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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특별한 당근 가게가 생겼다. 뭐든지 함께 하고 어디든 같이 다니는 큰 토끼와 작은 토끼는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생긴 당근 가게 광고지를 보았다.

"우아, 나 새로 생긴 당근 가게 가고 싶어!"

호기심 많은 작은 토끼가 말했다. 겁 많은 큰 토끼는 넓은 들판을 지나다 사나운 동물을 만날까 봐, 깊은 강을 건너다 빠질까 봐, 깜깜한 숲길에 귀신이 나타날까 봐 작은 토끼를 못 가게 한다.

'당근 가게에 다녀올게. 안녕. 작은토끼가.'

큰 토끼 마음도 모르고 작은 토끼는 달랑 메모 한 장 남겨놓고 길을 떠났다. 혼자 먼 길을 떠난 작은 토끼가 걱정돼 큰 토끼는 헐레벌떡 뛰어 나갔다. 들판을 지날 때 예상대로 사나운 동물들이 나타났지만 큰 토끼가 똑바로 쳐다보자 동물들이 슬금슬금 도망갔다.

들판을 지나 만난 강물은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깜깜한 숲길은 정말 무서웠다. 큰 토끼는 소리쳐 작은 토끼를 불렀다. 그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고 큰 토끼는 작은 토끼와 만났다. 함께 하게 된 둘은 더이상 무섭지 않았고, 당근 가게로 향했다.
 
진정한 용기에 대한 이야기 '큰 토끼 작은 토끼'
 진정한 용기에 대한 이야기 "큰 토끼 작은 토끼"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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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발견한, 올해 5월에 나온 신인 이올림 작가의 첫 그림책 <큰 토끼 작은 토끼> 줄거리다. 큰 토끼와 작은 토끼 일러스트가 귀여운 이 그림책에서 당근가게 가는 길을 무서워하는 큰 토끼가 들판과 강물을 건너는 장면이 재미있다.

5층짜리 건물만한 큰 토끼, 동물들은 큰 토끼를 보고 무서워서 도망가는 듯하다. 자신의 몸집에 맞지 않는 오리 튜브를 끼고 무릎 아래 강물을 건너는 큰 토끼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겁이 많은지를 잘 표현해 준다. 커다란 몸집 만큼 두려움도 큰 토끼가 보여주는 진짜 용기가 매력적인 그림책에서 나는 친정 엄마를 만났다.

우리 엄마는1950년에 태어나 6.25를 겪은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모르고 자랐다. 지금은 폐교를 이용한 '책마을'로 유명한 고창군 해리면이 그 시절에는 전쟁도 모를 만큼 깡촌이었다.

전쟁도 피해간 깡촌, 남자들은 공부시켜 대처로 보내고 여자들은 집안일만 시킨 촌에서 자란 덕에 엄마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 했다. 하얀 칼라 깃을 세운 교복 입고 학교 가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며 엄마는 밭을 맸다. 

그런 엄마에게 기회가 왔다. 동네 유일한 대학생인 서울에 사는 큰 오빠 밥 챙겨주러 상경하게 된 것이다. 큰 오빠를 위해 식모살이를 하러 올라온 엄마는 이후 서울살이를 하며 미용일도 배우고, 얼굴 마사지도 배우며 배움이 적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직업을 전전했다. 혼기가 차 선을 봐서 결혼을 한 뒤 아이 둘을 낳고 12년 동안은 전업 주부로 살았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동생이 2학년이던 때였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전집을 들여놓는 게 시대 흐름이었다. 한 번에 거금을 들여 책장을 채워야하는 전집은 서민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시대 흐름이었다. 지금처럼 도서관이 많거나 단행본 책 출판이 활발하지 않았기에 전집은 있는 집에서나 볼 수 있는 컬렉션이었다.

배움이 짧은 게 한이었던 엄마는 자식에게 책을 사주고 싶었다. 학원 보내고 과외는 못 시켜줘도 책은 보여주고 싶었다. 용달차에 이삿짐을 싣고 나르며 아빠가 벌어오는 그날그날의 벌이로는 꿈꿀 수 없는 전집.

엄마는 일단 전화를 걸었다. <디즈니 그림명작>을 시작으로 80년대 출판업계를 장악했던 계몽O는 전집 시장에서 지금의 삼성과 같은 존재였다. 엄마는 그곳을 목표로 잡았다. 

계몽O 출판사에 무작정 전화를 한 엄마는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영업담당 과장은 영업사원으로 일하면 직원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과장은 언제 한 번 사무실로 와서 상담 받아보라고 했다. 

"나 길도 모르고 그런 거 잘 모르고 무서우니까요. 저희 동네 아현 전철역으로 오세요. 거기서 만나서 얘기해요."

영업과장을 자기 구역으로 끌어들인 우리 엄마. 이때부터 우리 집 책장은 <어린이 위인전>을 시작으로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백과사전>, <한국사>, <세계사>에 이어 <newton> 과학잡지까지 계몽O에서 출판된 대부분의 책으로 채워졌다.

'한끼줍쇼'라는 TV프로그램을 보면 유명 연예인이 일반 가정집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떨려하는 모습이 나온다. '자신을 알아볼지 어쩔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초조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책을 팔기 위해 남의 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를 상상해봤다.

딩동~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계몽O에서 나왔는데요."
"안사요."
쾅!!


문이 닫히고 엄마는 발걸음을 옮겨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계몽O에요. 안 사요'가 반복되는 지난한 초인종 누르기는 자기 자신을 버리기 위해 탁발공양하는 스님이 된 것 같은 고행이었다.

"엄청 떨렸지. 남의 집 문턱 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잡상인 취급하고 남편 없는 여자 취급하고 서러웠어. 나도 집에 가면 토끼 같은 자식도 있고, 남편도 있다고 속으로 말하면서 돌아섰지."

엄마는 초인종도 눌렀지만 전단지도 뿌렸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아이들 손에도 쥐여주고, 지하철 역 앞에서 출퇴근 하는 사람들에게도 전단지를 쥐여줬다. 행여 자식들이나 그 친구들과 마주치면 우리가 창피해 할까 봐 동네 학교가 아닌 먼 곳에서만 작업했다.

전단지를 받은 사람 중에는 어떤 내용인지 한 번이라도 눈길을 주는 사람보다 받자마자 구겨서 길거리에 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버려진 전단지를 주워 펴면서 수치심과 모멸감에 구겨진 마음도 살살 어루만졌던 엄마. 엄마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호기심 많은 작은 토끼가 넓은 들판과 깊은 강물, 깜깜한 숲을 혼자 가는 게 걱정되어 헐레벌떡 뛰어나간 큰 토끼. 자식에게 전집을 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누르고 전단지를 돌린 엄마. 큰 토끼와 엄마는 두렵지만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용기를 냈다. 용기는 두려운 마음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소중한 것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라는 걸 이들을 통해 배운다.

큰 토끼 작은 토끼

이올림 (지은이), 한울림어린이(한울림)(2019)


태그:#큰토끼작은토끼, #진정한용기, #친정엄마, #영업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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