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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세(holocene)의 안정과 번영은 끝나고 이제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의 불확실한 미래가 인간의 운명을 판가름 할 게다. '가이아 1.0' 시대는 지나고 인간의 힘과 지구의 힘(시스템) 간에 균열이 생긴 '가이아 2.0' 시대인 '인류세'가 도래했다. 지구에 생명체가 진화해 온 이래로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다. 다섯 차례의 '대멸종'은 모두 빙하와 화산 폭발, 운석충돌 등으로 인한 기후변화가 주원인이었다.

피터 브레넌의 <대멸종연대기>(2019)에 의하면, 가장 심각했던 것은 세 번째 대멸종으로 생물종의 96%가 사라졌고, 6600만년 전 '백악기'의 다섯 번째 대멸종에선 76%가 멸종했다고 한다. 그간 인류의 누적된 환경파괴와 지구온난화로 6번째의 대멸종이 100년 안에 올 수 있고, 이때 지구 생명종의 70%가 멸종할 것으로 내다본다. 이미 '더워지는 지구'가 기록적인 폭염․홍수․태풍․한파․산불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것은 최근 우리가 직접 체험하거나 보고 듣는 일상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2015년 파리기후협약은 산업혁명 이후 지구 평균온도 상승을 2도로 막지 못하면 파국이 온다고 했다가, 지난해 인천에서 열린 IPCC에서는 1.5도까지로 더 낮춰야 한다고 했다. 산업혁명 후 약 100년 간 이미 1도가 올라 이제 0.5도가 남았지만, 지금처럼 인류가 온실가스를 내 뿜으면 2031년에 닥칠 일이다.

마지막 기회를 살리기 위해 인류가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변화가 와야 한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해 세계가 자본주의체제에 몰두할수록 기후위기는 여전히 외면되고 있다. 해서 인류세는 곧 자본세(capitalocene)가 되어버린 형국이다.

과학자들은 지구온난화를 억제할 마지막 절호의 시간이 인류에게 10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목숨과 제 식구 목숨은 천금같이 여기면서 인류의 '공멸'에 대해서는 그냥 무관심한 방관자다. 당대 우리 기성세대의 무책임한 대가를 자녀와 손주들에게 고스란히 치르게 할 건가? 스웨덴의 16세 소년 그레타 툰베리는 광야의 사도처럼 "어른들이 아이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어요!"라고 외친다.

이런 절박한 시대상황에서 호주 캔버라의 찰스스튜어트 대학교 공공윤리 교수인 클라이브 해밀턴(C. Hamilton)은 <무례한 지구: 인류세에서 인간의 운명>(Defiant Earth: the fate of humans in the Anthropocene, 2017)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은 작년에 <인류세: 거대한 전환 앞에 선 인간과 지구 시스템>(2018, 정서진 옮김)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었다.
 
해릴턴의 <인류세>(정서진 옮김, 2018) 책 표지
▲ <인류세> (2018) 책 표지 해릴턴의 <인류세>(정서진 옮김, 2018) 책 표지
ⓒ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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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해밀턴은 <누가 지구를 죽였는가>(2013)라는 책을 통해 이미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는 무려 다섯 번째 박사학위 논문으로 영국에서 <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1986)라는 제목으로 학위를 취득하기도해 나름 한국 사정에 밝은 사람이다.

그는 <누가 지구를 죽였는가>에서 "지구의 기후는 정책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기계가 아니다. 지구는 자기조절 능력을 갖춘 매우 복잡한 메커니즘이어서, 인류는 기후를 통제할 수 없지만 기후는 인류를 통제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기후의 안정지대를 지나쳐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과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무란다.

그는 단호히 경고한다. "인간이 지구를 안정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틀린 것처럼 변화한 기후에 우리가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믿음도 틀린 것이다. 그 적응과정은 끝나지 않은 노동처럼 힘들게다." 이미 우리는 기후위기의 티핑(tipping) 포인트를 살짝 넘어서 있는지도 모른다.

해밀턴은 <인류세>(2018)에서 이 책은 그냥 경고하는 책이 아니랬다. 45억년 된 지구에 지구생태계의 막내격인 현생 인류가 등장해 살아 온 지 불과 20만년이 지난 현시점, 즉 지금 우리에게 '인류세'가 도래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심층적으로 성찰해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게다.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에 인간의 힘이 아주 강력해져 지구 시스템 기능(힘)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인간이 지구의 운명을 바꿀 정도로 그 힘이 강력해 졌음에도, 자신의 힘을 스스로 조절하는 게 불가능하게 보이는 '기이한 상황'은 인간존재에 대한 근대(계몽사조)의 긍정적 믿음과 명백히 상치된다. 그럼 어찌할 건가?

