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가적으로 청산해야 할 적폐가 있지만, 국민의 약 70%가 거주하는 아파트의 적폐도 만만치 않습니다. 경험해보니 국가 적폐보다 마을(아파트) 적폐의 청산이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4년간 아파트 회장을 하면서 겪었던 파란만장한 경험과 성취한 작은 성공의 이야기들을 시민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 칼럼은 30회 연재 중에 12번째 글입니다. - 기자말

아파트 회장이 행정기관에 자기 아파트에 문제가 있으니 정밀감사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다. 보통 아파트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 회장이고 관리소장과 직원들은 회장의 지휘 아래 있음으로(물론 원칙상으로 관리사무소 직원과 회장은 서로의 업무를 간섭할 수 없다고 되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회장이 과거 공사의 불법성을 밝히고 불법 당사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일은 어려운 일이 전혀 아니다. 수원시에 따르면 당시까지 회장이 주도하여 감사를 청구한 경우는 없다고 한다. 감사청구는 입주자대표회의의 비리 사실을 눈치챈 정의로운 '일반 입주민'이 활용하는 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파트는 회장이 일반 입주민들과 함께 감사청구를 요청했다. 나에게 감사청구는 회의 때마다 괴롭히고 모욕하는 다수 동대표에 대한 공격 수단이었다. 가만히 앉아 저들에게 물어뜯기고 욕먹고 조롱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나를 돕는 입주민들과 함께 수원시에 감사를 청구하기로 뜻을 모았다.

회장이 행정당국에 감사를 청구하는 아파트
  
감사원 전경
 감사원 전경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우리가 감사 대상으로 삼은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와 관련된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나를 괴롭히는 세력과 관련된 것이었다. 당시 우리 아파트의 뜨거운 이슈는 '페인트 코킹 공사' 비리였다. 저들은 입만 열면 내가 이 공사와 관련 있다며 비방했다. 비리가 있다고 알려진 페인트 코킹 공사업체 선정에 참여했던 동대표 중 회장 남기업의 동서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남기업은 페인트 코킹 공사의 비리를 덮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하여 나는 페인트 코킹 공사에 과연 비리가 있었는지 수원시 감사를 통해서 털어보자는 취지로 감사 대상에 포함하려 했다. 다행히 당시 페인트 코킹 공사를 진행했던 동대표들도 좋다고 했다.

또 다른 감사 대상은 지난 5년 동안 아파트에서 진행했던 모든 공사의 적법성 여부였다. 당시 아파트에는 비리가 많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업체로부터 뒷돈을 받는다는 소문, 불필요한 공사를 추진한다는 의혹, 아파트에 필요한 공산품을 고의로 비싸게 구매한다는 의심 등인데 이것들은 나를 괴롭히는 동대표들이 과거에 진행했던 공사와 연관된 일들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음해라고 주장했다. 하여 나는 우리끼리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공공기관의 감사를 받고 책임질 일이 나오면 반드시 책임을 묻자는 취지로 감사 대상에 포함하려 했다.

결국 나는 수원시 정밀검사 안건을 정기회의 안건에 상정했다. 수원시에 감사를 요청하려면 입주민 1/3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작성할 서류도 많지만, 회의에서 의결하지 않으면 관리사무소의 업무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감사에 반대하는 세력들

물론 저들은 반대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들이 처음엔 반겼던 페인트 코킹 공사에 대한 감사조차 반대하고 나섰다. 자기들이 비리가 있었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안을 감사 대상에 넣자고 하면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는데, 한사코 반대하는 게 이상했다. 그들이 내건 이유는 페인트 코킹 공사의 비리는 '수사' 대상이지 '조사'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원시 감사를 받았는데도 밝혀지지 않으면, 혹은 감사를 통해 비리와 불법의 단서가 나오면 검찰에서 수사받게 하자고 했더니 그것도 반대했다.

수상했다. 난 처음엔 저들이 과거 5년 동안 진행된 공사의 적법성 여부만 반대할 줄 알았다. 자신들이 과거에 동대표 활동할 때 비리와 불법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했으니까 말이다. 페인트 코킹 공사를 감사 대상에 포함하는 걸 반대한 이유는 나중에 밝혀졌다. 엄청난 비리가 있었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막상 조사해보니 별것 아닌 거로 밝혀질 것이라는 점을 저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동대표회의를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직접 동의서 서명을 받아야 했다. 일단 우리는 '수원시 감사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주말에 정문에서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1680세대 중 적어도 600세대의 서명을 받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입주민들이 직접 받은 동의서 서명 

동의서 서명 작업은 2016년 5월 21일 토요일부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토지공개념 서명을 받은 적은 있지만, 이런 일로 서명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끄럼을 많이 타는 내겐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우리는 역할을 분담했다. 어떤 입주민은 주민센터에 가서 파라솔을 대여해오고, 어떤 입주민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전단을 자비로 복사해오고, 어떤 입주민은 동의서 양식을 넣은 파일을 만들어 왔다. 또 어떤 입주민은 자비로 배너를 제작해왔고, 어떤 입주민은 김밥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어떤 입주민은 지나가는 입주민들을 불러세워 서명받는 작업을 맡았다. 자발적으로 말이다.
  
