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07 08:37최종 업데이트 19.11.0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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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서화를 공부하다 보면 호가 같거나 이름이 비슷해서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죽농(竹儂)'이란 호를 같이 쓰는 두 명의 서화가이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한자까지 같은 호를 쓰고, 늘 그리는 그림도 사군자를 주로 해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작품에 호만 있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으면 누구의 작품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있다.

보통 서화계에서 '죽농'이라는 호를 말하면 대구의 서화가 죽농(竹儂, 竹農) 서동균(徐東均, 1902-1978)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중국 상해에서 민영익(閔泳翊) 등과 교류하며 공부한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5)의 제자로 스승의 영향을 받아 중국풍의 호방한 난초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 글씨 또한 먹 맛이 농후한 행서를 잘 썼다.


그런데 이름 없이 호만 '죽농'이라 쓰면 서동균 외에 '또 다른 죽농'을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죽농'은 유명한 요릿집 '명월관(明月館)'을 세운 죽농(竹儂)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이다. 안순환은 요릿집을 경영한 사업가로도 유명하였지만, 한때 서화를 수집하고 서화 거간도 하였으며, 실제 본인도 서화에 능하여 묵죽, 묵란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한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대령숙수를 그만두고, 명월관을 설립하다
 

명월관 본점 사진 엽서. ⓒ 황정수


안순환은 영남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주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체격이 좋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17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로 노력하여 몇 년은 머슴으로, 또 몇 년은 음식점 조수로 지내는 등 온갖 험한 일들을 겪으며 음식에 관해서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다. 이후 궁에 들어가 음식 일에 관여하며 음식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궁중에서 일상적인 음식의 조리는 상궁들이 주로 하였지만, 환갑연이나 고희연과 같은 잔치를 할 때나 연향을 베풀 때에는 전문적인 남성 주방장인 숙수(熟手)를 불러 일을 맡겼다. 숙수 중에서 궁중에 전속되어 궁중의 연향요리를 도맡아 하던 이들을 '대령숙수(待令熟手)'라고 불렀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령숙수가 바로 안순환이었다.

안순환은 궁내부 전선사(典膳司)에서 내외 소주방의 주방 상궁들과 대령숙수들을 관리하였고, 공물 또는 진상의 형태로 궁중에 들어오는 진상품을 관리하는 일체의 일을 모두 담당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기울고,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전선사는 인원을 대폭 감축하고, 1907년이 되자 총독부는 궁내부를 아예 없애버린다.

안순환은 정3품인 이왕직 사무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스스로 궁에서 물러나온다. 안순환은 대궐을 나오며 궁의 음식을 마련하던 숙수들을 끌어 모아, 1909년 현재의 동아일보 자리인 '황토마루'에 '명월관(明月館)'이라는 조선 궁중 요릿집을 연다. 그동안 궁중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궁중 요리를 일반인도 먹을 수 있게 한다는 획기적인 계획이었다.

당시 고관대작들은 외국의 공사관들과의 만남을 위해 출입하던 곳은 주로 청요리집이나 일식집이었다. 그런데 우수한 조선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요릿집, 게다가 궁중 요리를 하는 집이 생겼으니 많은 사람이 찾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관기(官妓) 제도가 폐지되자 어전에서 가무를 행하던 궁중기녀들까지 명월관으로 모여 들면서 안순환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게 되었다.

명월관의 명물 예술 기생
 

명월관 기생 오산홍과 손님들의 그림. ⓒ 황정수


명월관이 최고 명성을 떨친 것은 역시 예기(藝妓) 기생과 악공들이었다. 당시 기생들은 글씨, 그림, 춤, 노래, 악기 연주, 시, 예절 등을 철저히 배워 교양과 예의범절에 익숙한 매력적인 인물들이었다. 당시의 많은 고관대작들이나 부자들은 명월관을 찾아 기생들을 술벗으로 하였다. 기생들의 뛰어난 소양은 신사들의 눈을 홀려 가슴앓이를 하는 신사들도 많았다.

당시 명월관에는 한성권번 등 서울기생들이 많았으나 점차 기예에 뛰어난 평양 기생들이 와 서로 경쟁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명월관의 유명한 기생 중에는 서울 기생 '산홍(山紅) 오귀숙(吳貴淑)'(일명 오산홍)이 유명하였는데 그를 찾는 문화계 인사들이 많았다. 한국의 유명한 서화가인 김규진, 김응원, 이한복 등 많은 이들이 찾아 서화를 나누었고, 고관대작이나 일본인들도 오산홍을 많이 찾았다.

