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영화계 진보와 보수의 비율을 9:1이라고 한다. 그만큼 영화계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보수정권 시절 '블랙리스트'에 영화인 대다수가 이름을 올릴 정도로, 저항은 거셌다. 다른 문화예술계는 영화계의 단결력에 부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물론 처음부터 한국영화가 이런 흐름을 보였던 건 아니었다. 젊은 시절 검열과 표현의 자유 제한에 문제 의식을 느끼고 저항해 온 영화인들의 노력이 수십 년 동안 쌓인 결과다. 이들이 한국영화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바로 '영화운동'이었다. '기획-한국영화운동 40년'에선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영화운동에 매진한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기자말]
 한국영화운동의 출발점 역할을 했던 것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이었다. 사진은 <오 꿈의 나라>의 한 장면

한국영화운동의 출발점 역할을 했던 것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이었다. 사진은 <오 꿈의 나라>의 한 장면 ⓒ 장산곶매

 
영화를 '운동'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영화를 대중들이 즐기는 문화생활 중 하나로만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영화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회변혁운동의 도구로서 작용하길 바랐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약자들을 조명했고, 사회현실과 부딪혔으며, 정치권력에도 저항하면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려 했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했던 이들의 노력은 하나둘 결실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 변혁운동에 일조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들은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충무로'로 상징되는 한국영화의 핵심을 이제는 초창기 영화운동세력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2019년은 한국영화 100년, 그리고 한국영화운동 40년을 맞는 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40년의 세월 동안 영화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며 시대에 맞섰던 사람들의 노력은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한국영화운동 40년'은 바로 이 영화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기획연재를 통해 이들의 활동을 조명한다.
 
서구와 달랐던 한국의 영화운동
 
 1960년대 프랑스의 새로운 영화적 흐름인 누벨바그 영화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소매치기>

1960년대 프랑스의 새로운 영화적 흐름인 누벨바그 영화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소매치기> ⓒ IMDB

 
한국의 영화운동은 서구의 영화운동과 흐름과 결이 많이 달랐다. 프랑스의 누벨바그는 주제와 기술상의 혁신을 추구하며 무너져가는 프랑스 영화 산업에 대한 반대의 움직임으로 형성돼 기존의 안이한 영화 관습에 대항했다. 독일의 뉴 저먼 시네마 역시 기존의 낡은 독일 영화 산업에 사망 선고를 내리고 만연한 관습으로부터의 자유, 상업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것이었다.
 
미국의 뉴아메리칸 시네마도 비슷하다. 주제와 기술적인 면에서 기존 상업 영화를 거부하며, 영화 산업 외부에서 독립적으로 조달한 저렴한 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영화 산업의 배급 라인을 이용하지 않는 흐름으로 전개됐다. 이는 일종의 기존 영화 작법과 구조에 대한 쇄신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영화운동은 정치적 비중이 컸고,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꿔보자는 혁명적인 의식이 작용했다. 정치사회구조를 바꾸는 혁명적 변화에 영화가 역할을 하자는 의미가 컸다.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쿠테타 이후로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30년 군사독재로 인해 억압된 환경이 만들어낸 반감이었다. 독특한 방향성이 한국 영화운동의 특징이 됐고 흐름이 된 셈이다.
 
한국영화운동의 시발점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1979년이 결성된 서울대 동아리 '얄라셩'이었다. 서울대 공대 동아리였던 '얄라셩'은 1980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해 본부 서클로 정식등록된 이후 80년대 영화운동 전개의 밑바탕 역할을 했다.
 
본격적인 영화운동의 출발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였다. 영화운동이란 표현이 대학가 등에서 사용되기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한국 현대사에 큰 비극이자 아픔이었던 5월 광주에서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유신독재를 지나 민주화를 염원했던 세대들에게 암울한 소식이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만행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였고,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빚진 마음을 안겼다. 한국 영화운동 역시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변혁운동으로서의 영화운동 시작에도 5월 광주가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됐다. 
 