수원시 감사 동의서 받는 사진
 수원시 감사 동의서 받는 사진
ⓒ 남기업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주말에만 서명을 받는 건 한계가 컸다. 동의해주는 입주민도 있었지만 귀찮다며 그냥 지나치는 입주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2주 동안 동의서 서명을 받은 걸 세어보니 200명도 안 되었다. 이에 우리는 직접 세대를 방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 동 담당자 2명씩 정해서 입주민들이 주로 집에 있는 시간인 평일 오후 8~9시에 세대를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세대를 직접 방문하는 건 더 힘든 일이었다. 수고한다며 동의해주는 입주민도 있지만 문전 박대하는 입주민, 반대하는 입주민, 냉대하는 입주민, 별별 입주민 등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방문하여 결국 1주일 만에 600여 명의 동의를 받는 데 성공했다.

감사청구를 위한 서류 작성도 일이었다. 감사청구 문서 양식에 감사를 원하는 구체적인 대상 리스트와 내용을 정리하려면 과거 5년간 아파트에 있었던 모든 공사를 다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맡은 2명의 입주민은 지난 5년 동안의 관리비 부과내역서와 장기수선충당금 사용 목록을 살펴보는 수고를 감당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입주민 1/3 동의서와 감사청구 서류를 1달 만에 완성해서 수원시에 제출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이것이 자기가 사는 아파트를 개혁해보겠다고 하는 입주민이 직접 이뤄낸 결과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생겼다. 막상 서류 제출하러 수원시에 가보니 우리보다 먼저 감사청구를 한 아파트가 10개나 있는 게 아닌가. 순서대로 하면 우리 아파트는 2018년, 그러니까 내가 회장 임기를 마친 이후에나 가능했다.

하여 우리는 수원시도 우리 아파트가 3번씩이나 회장 해임투표를 하고 회의 때마다 다수의 동대표가 회장을 말할 수 없이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감사청구 신청한 순서대로 감사할 것이 아니라, 아파트 상황을 고려하여 감사의 순서를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요청 때문이었는지 수원시는 2016년 8월에 우리 아파트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기로 해주었다.

드디어 나온 감사결과보고서
 

2016년 8월 22일에서 26일, 5일 동안 진행된 감사에서 수원시는 5명의 전문가를 파견하여 최근 5년 동안 공사 관련 서류와 회계 자료 등을 모두 꺼내놓고 '정밀감사'를 실시했다. 관리사무소 직원들은 초비상이었다. 왜냐면 관리소장이 적폐세력들과 함께 진행한 공사 전반을 다 뒤지기 때문이다. 적폐세력들도 시간 날 때마다 관리사무소에 들러 감사 요원들에게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원시에서 파견 나온 전문가들은 그저 자기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감사 마지막 날인 8월 26일 금요일, 수원시는 감사에 관한 강평회를 열었다. 감사의 기조, 5일 동안 감사를 진행한 소감, 그리고 후속 조치와 일정에 관해서 설명하는 자리였다. 나를 비롯한 감사추진위원회 입주민들은 물론 적폐세력들도 참석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자리에서도 막말을 해댔다. 심지어 관리소장은 수원시 감사 담당자 앞에서도 회장인 나를 공격하는 발언을 했다. 그것을 본 감사 전문가들은 어이없어했다.

감사결과보고서는 감사가 끝난 지 3개월이 지난 2016년 11월 말에 나왔다. 감사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적폐세력들이 그동안 저질렀던 일들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 상당했다. 페인트 코킹 공사업체 선정 비리는 없는 것으로 나왔다. '보고서'를 확인한 관리소장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적폐세력들의 '광기'도 약간 누그러졌다.

그러나 저들이 수원시 감사로 완전히 힘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감사보고서에서 지적한 사항을 바로잡으려면 회의 안건에 올려서 통과시켜야 하는데, 저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통과가 불가능했다. 하여 감사결과보고서 활용은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수원시 감사로 저들의 화력이 좀 떨어졌지만,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관리소장과 행동대장인 감사를 주저앉히는 다음 작전을 전개했다.

태그:#입주자대표회의, #동대표, #아파트 비리, #아파트 민주주의, #마을적폐
댓글9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토지+자유연구소(landliberty.or.kr) 소장. 전 국민 주거권과 토지공개념 실현, 토지보유세를 재원으로 하는 기본소득인 토지배당제를 위한 연구와 운동을 병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땅에서 온 기본소득, 토지배당》(2023, 공저), 《아파트 민주주의》(2020), 《헨리 조지와 지대개혁》(2018, 공저) 외 다수가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