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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기관 개혁은 언제나 풍파를 초래한다. 해당 기관 관료들은 가만 있을지라도,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이 거세게 저항하면서 풍파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래서 권력기관 개혁은 매우 힘든 정치적 과제 중 하나다.

그렇게 힘든 일이건만, 그런 힘든 일을 성사시킨 군주들이 있다. 그들 중 하나가 조선 중종 임금(재위 1506~1544년)이다. 그는 보수세력인 훈구파가 연산군을 몰아낸 덕분에 임금 자리에 올랐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대규모 부동산 소유자들인 훈구파의 힘으로 왕위에 올랐기에, 그는 처음 10년간은 허수아비로 살 수밖에 없었다. 훈구파 대신들이 보고를 마치고 물러갈 때, 엉겹결에 일어나 공손히 배웅을 하기도 했을 정도다.

조선 중종 임금의 권력기관 개혁
 
 조선 중종 임금
 조선 중종 임금
ⓒ 퍼블릭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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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그가 훈구파에 맞서 권력기관을 개혁하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그가 권력기관 개혁의 시발점으로 건드린 관청은 사간원과 더불어 사헌부다. 사헌부는 요즘으로 말하면 검찰청이다. 사헌부 벼슬 중에 '검찰'과 이름이 비슷한 '감찰'이 있었던 것도, 옛날 사헌부와 오늘날 검찰의 유사성과 관련이 있다. 한편, 사간원은 임금에 대한 직언을 전담하는 관청이었다.

개혁 방식인 인적 청산과 제도적 청산 중에서 중종은 인적 청산부터 손을 댔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면서 훈구파의 약화로 이어지고, 나아가 사림파(유림파, 선비그룹)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정권을 잡는 초유의 사태로 연결됐다.

사림파의 영구 집권은 1567년 선조 즉위 때 일어났다. 중종 때인 1516년부터 1519년까지는 제1차 사림파 집권기였다. '검찰 개혁'에서 시작된 1516년의 집권이 발판이 돼서 훗날 사림파가 영구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515년 연말에 개시돼 1516년 연초에 마무리된 검찰 개혁은 조선 역사에서 중대 의미를 띨 수밖에 없다. 이는 수도권의 대토지 소유자들로부터 지방의 중소 토지 소유자들로 권력이 이동하는 데 기여했다. 조선 사회의 건전화에 이바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헌부·사간원의 인적 청산은 상징적 의미의 피를 묻히는 작업이었다. 이런 일을 중종이 자기 손으로 벌이지는 않았다. 이때 임금을 대신해 앞장선 인물이 대표적 개혁가로 손꼽히는 정암 조광조(1482~1519)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혁가 조광조가 이때 등장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문신 인사권은 이조가 행사했다. 이조전랑으로 통칭된 종5품 이조정랑과 정6품 이조좌랑이 문신 전형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흠결 사유가 있는 관원은 이조전랑의 '청문회'를 통과하기 힘들었다.

만약 정상적 경로를 밟았다면, 조광조는 '청문회'를 넘지 못해 고위직 출세가 힘들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중종반정으로 혼란스런 틈을 타서 이듬해인 1507년, 그가 25세 나이로 혁명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25세 조광조가 벌이려 했던 것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서얼차별 철폐 등을 포함하는 사회혁명이었다. 서얼 중에서 얼자는 어머니가 노비인 딸이나 아들이었다. 그래서 서얼 문제를 개혁하게 되면, 노비 지위의 개선도 불가피하게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노비가 핵심 노동력이었던 시대에 노비 지위가 개선되면 지주계급의 이익이 침해될 수밖에 없었다. 서얼 개혁을 포함한 사회혁명을 기도하는 것은 그처럼 중차대한 문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조광조가 참여한 그 사건은 '조선시대판 사노맹 사건'이라 불러도 될 만했다. 조광조는 주모자는 아니었지만 모의를 함께한 핵심 인물이었다.

음력으로 중종 2년 윤1월 26일자(양력 1507년 3월 9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의금부에서 조사받을 때 그는 '모의 장소에 갔던 것은 기억나지만, 뭔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혐의를 부인했다.

이런 진술이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안 통했겠지만, 그에게는 통했다. 주모자들은 참수형을 받았지만, 그는 훈방 조치를 받았다. 개국공신 집안이었던 데다가 당시에도 명문가였기에, 그런 식의 진술로도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급제한 직후부터 개혁 소신 펼친 조광조

현실의 벽에 부딪힌 조광조는 방식을 바꿔봤다. 이번에는 제도권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좀 늦었지만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3년 뒤인 1510년 진사시험에 장원급제했다. 과거시험 1단계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것이다. 혁명하는 마음으로 공부했을 테니, 좋은 성적이 나올 만도 했을 것이다.

