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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시내 주요 지역마다 공수부대 병력이 투입되어 시민들을 향한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되었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시내 주요 지역마다 공수부대 병력이 투입되어 시민들을 향한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시내 주요 지역마다 공수부대 병력이 투입되어 시민들을 향한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되었다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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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5월 18일 오전 9시경 전남대 정문 앞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시간이 지날수록 숫자가 늘어난 학생들은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회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했다.

전남대에 진주한 공수부대 최고 책임자인 권승만 중령은 사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직접 앞으로 나와서, "만약 즉시 해산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해산시키겠다"고 위협했다. 학생들은 악을 쓰듯 더욱 크게 노래를 불러댔다. 이때였다.

"돌격 앞으로!"

짧고 굵은 목소리로 명령이 떨어졌다.

공수대원들이 '으악' 소리를 내지르며 위협적으로 학생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곤봉으로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경찰들과는 전혀 달랐다. 가차 없이 머리를 후려갈겼다. 학생 몇 명이 피를 쏟으며 순식간에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설마 하던 학생들은 공수들의 진압태도에 경악했다. 학생들은 순간적으로 골목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모여들면서 돌멩이를 주워서 던지기 시작했다.

공수대원들은 이번에도 역시 저돌적으로 앞으로 진격해 나왔다. 날아오는 돌을 피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끝까지 한사람만 쫓아가서 곤봉으로 머리를 강타했다. 실신한 학생은 질질 끌고 갔다. 30여분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폭동진압 훈련과 게릴라 특수훈련을 받은 최강의 공수부대와 맨손으로 싸운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주석 7)

  
역시 신복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가 80년 5월 18일 촬영한 사진. 도망치다 쓰러진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고 있는 뒤쪽으로 한 공수부대원의 M16소총에 대검이 뚜렷이 보인다.(붉은 색 원) 5.18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았다 - 계속되는 오일팔(1979.2.25-2004.5.18)>에서 발췌.
▲ 역시 신복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가 80년 5월 18일 촬영한 사진. 도망치다 쓰러진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고 있는 뒤쪽으로 한 공수부대원의 M16소총에 대검이 뚜렷이 보인다.(붉은 색 원) 5.18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았다 - 계속되는 오일팔(1979.2.25-2004.5.18)>에서 발췌. 역시 신복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가 80년 5월 18일 촬영한 사진. 도망치다 쓰러진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고 있는 뒤쪽으로 한 공수부대원의 M16소총에 대검이 뚜렷이 보인다.(붉은 색 원) 5.18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았다 - 계속되는 오일팔(1979.2.25-2004.5.18)>에서 발췌.
ⓒ 신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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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이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전남대 후문과 광주역 앞에서도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남대 후문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 공수 2명이 내 양쪽 팔을 잡고 전남대 수위실로 끌고 갔다. 왜 나를 잡아가느냐는 물음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군화발로 차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팼다. 수위실에는 먼저 잡혀온 몇몇 사람이 포승줄에 묶인 채 꿇어앉아 있었다. (구술 : 장천수)

오전 10시경 10번 시내버스를 타고 갔다. 전남대 후문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한 명이 내리자 담벼락에 숨어 있던 공수가 달려와 버스를 세우더니 승객들에게 내리라고 했다. 아무도 내리지 않자 공수 2명이 승차하여 닥치는 대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20∼30명의 승객을 끌어내린 후 전남대 수위실 부근에 감금시켰다. (구술 : 범진염)

광주역 앞에서 전남대생 2백여 명이 집결하여 금남로 도청 앞까지 행진하다 경찰의 제지로 광주우체국 쪽으로 흩어짐. (5ㆍ18 당시 시청에서 정리한 일지로 경향신문 1988년 5월 18일자에 발표된 5ㆍ18사태 상황 및 조치사항.) (주석 8)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의 모습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의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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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과 공수부대원들 사이에 격렬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을 때 김한중(20세)이 "여기서 승산없는 싸움을 계속할 것이 아니라 도청으로 갑시다"라고 외쳤고, 모두들 공감하여 시위장소를 도청쪽으로 옮겨갔다.

5월 18일 오전, 공수대원들의 폭력적인 진압에 분노한 학생들은 한적한 전남대 정문보다 시민들의 왕래가 많은 도청 앞에서 시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판단하고 그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후 10일 동안 광주시민들에게 공포와 분노의 대명사가 된 공수부대와의 첫 격돌" (주석 9)
이 시작된다.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면서 공수부대의 진압은 더욱 난폭성이 심해졌다. 학생들은 여전히 구호를 외치며 군경의 곤봉과 페퍼포그에 돌멩이로 맞섰다.

곤봉세례를 피해 교문 앞을 빠져나온 학생들은 광주역, 공용터미널, 카톨릭센터 등을 거쳐 도청 앞 진출을 시도한다. 경찰의 저지에 막혀 학생들이 중간집결한 곳은 공용터미널과 가톨릭센터, 두 군데의 참여 학생수가 각각 5백여 명을 넘어서자 경찰은 가스차 등을 동원, 해산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공용터미널 대합실 내에 최루탄이 무차별 난사돼, 시민들의 분노와 함께 이날 오전 시위를 격화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경찰 저지에 막혀 도심지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오전 시위 상황은 충장로파출소와 동명파출소 등의 유리창이 부서지는 등 과격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초보적인 항의시위 수준을 유지한다.
  
진압군의 '화려한 외출' 이라고 이름 붙여진 충정 작전
▲ 진압군의 "화려한 외출" 이라고 이름 붙여진 충정 작전 진압군의 "화려한 외출" 이라고 이름 붙여진 충정 작전
ⓒ 사진출처: (재)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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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후 들어 시위와 진압방식은 급변한다.

육군본부는 오후 1시께 학내에 진주해 있던 7공수부대에 가두시위 진압지시를 내리는가 하면 이들 외에 11여단 (여단장 최웅 준장)을 추가 투입키로 하는 등 공수부대에 의한 시위 진압방침을 확정한다.

7공수 제33대대는 이와 관련 이날 오후 1시께 광주 수창국민학교에 집결한 뒤 오후 3시를 전후해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나서게 되고 제35대대 (대대장 김일옥 중령)도 오후 4시께부터 이에 합류한다. (주석 10)


광주에서 일정한 규모의 소요를 일으켜 집권의 명분으로 삼고자 기도한 신군부 측은 수시로 상황을 보고받으면서 악화 쪽으로 사태를 몰아갔다. 학생들의 시위가 시민항쟁으로 비화하게 된 것은 특수훈련을 받은 공수대원들의 무자비한 폭력 행사가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면서 발화되었다.


주석
7> 황석영 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 개정판)』 62쪽, 창비, 2017.
8> 『광주항쟁전집』, 22쪽.
9> 『정사 5ㆍ18』, 145쪽.
10> 앞의 책, 14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5ㆍ18광주혈사 , #5.18광주민주화운동40주년, #전남도청, #5.18전야, #광주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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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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