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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5일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서울역 앞에서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1980년 5월 15일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서울역 앞에서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 1980년 5월 15일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서울역 앞에서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1980년 5월 15일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서울역 앞에서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 김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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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봄 신학기가 되면서 대학가는 정치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반유신 투쟁의 진원지이기도 했던 대학가는 최규하 정부가 민주화를 지연시키고 신군부가 12ㆍ12 사태를 통해 군권을 장악한 후 충정부대의 특수훈련을 비롯 각종 흉흉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ㆍ시위를 벌였다.

5월 1일부터 전국의 대학에서 시위가 전개되고, 특히 서울에서는 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하였다. 학생들은 12일 서울 및 지방 26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를 열어 신군부에 빌미를 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교외 시위를 않기로 결의하는 등 크게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15일 저녁에는 경인지역 총학생회장단이 가두시위 철수를 결정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의 결정이다.

5월 1일부터 13일까지 학생운동의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5월 1일~13일 까지 대학가 움직임

 5월 1일 
 - 서울대학교 아크로폴리스에서 '민주화를 위한 시국 대토론회' 개최

 5월 2일 
 - 성균관대학교 1,500여 명 '유신잔당 퇴진' 교내시위
 - 서울대학교 1,000여 명 철야농성
 - 고려대학교 2,000여 명 철야농성
 - 전북대학교 1,000여 명 교내시위
 -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병영집체훈련 일단 응소' 결정

 5월 3일
 - 지방 20여 개 대학 교내시위 전개

 5월 4일
 - 서울대학교 2,277명 병영집체 훈련소 입소
 - 충남대 철야농성

 5월 6일
 - 연세대학교 철야농성
 - 서울시내 6개 대학 교내시위
 - 전북대학교 3,000여 명 '비상계엄 해제하라' 교내시위

 5월 7일
 - 서울시내 10개 대학 및 지방 4개 대학 교내ㆍ외 시위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일동 '비상계엄 해제' 등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 발표

 5월 8일
 - 서울시내 6개 대학 및 지방 5개 대학 교내ㆍ외 시위
 - 이화여대 교수 300여 명 시국선언문 발표

 5월 9일
 - 한신대학교 교수 16명 '계엄해제' 등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 발표
 - 중앙대학교 교수 250명 시국선언문 발표
 - 서울 및 지방 대학 교내ㆍ외 시위

 5월 10일
 - 서울과 지방의 23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당분간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교내 시위를 원칙"으로 한다는 공동성명 발표
 - 서울 및 지방 대학 정상수업 하며 시국성토 진행
 - 동국대학교 교수 198명 시국선언문 발표
 - 고려대학교 총장 김상협 '교수ㆍ학생ㆍ협의회 구성' 용의 있다고 발표

 5월 12일
 - 서울 및 지방 26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15일 교외시위 않기로"하는 3차 결의안 발표          
 - 서울과 지방의 대부분 대학 오전 정상수업, 오후 농성 등 교내시위 자진해산
 - 고려대학교 교수 236명 교수협의회 결성
 - 인하대학교 교수 140여 명 교수협의회 결성 및 시국선언문 발표

 5월 13일
 - 연세대생 주축이 된 서울시내 6개 대학 2,600여 명 세종로 일대에서 야간 가두시위
 - 고려대학교 등 서울시내 7개 대학 철야농성. (주석 6)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각 학교마다 교문을 뚫고 서울역으로 집결했다. 총집결한 그 날 ‘서울의 봄’ 시위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각 학교마다 교문을 뚫고 서울역으로 집결했다. 총집결한 그 날 ‘서울의 봄’ 시위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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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음모가들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사회혼란으로 몰아 거사의 명분으로 삼으려다 예상외로 학생들이 자제하고 나서자 충격에 빠졌다. 그렇다고 음모를 중지할 자들이 아니었다. 더 철저히, 치밀하게 거사를 서둘렀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밤 11시 40분 최규하정부 대변인 이규현 문화공보부장관을 통해 20분 뒤인 17일 24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발표했다.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사태" 등을 이유로 들었다.

1961년 5ㆍ16쿠데타의 명분과 똑같았다. 그때도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가고 혁신계 등 재야의 시위도 자제된 상태였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1980년 5월 15일부터 전국의 대학가는 가두시위를 중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신군부는 5월 3일부터 특전부대를 주요 부처와 지역에 은밀히 배치했다.

5ㆍ17 군사쿠데타 직전 충정부대의 이동 및 배치 상황 (주석 7)
 
5ㆍ17 군사쿠데타 직전 충정부대의 이동 및 배치 상황 5ㆍ17 군사쿠데타 직전 충정부대의 이동 및 배치 상황
▲ 5ㆍ17 군사쿠데타 직전 충정부대의 이동 및 배치 상황 5ㆍ17 군사쿠데타 직전 충정부대의 이동 및 배치 상황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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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6> 정상용 외, 앞의 책, 118~119쪽.
7> 앞의 책, 139~14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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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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