이 상태에서 국립대학 성균관에 들어갔고, 거기서 과거시험 2단계인 대과를 준비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515년 하반기에 대과에 급제했다. 이때가 34세였다.

조선왕조 500년간 급제자 평균 연령이 36.7세였으므로, 조광조는 좀 어린 편에 속했다. 혁명운동 때문에 중간에 좀 쉬기는 했지만, 그래도 평균보다는 빨리 급제한 것이다. 중종은 이렇게 나이도 젊고 행정 경험도 일천한 조광조를 전격 발탁해 개혁을 시도했던 것이다.

조광조가 중종의 관심을 받은 것은 급제한 직후부터 개혁 소신을 펼쳤기 때문이다. 재야 선비들이 훈구파를 비판하는 분위기에 맞춰, 그는 조정 내에서 개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간원에 배치된 그는 직무의 특성을 활용해 구세력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전면적 개혁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이 사간원 신참이 됐는데도, 그는 두 기관 관료들을 싹 다 파직할 것을 건의했다. 훈구파가 이곳을 매개로 사회발전을 훼방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관청에는 과거를 급제한 종9품 이상의 벼슬아치와, 주로 노비 출신 서리들인 구실아치가 있었다. 실무는 구실아치가 담당하고, 기획과 인사 등은 벼슬아치가 담당했다. 조광조가 요구한 것은 사헌부·사간원 내의 벼슬아치들을 전원 해임하라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중종은 사헌부·사간원의 훈구파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 왕권 강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조광조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광조를 제외한 사헌부·사간원 벼슬아치 전원을 해임했다. 그런 뒤 조광조를 중심으로 정권을 꾸렸다. 이렇게 해서 훈구파가 일대 타격을 받고 사림파가 도약하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정권을 잡은 조광조와 사림파는 훈구파를 완전 일소하지는 못하고 상당히 약화시키는 데만 성공했다. 중종은 개혁이 정점에 달하기 직전에 조광조를 전격 투옥하고 사형시켰다. 사림파가 너무 세지기 전에, 또 훈구파가 소멸되기 전에 개혁을 중단시킴으로써 양쪽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고 그 위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에는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가 파탄 났지만, 두 사람의 조합은 권력기관 개혁과 정치혁신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케미'가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중종의 강력한 후원 때문이었다.

권력기관 개혁과 정치혁신으로 이어진 중종-조광조 관계

조광조는 실무능력이 전혀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잘못을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혁명음모 경력도 중종에게 부담이 될 만했다. 하지만 중종은 개의치 않고 조광조를 맘껏 '이용'했다. 조광조의 정치적 약점이 부각되지 않은 것은 임금이 그를 전폭적으로 보호했기 때문이다.

중종의 예측불허한 일처리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34세의 신참 관료가 올린 상소를 근거로 사헌부·사간원을 뒤집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기 힘들었다. 훈구파가 조광조를 초기에 잡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설마 임금이 조광조의 말을 들어줄까 하고 안심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중종은 구세력의 예측을 보기 좋게 뒤엎었다. 조광조의 상소를 명분으로 인적 청산을 단행함으로써 구세력을 일대 혼란에 빠트렸다. 이는 훈구파가 조광조를 공격할 틈을 찾기 힘들도록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광조가 정권을 구성하고 개혁을 밀어붙였다. 이는 대토지 소유자가 아닌 건전한 중산층인 사림파가 역사의 주역으로 떠오르도록 만드는 데 기여했다.

조광조 자신의 개혁 의지와 카리스마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남의 눈치를 안 봤다. 자기가 생각하는 왕도정치(유교적 합리주의 정치) 이념에만 집중했다. 훈구파가 자신을 뭐라고 욕하는지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그를 재야 선비들도 전폭 지지했다. 이들은 오늘날의 아이돌 스타를 대하는 것 이상으로 조광조를 열렬히 환호했다. 이들의 전폭적 지원은 구세력이 조광조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군주와 개혁가와 재야가 다 함께 힘을 합친 결과, 1515년 연말부터 1516년 연초의 조선인들은 권력기관이 일시에 개혁되는 역사적 상황을 두 눈으로 목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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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101.9 (목)11시25분경. (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노비들,왕의 여자,철의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