이에 저자는 과학적 생태담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인류세의 도래에 따른 역사철학적 함의를 성찰하도록 촉구한다. 우리가 목하 기후위기를 온전히 막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화할 수 있는 '한시적 마지막 기회'에 과학과 역사철학을 아우르는 통합적 성찰이 절실하다는 게다.

필자가 보기에는 결국 <인류세>의 논지는 두 갈래로 집약된다. 즉, 인류세의 (지구)역사적 함의와 그것에 따르는 철학적 성찰이다. 저자는 <인류세>에서 새로운 인간중심주의(new enthropocentrism)를 제기하면서, 이것이 함의하는 것을 이렇게 적시한다.
 
"인간의 행위성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작용에 맞물려 항상 제약을 받고 있는 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제 인간행위에서 필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을 가르는 근대철학의 근본적인 구분은 허물어졌다. 인간 행위성의 재구성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려면 지구 시스템 과학을 넘어 철학 분야까지 다뤄야 한다. …(중략) 현재 인류세에서 지구의 운명은 인간의 운명과 얽혀 있으며, 우리의 책임감은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선 새로운(반성적) 책임감이다. 우리 자신의 복지, 미덕,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의무에 앞서(혹은 그와 함께) 지구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책임감은 우리를 엄격한 도덕적 존재로 규정한다." - 91~92p

여기 '새로운 인간중심주의'가 덜 휴머니즘적인 이유는 오늘날 인류의 운명이 단지 인간의 손(힘)뿐만 아니라 '가이아'의 손에 달렸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류세에서는 인간을 '자연과정'(natural process)의 참여자로 이해하는 존재론적 전회를 요구한다. 해서 인간은 자연과정의 선순환 존재로 회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다.

코페르니쿠스가 우리 지구행성을 우주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격하시킨 후, 다윈은 우리를 원숭이의 후손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프로이트는 우리 인간은 자신의 마음(의식)조차 통제하지 못한다고 나무랐다. 저자는 <인류세>에서 인간과 지구의 역사를 거대서사(38억년 지구 생명의 역사)인 지구역사학(geohistory)으로 제기한다.

지구역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근대적 계몽신념은 더 이상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목하 우리가 만들어야 할 무대는 역동적이고 변덕스러운 힘들이 얽혀 작용하는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구 시스템 과학은 필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을 통합한 특별한(메타) 과학이다. 과학만으로는 인류세에 함축된 유별나고 광범위한 의미를 해명해 낼 수가 없다.

이제 인간의 운명은 지구와 인간이 맺고 있는 '위험한 동맹관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정치적 선택은 운명이 되었다. 우리에게 자유가 정말 위대한 것은 그 자유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지구의 운명을 결정할 정도의 힘과 재량을 부여한 오늘의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선택의 기로가 생겨난다.

인간의 자유가 자연이 품고 있는 필연과 엮여 있다는 데서 인간(인문학)과 자연(자연과학)이 합쳐지는 인류세의 철학적 토대가 형성된다. 인간과 자연, 필연과 자유 간의 새로운 '이중교차'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은 자연과 뗄 수 없는 합(친/필)자연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지구의 역사 속에 인류역사는 당연히 통합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그 통합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결혼이 아니라 이혼할 수 없는 부부간의 갈등(전쟁)에 비견된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은 '과학기술'을 명분으로 인류의 책임을 회피하는 데에 능숙해졌다. 지표면에 닿는 태양 복사열의 양을 감소시킬 목적으로 대기에 황산염 에어로졸을 분사해 지구온도를 낮추자는 제안은 다른 모든 기술을 단숨에 압도하는 해결책이다.

이런 태양지구공학 기술에는 지배적인 정치․경제체제를 옹호하는 암묵적 약속이 담겨 있다. 지구생태계 혼란에서 탈출해 우주로 도피하는 계획도 현재진행중이다. 인류세에서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의 본질은 무엇인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윤리 이전에 느끼는 깊은 책임감을 통해서만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책임감은 교양 있는 개인이나 (책임을 다른 국가에 떠넘기는 성향이 있는) 국가의 시민에게만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으며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행위자가 속한 것이 아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고유하고 특별한 지위를 갖는 인류 모두에게 따라오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을 느끼는 인간에게 속해 있다." - 234p.

