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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문화재단과 진주문화연구소는 <진주문화를 찾아서>로 2001년 <논개>를 낸데 이어 이번에 20번째로 <진주성 촉석루>를 펴냈다.
 남성문화재단과 진주문화연구소는 <진주문화를 찾아서>로 2001년 <논개>를 낸데 이어 이번에 20번째로 <진주성 촉석루>를 펴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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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문화를 찾아서' 책자가 20여년만에 20번째 나왔다.

남성(南星)문화재단(이사장 김장하)과 진주문화연구소는 최근 <진주 근대화에 이바지한 호주 선교사 커를과 그의 동료들>(조헌국 글, 김신곤 사진), <진주성 촉석루>(황의열 글, 유근종 사진)를 한꺼번에 펴냈다.

이 두 책자는 '진주문화를 찾아서' 19번째와 20번째로 출판사 '한국문화사'를 통해 나왔다.

'진주문화를 찾아서'는 남성문화재단이 기금을 출연하고 진주문화연구소가 기획해 펴내고 있는 책자다. 2001년에 나온 첫 번째 책자는 고 김수업 교수가 쓴 <논개>(사진 김용철, 지식산업사)였다.

당시 '진주문화를 찾아서 편간위원회'는 "새천년의 문턱을 넘어 첫발을 내딛으면서 우리는 진주문화를 찾아서 길을 나섰다"고 했다.

편간위원회는 "우리가 진주문화를 찾아서 나설 수 있었던 힘은, 무엇보다도 남성문화재단에서 나왔다"며 "이 재단이 진주문화의 지킴이며 지렛대임은 진주사람들이 두루 아는 사실이거니와, 우리가 진주문화를 찾아서 나선 뜻이 재단이 이루려는 뜻과 어우러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고 김수업 교수는 한용운이 썼던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라는 시를 소개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논개에게 노래(시)를 바쳤으나 한용운이야말로 논개의 사당에 노래를 바칠 자격이 넉넉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정작 그는 눈물을 흘리며 논개에게 용서를 빌고 있다"며 "한용운은 논개와 더불어 서로 '금석 같은 굳은 언약'을 했다 한다. 그런데 논개는 언약을 저버리지 않았으나 자기는 저버렸다 한다. 논개는 지키고 한용운은 저버린 그 언약이란 과연 무엇일까"라고 했다.

이후 '진주문화를 찾아서'는 계속 나왔다. <남명 조식>(허권수 글, 김한수 사진), <형평운동>(김중섭 글, 김우태 사진), <1862년 진주농민항쟁>(김준형 글, 김한수 사진), <진주 옛 이야기>(안동준 글, 정현표 사진), <진주의 선사․가야문화>(조영제 지음), <진주의 차(茶)맛>(정헌식 글, 마상철 사진), <진주팔경>(강희근 글, 김용철 사진)이 차례로 나왔다.

그리고 <진주오광대 탈놀음>(정병훈 글, 리영달 사진), <진주의 지질과 화석>(서승조 지음), <그대로 박생광>(김수현 지음), <진주 사투리>(조규태 글, 박현규 사진), <진주 역사>(김해영 글, 김용철 사진), <진주성 전투>(지승종 글, 김용철 사진), <명창 김선유>(최난경 지음), <진주의 옛 건축>(고영훈 지음), <진주성 이야기>(김준형 지음), <복자 정찬문>(박용국 글, 유근종 사진)이 뒤를 이었다.

현재 '진주문화를 찾아서 편간위원회'는 고영훈 경상대 교수(건축학)와 김준형 경상대 명예교수(역사교육), 김중섭 경상대 교수(사회학), 리영달 진주문화사랑모임 명예이사장, 안동준 경상대 교수(국어교육), 정병훈 경상대 교수(철학), 조규태 경상대 명예교수(국어교육)가 참여하고 있다.

'진주문화를 찾아서' 책자 발간은 20여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동안 출판사가 '지식산업사', '문화고을', '알마'를 거치기도 했다.

편간위원회는 "진주문화를 찾아서가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남성문화재단 김장하 이사장의 열의와 후원 덕분"이라며 "긴 세월 끊임 없이 발간 비용을 맡아 주시며 시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도록 독려해 주시는 것은 진주사람이라는 특별한 마음가짐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편간위원회는 "진주의 역사, 문화, 인물 등에 대하여 시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처음 마음 그대로이다"고 했다.

앞으로 나올 책자로는 <진주 문인>, <진주 음식>, <진주 비단>, <화가와 명필>, <진주 옛노래>, <진주의 정자들> 등 많다.

조헌국 "교육도시는 선교사 영향" ... 황의열 "촉석루에 사람이 겹쳐 보인다"
  
남성문화재단과 진주문화연구소가 <진주문화를 찾아서>의 19번째와 20번째로 <진주 근대화에 이바지한 후조 선교사 커를과 그의 동료들>, <진주성 촉석루>를 펴냈다.
 남성문화재단과 진주문화연구소가 <진주문화를 찾아서>의 19번째와 20번째로 <진주 근대화에 이바지한 후조 선교사 커를과 그의 동료들>, <진주성 촉석루>를 펴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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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국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이사는 이번에 나온 책자에서 휴 커를(1871~1943, 거열휴) 선교사를 소개했다.

조 이사는 "우리 겨레가 20세기초 나라를 읽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왔다"며 "진주에도 호주의 의료 선교사 커를 부부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가 큰 비전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들이 이 지방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여 주고 사랑으로 의술을 베풀며 남녀 어린이들을 모아 교육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진주에 맨 처음 도착한 커를 의료선교사는 가난과 무지와 미신으로 열악한 진주에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복음을 향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게 하였다"며 "진주가 오늘날 교육 도시로, 병원 도시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들 호주 선교사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황의열 경상대 교수(한문학)는 <진주성 촉석루>에서 "주변의 풍광도 아름답지만, 역사의 현장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며 "임진왜란 당시 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삼장사를 품었고, 왜적에게 목숨을 잃은 수많은 병사와 백성들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이제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남강을 굽어보면서 진주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황 교수는 "진주낭군의 부당한 처사를 받아들이지 못한 아낙(진주난봉가), 왜적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운 병사, 더렵혀지기보다 죽음을 택한 논개와 삼장사, 처지를 돌보지 않고 탐욕을 꾸짖은 기생 산홍, 그리고 촉석루를 노래한 많은 시인, 그들의 유전자에는 공통적으로 남강과 촉석루가 새겨져 있다"고 했다.

그는 "남강의 물 냄새를 맡으며 저만치 있는 촉석루를 올려다보면, 8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온갖 풍상을 다 겪고도 지금은 다시 의연히 서 있는 촉석루의 모습이 고맙기도 하다"며 "착잡해 보이던 촉석루의 모습이 든든해 보이기 시작한다. 촉석루의 모습에 사람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곡절 많은 인생을 돌아보며 한 곡조 뽑아내는 피리소리처럼, 촉석루가 전해주는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

태그:#남성문화재단, #진주문화연구소, #진주문화, #촉석루, #커를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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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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