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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방법원 법정 모습(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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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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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깅스가 때아닌 논란이다. 법원이 여성 피해자의 '레깅스 차림'에 집중해 가해자의 불법 촬영 유무죄를 가른 판결이 나왔기 때문이다. 의정부지법 형사1부(오원찬 부장판사)는 10월 28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1심에서는 레깅스 차림을 한 여성의 하반신을 촬영한 피고의 행위를 성폭력이라 판단해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앞선 판결을 뒤집으며 '레깅스는 일상복'이며 '촬영된 신체 부위가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부위가 아니다'라는 이유를 제시했다.

불법 촬영의 '완성'은 피해자의 옷차림?

법원이 피고의 손을 들어주며 제시한 두 가지 이유는 모두 여성주의 시각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사건 당시 피해자의 옷차림이었던 '레깅스'를 언급하며 피고의 무죄 사유를 그곳에서 찾았다. '피해자가 입고 있던 레깅스는 비슷한 연령대 여성들에게 운동복을 넘어 일상복으로 이용되고 있고 피해자 역시 레깅스를 입고 대중교통을 이용 중이었다'라고 덧붙였다.

'레깅스는 일상복'이라는 재판부의 진단엔 물론 틀림이 없다. 레깅스는 여성들의 '필수템'일 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운동복 혹은 내의로 흔하게 애용한다. 그러나 문제는 재판부가 레깅스를 일상복으로 입는 현상을 이해하고 있음을 표명함과 동시에 그것을 '불법 촬영 대상이 될 수 없는 옷'으로 한계지으면서 발생했다. 달리 말해 '불법 촬영'은 일상복이 아닌 옷, 극단적으로는 수영복 등과 같은 '야한' 옷차림의 여성을 촬영했을 때만 성립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피해자의 옷차림을 통해 성범죄 진상을 규명하려는 재판부의 태도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구식이다. 성폭행을 일으키는 원인을 피해자의 '야한' 옷차림에서 찾으려 했던 과거 판결들이 떠오른다. '야한 옷차림은 성범죄를 일으킨다'면 '야하지 않은 옷차림은 성범죄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일까? 논리 구조를 같이 하는 두 명제는 어느 쪽을 보아도 문제적이다.

트렌드에 맞추어 다양한 스타일의 옷이 시중에 나오는 상황에서, 일상복과 일상복 아닌 옷을, 야한 옷과 야하지 않은 옷을 구분하는 것은 주관적이고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계절, 시간과 장소, 상황, 문화권 등 모든 것을 고려할수록 답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성폭력 형사사건에 피해자의 당시 옷차림을 언급하는 것을 넘어 피고의 무죄 사유로 삼은 것은 그래서 합당하지 않다.

성적 수치심은 피해자만 느낄 수 있다

"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성폭력처벌법 제14조 1항이다.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를 촬영하는 것만을 범죄라 규정한 것인데, 여기에서 '성적 수치심'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피해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인 재판부가 가늠해 결정한다는 문제가 드러난다.

<여성신문>은 10월 31일 자 기사 "레깅스 입은 여성 불법촬영 무죄 논란... 피해자의 '성적 수치심'이 핵심"에서 지금껏 법원이 성적 수치심의 기준을 신체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닌 성적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 왔다고 지적했다.

이는 피해자의 신체가 외부에 의해 물리적으로 침범 당했다는 사실보다도, 피해자의 '어떤 부위'가 침범 당했는지가 성적 수치심 여부를 판단하는 데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에서 역시 피해자의 하반신 부위가 촬영되긴 했지만, 레깅스라는 일상복을 입고 있었고 통상적으로 노출되는 부위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수치심'은 감정의 영역으로 계량되거나 측정될 수 없고, 이를 제3자가 판단한다는 것 역시 모순이다. 이렇게 모호한 개념을 성범죄/불법 촬영의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우리 법에 큰 구멍이 있다는 말과 같다. 법전에서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는 삭제되어야 한다.

더 이상 피해자 상태에서 죄목 감면 이유 찾지 말자

의정부지법 형사1부는 판결문을 통해 '레깅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라고 해서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옳은 진술로, 여성이 나이나 옷차림과는 상관없이 일상에서 타인에 의해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됨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 문장이 '레깅스 불법 촬영 무죄 판결'을 뒷받침하고 있는 문장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재판부는 동시대 여성들을 위하는 척하며 남성들에게는 불법 촬영에 대한 면죄부를 주었다. 여성의 옷차림에 따라, 신체 부위에 따라, 불법 촬영은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진한 척하는 법의 비호 아래에서 여성의 신체는 끊임없이 침범될 것이다.

침실, 화장실과 같은 은밀하고 사적인 공간을 넘어 대중교통과 같이 공공장소에서도 불법 촬영이 만연하다. 불법 촬영이 100번 발생할 때마다, 각기 다른 100가지 상황과 100가지 사례, 100가지 피해가 쏟아져나온다. 이럴수록 법은 더 지혜롭게 발전하여 모든 피해 상황에 촘촘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피해자의 상태에서 가해자의 죄목을 감면할 이유를 찾지 말자.

태그:#불법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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