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부산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 부산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 부산국제영화제


01.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고 한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
하지만 나는, 망했기 때문에 자주 운다."


봉준영 감독의 데뷔작 <럭키 몬스터>는 말장난처럼 보이는 세 줄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사채업자에게 큰 빚까지 지고 거의 망한 인생의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주인공 도맹수. 어떻게는 살아보겠다고 녹즙기 판매 회사에까지 들어가지만 다단계로 끊임없이 수렁으로 빠지기만 한다. 남은 유이(有二)한 낙이라고는 값싼 막걸리를 마시는 일과 동네 한 귀퉁이에 마련된 아이들을 위한 트램펄린을 타는 것. 독백과 함께 그가 서 있는 곳 역시 그 트램펄린이다. 정장 차림의 그가 10살 남짓한 아이들과 함께 그 위에 서 있는 모습이 이상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퍼 보인다.

사채업자의 폭력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심지어는 아내 리아까지 협박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맹수와 리아는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만 위장 이혼을 하기로 결심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혼을 하자마자 50억이 넘는 로또에 당첨되어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된다. 물론, 그렇다고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거액의 돈이 생기기는 했지만, 이제는 찾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아내와 그를 조금씩 건드려오는 사람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내면의 폭력성 등이 점차적으로 그를 잠식해가기 시작한다.
 
 영화 <럭키 몬스터> 스틸컷

영화 <럭키 몬스터>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2.

영화 <럭키 몬스터>의 설정상의 특징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인공 맹수의 주변을 맴도는 또 다른 자아 '럭키 몬스터'의 존재다. 이 작품의 타이틀과도 동일한 '럭키 몬스터'는 주인공의 귓가에만 들리는 환청, 영화적 표현에 따르자면 맹수만를 위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DJ와도 같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럭키 몬스터'의 목소리를 지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의약품인 용각산을 먹는 것이다. 다만, 어떻게든 목소리를 지우고자 하는 그의 노력과는 별개로 그 목소리가 항상 악영향만 주는 것은 아니다. 이는 실재하는 주인공과 허상의 목소리에 불과한 '럭키 몬스터'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는데, 그 목소리가 바로 로또 1등에 당첨이 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주인공 맹수와 그의 또 다른 자아로 표현되는 럭키 몬스터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과 캐릭터다. 특히, 소심하고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던 맹수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외부 인물들의 끊임없는 자극으로 인해 점차 광기 어린 인물로 변해가는 모습은 극을 이끌어가는 동력이자 작품의 다양한 요소를 하나의 이야기로 응집시키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맹수의 모습을 따르기라도 하는 듯이 다소 어리숙하게 시작하는 전반부와 점차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중반부, 잔혹한 장면들로 채워지는 후반부의 종잡을 수 없는 변주를 가능하게 하는 것도 변해가는 맹수의 모습이다.

03.

주인공에게 선(善)으로의 전환을 강요하는 인물이 이 작품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 작품만의 특징이다. 그나마 맹수에게 그 어떤 직접적인 영향도 끼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캐릭터가 선역에 가까워 보인다. (간접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는 하나, 직접적으로 악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들에 비해서는 선역에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로또에 당첨이 되어 찾아간 농협에서 만나게 되는 직원이나 녹즙기 판매 회사의 상사가 이에 해당한다.

반대로,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그의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증폭시키고 외부로 드러나게끔 자극한다. 어린 시절 같은 고아원에서 자라며 자신을 대신해 맞아주고 울어줬다는 이유로 주인공을 속이고 이용했던 아내 리아는 물론, 돈을 빌려줬다는 이유로 맹수의 삶을 괴롭히는 사채업자, 사채업자를 도와 폭행을 저지르는 부하, 약자를 도와준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폭력적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HR 컨설팅 직원들 모두. 심지어는 상대인 맹수가 약해 보이니 공원 정자의 자릿세를 내라며 시비를 거는 고등학생까지 말이다. 내부에서는 럭키 몬스터가 그렇다면, 외부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이 그를 자극해 오는 셈이며, 이 과정을 통해 주인공 맹수는 광적인 인물로 변화해 나간다.
 
 영화 <럭키 몬스터> 스틸컷

영화 <럭키 몬스터>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4.

언뜻 보기에는 복잡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극을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이유는 여러 지점에 떨어져 있는 하나의 시퀀스, 그리고 내러티브들의 집합이 생각보다 깔끔하게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데뷔작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연출이 이 작품의 매력을 더하는 셈이다. 특정 오브제에 의미를 부여하여 활용하거나 동일한 행동을 서로 다른 장면에서 끌어다 쓰는 부분에 있어서도 무의미하게 남용된 지점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인중을 긁는 행위는 작품 속에서 '거짓을 이야기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활용되는데 이 지점은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오브제의 활용에 있어서는 '용각산'의 존재가 중요하다. 쉽게 설명하면, 영화 속에서 이 장치는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선(善)의 정도를 말한다. 실재하는 인물이 원래 맹수의 자아와 럭키 몬스터의 자아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이 있는지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주인공이 유약하고 소시민적으로 그려지는 초반부에서는 귓가에 들리는 럭키 몬스터의 환청을 지우기 위해 사용되는 물건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인물이 변화하면서부터는 점차 보이지 않게 되는 식이다. 극의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맹수가 럭키 몬스터 그 자체가 되고 난 뒤에는 결국 쓸모가 없어진 럭키 몬스터를 폐기하는데 이용되기까지 한다.

05.

영화를 연출한 봉준영 감독에 따르면, 스스로 생각하기에 독립 영화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적인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은 그 지점을 다른 방식으로 돌파하고 싶었고, 그랬기 때문에 지금의 <럭키 몬스터>와 같은 장르물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10억이 채 되지 않는 부족한 예산과 한 달 사이에 20회차 이상을 소화해야 했던 강행군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그의 심지가 그대로 전해져 오는 말이다.

그가 밝힌 것처럼, 영화를 처음 만난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분명히 익숙하지 않은 작품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익숙하지 않음으로부터의 이상한 느낌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되려, 이전에 만나보지 못한 방식으로 인한 신선함과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스릴감으로 전환될 것이다. 선정된 영화 전체를 잘 모르기는 해도,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나볼 수 있는 가장 이색적인 경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BIFF 럭키몬스터 봉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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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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