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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18 당시 전남대 정문
▲ 80년 5.18 당시 전남대 정문 80년 5.18 당시 전남대 정문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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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생들이 5월 18일 자신들이 주인인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할 때 제지한 군인들은 누구이고, 이들은 언제 교정 안으로 들어왔을까.

국가안보의 책무를 맡은 군부대가 야밤 중에 대학에 들어가 학생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이튿날 등교하는 학생들의 출입을 막았다.

18일 밤 1시에 전북 금마에 주둔하던 특전사 제7여단 (여단장 준장 신우식) 제33, 35대대 장교 82명, 사병 604명이 전남대에 도착하여 도서관, 총학생회실 등에 있는 학생들을 급습하고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한 후 체포했다.

이날 새벽 2시에는 제33대대 (대대장 권승만 대령)는 장교 45명, 사병 321명이 전남대와 조선대를 동시에 점령하고, 관내에 있던 학생 43명을 체포했다. 구속영장은 커녕 체포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제35대대 (대대장 김일욱 중령) 장교 29명, 사병 285명이 조선대를 점령하고 학생 43명을 체포했다.

"17일 밤 전남대 총학생회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11시경에 군부대 트럭이 교내로 들어왔다. 그들은 통신점검차 들렀다고 하면서 횡설수설했다. 자정이 되자 공수들이 정문과 후문으로 계속 밀어닥쳤다. 총학생회 사무실에 있던 7명 중 3명은 무사히 빠져나가고, 권창수ㆍ오진수ㆍ나 외에 1명이 새벽 1시경 공대 5호관에서 붙잡혔다." (구술:이승룡) (주석 4)
  
당시의 모습
▲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모습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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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군부대는 이들 대학 뿐만 아니라 광주시내 소재 모든 대학(전문대 포함)을 기습, 점령했다. 제31사단 96연대가 점령한 각 대학과 동원된 병력은 다음과 같다.

 호남신학대, 장교 3명 사병 42명
 서원보건전문대, 장교 3명 사병 35명
 동신전문대, 장교 3명 사병 27명
 대건신학대, 장교3명 사병 29명
 서강전문대, 장교 3명 사병 32명
 성인경상전문대, 장교 2명 사병 47명
 기독간호전문대, 장교 3명 사병 35명
 송원전문대, 장교 2명 사병 47명

신군부의 명령으로 31사단 96연대가 점령한 것은 대학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각에 광주시내의 모든 방송국을 점령했다.

 KBS는 장교 2명 사병 40명
 MBC는 장교 1명 사병 10명
 VCC(전일방송)는 장교 1명 사병 10명이 동원되었다.

또 이날 새벽 5시경에는 광주지역의 민주인사와 학생회 간부들을 연행하였다.

 1. 정동년ㆍ김상윤 등 복학생과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들에 대한 연행작전.
 2. 도서관에서 철야하던 전남대ㆍ조선대 학생들의 회의장, 농성장애 공수부대가 급습, 학생회 간부 및 복학생, 시위주동 혐의자들을 검거하여 운동장에서 옷을 벗겨 꿇어앉히고 구타한 뒤 연행. 공수부대와 합수부(안기부, 경찰, 보안대)는 새벽 5시경까지 학교와 예비검속 대상자의 가택 등을 수색.
 3. 예비검속자 명단 : 정동년(전남대 4년) 권창순(전남대), 오진수(전남대), 이승룡(전남대 3년), 유재도(조선대), 유소영(조선대).

"조선대 방송실에서 선후배들이 모여 철야 간담회를 하고 있는데, 31시단 소속 통신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학교 통신시설을 점검한다며 들어왔다. 형식적인 점검 후 그들이 나가자 나는 화장실에 갔다. 잠시 후 방송실에서 험한 욕설이 흘러나오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요란했다. 교내에 계엄군이 진입한 것이다. 그때가 밤 12시경이었다." (구술:진호림) (주석 5)

 
진압군의 '화려한 외출' 이라고 이름 붙여진 충정 작전
▲ 진압군의 "화려한 외출" 이라고 이름 붙여진 충정 작전 진압군의 "화려한 외출" 이라고 이름 붙여진 충정 작전
ⓒ 사진출처: (재)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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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밤중에 일어난 이같은 사태를 까맣게 모르는 채 약속대로 오전 9시부터 등교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등교할 시각 전남대 앞에는 군인들 뿐만 아니라 경찰 724명도 배치되었다.

 1. 전남대 정문 앞에 학생들 모이기 시작.
 2. 일찍 등교한 전남대생 6명, 팬티만 입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3. 전남대생 1백 명 가량이 학교에 들어가려다 기동경찰과 대치. 투석전.
 4. 휴교령으로 문이 닫힌 전남대 정문에서 학교에 들어가려던 교수 한 분이 계엄군에 의해 구타당하자 분개한 전남대생 2백여 명이 학교 정문에서 20분간 공수,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뒤 중홍동 금남로에 진출하여 연좌,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사임을 요구하며 가두농성을 시작했다.

40여 분간 요지부동으로 연좌데모를 하던 학생들이 한일은행과 YMCA 양쪽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는 경찰의 최루탄에 견디지 못하고 흩어지자 사복형사들이 뛰쳐나와 학생들을 체포했다. 이에 연변의 시민들이 형사들에게 야유를 던지기도 했다. 학생들은 흩어졌다가 현대극장 앞에서 다시 일행을 규합. 이때 조선대학교 및 전문대 학생들이 가세하면서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상기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신동아, 1985. 10) (주석 6)


광주의 5월항쟁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전시민적 봉기로 확산되었다.


주석
4>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편,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 222쪽, 1990. (이하 『광주항쟁전집』 표기)
5> 앞과 같음.
6> 앞의 책, 22~2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5ㆍ18광주혈사, #5.18광주민주화운동40주년, #5.18전야, #전남대, #광주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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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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