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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로서 잘 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오개념이 확률이 높다.
 아빠로서 잘 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오개념이 확률이 높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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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자녀 독서교육지도 만점이네."

아내가 싱글벙글 웃으며 유치원 부모교육자료를 건네주었다. 매달 한 차례씩 나오는 가정통신문 같은 종이였다. 10월 호의 주제는 독서교육. 이런저런 인사말과 독서교육이 중요하다는 멘트가 처음에 나왔고, 간단한 체크리스트가 하단에 들어가 있었다. 아내의 기분이 좋았던 이유는 '당신의 자녀 독서교육지도는 몇 점입니까'라는 체크리스트 때문이었다. 

질문은 총 6가지로 모든 응답에 따라 최저 6점에서 30점까지의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플 때 책을 읽어주었다' '책을 함께 읽으며 놀았다' 등의 항목으로 점검하기에 나쁘지 않은 자료였다. 

나도 20점 이상은 가볍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집이 다른 거로는 자랑할 게 없어도 TV 없고, 책 즐기는 건 양심의 가책 없이 내세울 수 있었다. 괜히 신이 나서 대충 본 인사말부터 다시 꼼꼼히 읽었다. 우리 가족을 칭찬하는 내용인데 세 번인들 못 읽겠는가. 그러나 한껏 고조된 기분은 금세 가라앉았다. 텍스트에서 심각한 결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빠'라는 말이 안 보였다. 분명 부모교육자료인데 '아빠'라는 낱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사실 꼭 아빠라는 표현이 안내장에 실릴 필요는 없다. 부모라는 복수 명사도 있으니까. 그러나 내가 거슬렸던 건 엄마 역할의 중요성만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해서 나온다는 점이었다. 

책을 읽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감기로 누워 있던 어느 날 어머니가 읽어주던 동화책, 책 읽어주는 엄마가 되자, 그림 읽기를 도와주는 엄마, 아이에게 책 읽어 달라는 엄마, 괴테의 어머니,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로 길러주는 엄마 등

다 끄집어내지 않아서 그렇지 안내장 중간중간에 나온 엄마, 어머니를 모두 꼽다 보면 이게 '사모곡'인지 '부모교육자료'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내가 유인물을 한참 붙잡고 있자 아내가 '뭘 그렇게 생각하냐'며 옆에 앉았다.

아내 : "독서지도 잘한다고 하니까 그렇게 좋아?" 
: "유치원 선생님이 성 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아빠들이 노답인 걸까?"


나는 대답도 제대로 안 한 채 이상한 질문을 했다. 아내는 동문서답하는 걸 싫어하는데 '성 인지 감수성'이라는 단어가 흥미로웠는지 다시 풀어서 설명해달라고 했다. 나는 문장을 손으로 가리키며 조금 더 일반적인 형태로 질문을 바꿨다.

: "부모교육 자료인데 아빠가 없어. 이것도 육아하는 아빠를 은연중에 배제했다고 봐야 하나?"
아내 : "자기는 애써서 하는데 몰라줘서 속상한 거야? 오구오구. 우리 남편 잘한다."


나는 뜻하지 않은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아졌지만 의문은 그대로였다. 현상이 의식을 만드는가, 의식이 현상을 만드는가. 쓸데없이 거창한 문장이 되어버렸지만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빠들이 자녀 교육에 무관심하니까 유치원 안내장 같은 건 읽을 리도 없고 그래서 유치원 선생님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엄마'를 실질적 유일 독자로 상정했다. 이 경우 무관심한 아빠라는 현상이 유치원 선생님의 의식에 영향을 끼친 것이 된다. 

혹은 유치원 선생님께서 자녀 교육은 엄마가 해야 한다는 의식이 확고해서 엄마 중심의 자녀교육 안내장을 만들게 되었다. 그 결과 아버지들은 책무감을 느끼지 않아 자녀교육에서 멀어지는 현상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두 번째 가정은 지나친 감이 있다. 세상에 어떤 선생님이 자녀 교육을 엄마에게만 맡기고 싶어 하겠는가. 남편들이 하도 자녀에게 무관심하니까 또 다른 집 남자들도 비슷하니까 자식 교육의 책임이 어머니에게 몰리게 된 게 아닐까. 체념과 좌절의 결과라고 봐도 좋고. 나는 그만 스스로 의문이 풀려버려서 정리하듯 말했다.

: "아빠들이 제대로 안 하니까 이런 안내장이 나오는 거다."
아내 : "그럼 자기는 유치원 카페 가입했어?"
: "무슨 카페?"
아내 : "애들 활동사진 올라오는 카페 있잖아. 나 가족 카톡방에 올리는 사진 거기서 다운받는 거야. 몰랐지?"


유치원 선생님은 아무 잘못이 없다. 나 같은 놈들이 사방에 천지니까 부모교육자료에 엄마 밖에 안 나오는 거다. 나는 냉큼 핸드폰을 들어 카페 가입 신청을 했다. 나는 그걸 또 아내에게 자랑하듯 말했고 아내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내 : "둘째 기저귀 시키는 사이트랑 최저가 루트는? 애들 가을 내복 사이즈는 알아? 신발은 언제 바꿔줘야 하지? 자기 아무것도 모르지?"

나는 어버버 하다가 입을 닫아버렸다. 남편들이 나름 자녀 양육 열심히 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오개념일 확률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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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입니다. 교육, 그림책, 육아, 일상 주제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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