의 원래를 뒤집으면 될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절대 당사자 혼자 할 수 없다.

실제로 방송작가유니온이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의 도입을 시도하고, 막내작가 최저임금 받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방송사측과의 협의, 언론노조와의 연대 없이는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래서 나는 내게 호의를 베풀었던, 베풀지 않았던, 뒷짐 지고 바라보았던, 경원했던, 가까웠던, 나를 아는, 나를 모르는 모든 선후배에게 권하고 싶다. 같이 이상한 방송국을 이상하지 않게 바꾸어 보자고. 그러기 위해 방송작가와 스태프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방송작가 협의회나 스태프 노조, 유니온이 하는 이야기에 힘을 실어 달라고. 호의보다는 동의를 해 달라고. 그래서 결국에는 함께 웃자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relaxed)에도 실립니다.
방송작가 프리랜서 최저임금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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