명월관의 중요한 요리로는 '교자상 요리'를 들 수 있다. 원래 '교자(交子)'란 궁중연회가 끝난 후에 임금이 민간에 하사하는 음식을 여러 명이 둘러앉아 함께 먹던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안순환은 교자상 음식을 새롭게 개발하여 4인이 둘러 앉아 가득 차려진 음식을 먹는 것으로 변형시켜 새로운 형태로 개발하였다. 이것이 현재 한정식의 원조이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과 태화관
 

이케베 히토시(池部鈞) ‘경성 식도원’ ⓒ 황정수

 
1918년 명월관에 불이 나자 안순환은 명월관 명의를 이종구에게 넘기고, 인사동에 새로 분점 격인 '태화관(泰和館)'을 차린다. 태화관은 본래 '순화궁(順和宮)'이었는데 이완용(李完用)이 소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완용이 집주인이 되며 자꾸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괴이한 변괴가 자꾸 잇따르고 소문이 흉흉해지자 이완용은 급기야 집을 내놓았고 안순환이 얻어 명월관 분점을 열게 된 것이다.

이듬해 1919년 3월 1일. 11시가 넘자 태화관으로 한두 명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한 중요한 모임이었다. 이날 안순환은 천도교 손병희가 주최하는 중요한 모임이 있으니 다른 손님들을 받지 말고 33인분의 점심을 준비하고 각별히 신경을 써달라는 전화를 받고 준비한 것이었다. 손병희는 명월관 시절부터 안순환에게는 큰 손님이었다.

당초 독립선언은 고종황제의 국장날인 3월 3일 발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장일의 거사는 붕어한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 피하였고, 3월 2일은 일요일이라 기독교계 민족대표들이 찬성하지 않았다. 결국 3월 1일로 날짜가 잡혀 거사를 하게 된 것이다.  

3.1만세 이후 태화관의 영업은 정지되었다. 안순환은 하는 수 없이 종로에 '식도원(食道園)'이란 요릿집을 다시 차린다. 식도원은 화려하고 기생들의 향긋한 분 냄새로 가득했던 명월관과는 달리 양반가의 사랑방처럼 꾸미고 혹시 모를 시회(詩會)를 위해서 연상(硯床)과 필통(筆筒)까지 준비해 놓은 격조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많은 시인 묵객들이 모여들었다.

죽농 안순환과 해강 김규진
 

안순환 ‘석란’ 1928년 ⓒ 황정수

 
안순환의 또 다른 일면은 서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난초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 그의 작품은 전문적인 화가의 솜씨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일반인의 솜씨는 벗어난 수준급의 솜씨였다. 그의 수묵화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영향을 많이 받아 난 잎이 길게 쭉쭉 뻗어 얽매임이 적고 글씨 또한 필치가 활달하였다.

안순환이 김규진과 쉽게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김규진이 명월관에 소속되어 있거나 드나드는 기생들에게 사군자를 가르친 인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도 많지 않고, 성격도 맞아 크게 부딪히는 일이 적어 늘 같이 하였다. 더욱이 안순환의 사업이 크게 번창하여 경제적 여력이 있어 김규진의 그림 그리는 일을 돌보는 후원자(패트론)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때 김규진과 안순환 두 사람은 함께 전국의 명승을 유람하며 서화 작품을 하였다. 지금도 전국의 사찰이나 명가 집에는 김규진과 안순환이 함께 작업한 현판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지금도 개운사, 고란사, 마곡사, 송광사 해인사 등에는 안순환이 주변에 난초와 대나무를 그리고, 가운데 김규진이 절 이름을 쓴 현판이 많이 남아 있다.

말년에 안순환은 1930년 시흥군에 선조인 안향을 모시는 '녹동서원(鹿洞書院)'을 창건하였고, 사재를 털어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모시는 '단군묘(檀君廟)'를 세운다. 또한 '조선유교회(朝鮮儒敎會)'를 창립하고, 능력을 갖춘 유학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명교학원(明敎學院)'을 운영하는 등 유학자와 교육자의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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