서구의 영화운동과 비슷했던 1970년대
 
 197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카이두클럽

197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카이두클럽 ⓒ 힌옥희

 
물론 1980년 이전에도 영화운동과 비슷한 시도들이 있기는 했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사회 문제를 영화에 적극적으로 담으려는 감독들이 존재했다. 서구적 흐름과 비슷하게 실험영화 등을 통해 영화의 폭의 넓히려는 시도도 있었다. 영화 소모임 등을 통해 꾸준한 토론과 다양한 영화적 시도들이 이뤄졌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특수성 있는 성격으로 전개된 영화운동의 시작으로 보기에는 미약하다는 것이 보편적 시각이다. 물론 1980년 이후 영화운동을 추구했던 세대들과 방향성은 다르지만 나름 영화를 통해 사회상을 드러내 보이고 사회문제를 비판하기 위해 애썼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1970년대는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공고화된 시기였다. 1971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한국사회의 큰 충격을 안겼다. 절망적인 어둠 속에서 영화를 통해 새로운 꿈을 꾸려는 시도들이 나왔는데, 바로 1971년 이황림, 김현주, 박상천 등이 주도한 서강대의 '영화연구회'였다.

20편의 16mm 영화를 제작한 이들은 태평로에 위치했던 한국신문회관에서 6차례에 걸쳐 영화제를 열기도 했다. 이황림 감독은 1980년대 충무로에 들어와 <달빛 멜로디>(1984)와 김혜수의 데뷔작인 <깜보>(1986)를 연출했다.

이에 앞서 1969년 이익태 선생이 만든 독립영화 제작사 '필름 70'은 충무로 주류 영화에서 벗어난 비주류 아방가르드 영화를 표방했다. 한국 독립영화의 시초라도고 볼 수 있는데, 1970년 <아침과 저녁 사이>를 만들어 이듬해인 1971년 5월 11일 YMCA에서 시사회를 열기도 했다.

1970년~1990년대 초반까지 영화운동과 관련된 주요 자료를 정리해 놓은 독립영화 역사서 <변방에서 중심으로>(서울영상집단, 1996)에 따르면, 서강대 영화연구회에서 활동하던 한옥희는 1972년 김점선 등 이화여대 시청각교육과 출신과 함께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카이두 클럽을 만든다. 이들의 관심 분야는 전위영화였고, 굿거리와 같은 민속적 내용으로 실험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김상배를 중심으로 한 영상미학반(1974~1980)이 연세대에 있었고, 주로 영화감상 및 토론을 통해 영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모임의 주된 목표였다고 한다. 이들이 만든 영화는 8mm 영화 < 1980. 5.17 >이 유일하다.
 
영화운동의 바탕이 된 문화원 세대
 
 1970년대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문화원세대의 대표적인 영화인들. 정지영 감독, 김홍준 감독, 전양준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성일 평론가 등

1970년대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문화원세대의 대표적인 영화인들. 정지영 감독, 김홍준 감독, 전양준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성일 평론가 등 ⓒ 오마이뉴스, 아우라픽쳐스, 충무로뮤지컬영화제

 
1970년대 중반엔 프랑스와 독일문화원이 경쟁적으로 시네필들을 끌어들였다. 영화강국들이 자국의 영화문화를 한국 내에 확산시키기 위해 공을 들였는데, 1977년 프랑스문화원이 독일문화원보다 한발 앞서 씨네클럽을 만들어 영화감상과 토론을 진행했다. 주축은 정용탁, 김정옥, 안병섭 교수 등이었다.
 
독일문화원도 이듬해인 1978년 영화소모임인 동서영화동우회를 창립한다. 유현목 교수를 중심으로 영화인과 학생, 회사원 등 회원이 300여명이나 되는 최대규모 영화모임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1년 만에 중단된다. 독일문화원의 풍부한 자금지원을 기대했으나 후임 원장의 실리추구정책으로 인해 동서영화회보를 3회 발간한 뒤 중단됐다. 
 
이후 영화이론에 관심이 있던 소수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동서영화연구회'가 만들어졌다. 당시 변인식 평론가가 회장이었고, 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인 전양준, 평론가 정성일, 전 영진위원장 강한섭, 현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 신철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1979년 10.26 사태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 시대 변화는 이들의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게 만든다.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통해 유럽의 예술영화를 접하고 이론적 토대를 넓혔던 이들을 일명 '문화원 세대'라 부른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검열이 횡행하던 시대에 해방구와 같았던 프랑스와 독일문화원은 70~80년대 씨네키드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해준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들은 이후 전개된 한국영화운동의 밑바탕이 돼 '역할'을 하게 된다.

정지영, 배창호, 박광수 감독, 김홍준, 강제규, 임순례 감독, 양윤모, 제작자 안동규 등이 문화원 세대의 대표적 인사들이다. 다만 정성일 평론가는 <한국영화 100선 100경>에서 "이들이 문화원에 대한 어떤 소속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영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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