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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100주년인 1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유관순 열사 후배인 이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이화학당 출신12명의 독립운동가 사진을 들고 그날을 기억하며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인 1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유관순 열사 후배인 이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이화학당 출신12명의 독립운동가 사진을 들고 그날을 기억하며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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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순국 제99주기 추모제'가 오는 28일 오전 11시 충남 천안 병천면에 있는 '유관순열사추모각'에서 열린다. 천안시(시장 구본영)와 (사)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회장 류정우)이 주관한다.

이날 추모제에는 박삼득 국가보훈처을 비롯한 각계인사, 기념사업회원, 독립유공자 유족과 학생 및 시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다. 추모제를 마친 뒤에는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서 순국한 47분의 위패가 모셔진 '순국자추모각'을 참배한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천안 병천면에서 태어났다. 이화학당을 다니던 중 고향에 내려와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됐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인 1920년 9월 28일 순국했다.

정부는 열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다음은 국가보훈처가 밝힌 유관순 열사의 공적 내용이다.

유관순 열사(1902. 12. 16.~1920. 9. 28.)는 1919년 4월 1일 갈전면(葛田面, 現川面) 아우내(川)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대표적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열사는 1916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고등과(高等科) 1학년 3학기 때에 거족적인 3ㆍ1 독립만세운동을 맞이하였다. 3월 5일 남대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열사는 조선총독부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향하였다.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 등을 돌아다니면서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천안ㆍ연기ㆍ청주ㆍ진천 등지의 교회와 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趙仁元), 김구응(金球應) 등과 만나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원군(옛 천안 지역에 있었던 행정구역)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와 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시위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전 9시, 3천여 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곧이어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만세소리로 진동하였고, 열사는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대열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칼에 찔려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열사는 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 파견소로 몰려갔다. 이들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하였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 내로 들어가 숨어버렸고, 시위 군중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충돌 없이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응원 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시위 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일본 헌병들은 이들을 끝까지 추격하면서 총을 발포하고 칼로 쓰러뜨렸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으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후 4시경, 열사는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김병호, 김용이 등 40여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소장을 비롯한 일본 헌병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열사는 한꺼번에 부모를 잃었을 뿐 아니라 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 검사국(公州檢事局)으로 송치되었다.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柳愚錫)을 만났으니, 열사의 가족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사가 아닌 이가 없었다.

결국 열사는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하여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7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열사는 옥중에서도 어윤희(魚允姬)ㆍ박인덕(朴仁德) 등과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열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도 국민들의 올바른 역사관 확립과 애국심 함양의 표상이 되어 민족정기 선양에 공헌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이는 등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 공적을 기려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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