인류세에서 인간의 행동은 인간끼리의 선악 척도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관심과 무관심의 척도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오늘날 지구 시스템의 불안정에 대한 정보가 차고 넘침에도 우리가 적절히 대응하지 않는 것은 '고의적' 무시다. 이런 무시는 무모하고 방종하기까지 하다.

저자는 다른 종류의 윤리가 아니라 지구에 대한 인간의 특별한 윤리성, 즉 지구에서 우리의 뛰어난 능력과 고유한 책임을 통찰하는 힘을 강조한다. 세계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인간이 자연의 순리(순환원리)에 따라 그 리듬을 따를 것인지는 21세기 인류에게 주어진 최대 난제다. 탄소배출량을 줄이자는 제안은 경제성장의 명분으로 뒤로 밀려나기 일쑤다. 당장 우리나라를 보라.

<스턴 리뷰>(Stern Review)에 실린 기후변화의 경제학에 관한 불후의 문장은 기후변화야 말로 "세계가 경험한 가장 막대한 시장의 실패"라는 게다. 본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 과연 어떤 계산법에 따라 행동할지는 미지수다. 우리는 아직 인류세에 대응할만한 윤리적 책임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찬장이 텅 비어 있는 상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 유럽인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진실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면, 이제 우리는 가이아를 두려워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이아는 구세주가 아니다. …(중략)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류의 지대한 중요성에 뿌리를 둔, 새로운 '우주론적 감각'을 통해 인도되는 그런 존재로 거듭 나야 할 것이다.' - 242p.

이론물리학자 장회익 교수는 태양계(항성-행성)에서 에너지공급을 받는 자립적인 온생명(global-life)의 하위단위로서 의존적 낱생명(individual life)인 우리 인간이 우주론적 감각을 가진 다중적 주체로서 '나'를 의식하는 게 무엇보다 긴요하다고 했다.

이런 의식은 우리(나) 자신에게 우주사적인 사건 혹은 깨침에 비유된다는 게다. 그렇지 않으면 70억의 인구가 지구를 병들게 하는 암세포 같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그는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장회익, 2014)에서 생명이 지닌 매우 독특한 성격인 '주체적 양상'을 이렇게 말한다.
 
'놀라운 가능성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온생명의 자의식' 곧 삶의 주체로서 온생명이다. 이것은 저 밖에 있는 어떤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내가 깨달은 나 자신의 모습이다. 나는 '작은 나'로서의 내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큰 나'로서의 온생명 삶을 함께 영위하는 존재임을 발견한다. …(중략) 나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지어 나가고 있다. 내가 지금 큰 나를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이 큰 나는 영구히 존재할 수도 있고 조만간 사라질 수도 있다.' - 장회익, 2014, 294p.

문제는 '온생명의 주체'로서 내 존재를 의식하면서 스스로 내 삶을 어떻게 지어 가느냐는 것이다. 우리에게 우주의 신비는 생명의 신비고, 그것은 곧 내 삶의 신비다. <인류세>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유토피아 없이 살아가기'를 말한다. 그는 이 책을 "어떻게 끝내면 좋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너무 어렵고 불확실하고, 새롭기까지 하다"라고 고백한다. 해밀턴은 <인류세>의 끝을 이렇게 맺는다.
 
지구를 지키는 책임자로서의 운명을 거부했던 인간은 미래의 어느 순간에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중략) 과거의 문명이 붕괴되고 남은 잿더미에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고자 하는 새로운 인류는 그 잿더미를 보며 이렇게 선언(탄식)할 것이다. "never again!" - 251p. 
 
인류세에서 인간의 운명은 지평선 위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리고 21세기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는 전적으로 당대를 사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지구 살리기에는 벼락치기가 통하지 않는다. 당장 우리에게 '기후정의'(climate justice) 행동이 긴요한 이유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허다한 고통까지도 감내해야 할 게다. 이게 우리의 운명이다. 지구에서 이 운명을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류세 - 거대한 전환 앞에 선 인간과 지구 시스템

클라이브 해밀턴 (지은이), 정서진 (옮긴이), 이상북스(2018)


태그:#인류세, #대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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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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