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23 14:27최종 업데이트 20.01.06 18:33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첫째 날 루쉰공원(홍커우공원) 내에 있는 윤봉길 의사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생애사적기념관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 ⓒ 임시정부100주년역사탐방단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 기억해 내고, 찾아가고, 그리고 이름 모르는 독립운동가들을 단 한 분이라도 더 찾아내는 것입니다."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진행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을 안내하던 홍소연 해설사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은 공모를 통해 선발된 학생·교사·교직원들을 대상으로 총 6차에 걸쳐 진행된다. 이번에 떠난 탐방단은 2차 탐방단으로 전국에서 참여한 43명이 함께했다.

이번 탐방은 임시정부가 탄생했고 주로 활동했던 상하이와 자싱(가흥), 항저우(항주), 난징(남경) 등 임시정부가 피난했던 도시를 따라가며 그들의 발자취를 밟았다. 또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주요 요인들이 거주했거나 피난했었던 곳도 돌아보고, 마지막엔 일본의 반인륜적 극악무도한 만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난징대학살기념관과 리지샹위안소전시관도 방문했다.

[첫째 날]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에 서고, 임시정부가 탄생한 거리를 걷다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상하이 루쉰공원(홍커우공원) 한켠에 자리한 윤봉길 의사 의거를 기념하는 '생애사적기념관(매원)' 입구. ⓒ 오마이뉴스 장재완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상하이 루쉰공원(홍커우공원) 매원 입구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을 알리는 '윤봉길의거현장표지석'. 그러나 실제 의거 현장은 이곳이 아닌 루쉰의 동상이 있는 곳으로 추측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루쉰공원(홍커우공원) 내 마련된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기념관' 1층 전시실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탐방단. ⓒ 오마이뉴스 장재완

 
첫날 일정은 점심을 먹은 후 홍커우공원(루쉰공원)에서 시작됐다. 이곳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 사변 승전을 축하하기 위한 천장절 행사에서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물통) 폭탄을 던져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을 저격한 곳이다.

예전 이 곳은 홍구공원이라고 불렸으나 루쉰의 묘가 옮겨 오면서 이제는 루쉰공원으로 불린다. 공원의 한켠에는 별도의 윤봉길 의사 의거를 기념하는 '생애사적기념관(매원)'이 자리하고 있다. 2층으로 된 정자 형태의 기념관에는 윤 의사의 일생을 보여주는 영상이 한국말로 상영되고, 윤 의사가 남긴 글과 자료, 사진 등이 전시되고 있다.

탐방단은 자리를 옮겨 윤 의사가 실제로 폭탄을 던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장소를 찾아갔다. 지금은 루쉰의 동상이 서 있는 곳 어딘가에 당시 행사를 위한 단이 만들어졌고, 그 뒤쪽에서 윤 의사가 폭탄을 던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매원 입구에 있는 '윤봉길의거현장표지석'과는 거리가 있다. 공원의 구조와 증언 등을 종합해 볼 때 표지석이 있는 곳이 정확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윤 의사는 의거 직후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어 그 해 25살의 젊은 나이로 처형됐다. 오직 조국만 사랑했던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의거에 나섰는지를 잘 보여주는 두 아들에게 남긴 편지를 소개한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자는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홍커우공원을 나선 탐방단은 상하이 마당로에 위치해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인 1932년까지 임시정부가 사용했던 상하이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다.

3층 벽돌집으로 된 이곳에서 탐방단은 1층에서 영상을 시청한 뒤, 2층과 3층 전시관을 관람했다. 이곳에는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이 사용했던 가구와 서적, 사진 등이 잘 정리되어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유적지'라고 쓰인 커다란 안내판도 있다.

임시정부가 이곳에 있을 때 이봉창 의사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자신에게 폭탄을 만들어주면 일왕을 죽이겠다고 큰소리쳤던 이봉창 의사는 너무나도 활짝 웃는 사진을 남겼다. 우리의 해설을 담당하던 홍소연 해설사는 "젊은이 여러분, 그 당시 그 어느 날, 이봉창 의사가 저 4호 문을 두드린 것처럼 여러분도 한번 두드려 보세요"라고 권했다.

당시 김구 선생을 만나 이봉창 의사가 했다는 말을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해도 늙은 생활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영원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김구 선생은 '그의 인생관을 들으니 감동으로 눈물이 벅차올랐다'고 그 순간을 기록해 놓았다.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상하이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인 '마당로청사' 앞 벽에 새겨진 안내판. ⓒ 오마이뉴스 장재완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인 '마당로 청사'의 입구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기념관에서 나와 탐방단은 송경령능원(상하이만국공묘)으로 향하기 위해 거리를 걸었다. 그러던 중 조그만 사거리에서 교통신호를 기다리게 됐다. 그 때 "바로 저 쪽이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만났던 장소다"라는 홍소연 해설사의 설명이 들려왔다. 그가 가리키는 사거리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코 끝이 찡해왔다.

이어서 도착한 '송경령능원'에는 임시정부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선생의 묘가 있다. 이들 5인의 애국선열 유해는 1993년 8월 5일 봉환되어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현재는 기념석판만이 남아 있다. 최근에는 연병환 선생의 묘가 새롭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탐방단은 6인의 애국선열을 대표하여 김인전 선생의 묘 앞에 소박한 제사상을 차렸다. 중학생들은 종이 무궁화를 접어서 독립운동가들의 묘지석 옆에 꽂았다. 그리고 한 잔의 술을 올리고 묵념을 했다. 홍소연 해설사는 떠나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들 뿐만 아니라 이름 모르는 수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비록 여기 계신 분들은 뒤늦게나마 현충원으로 모셨지만,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분들이 이름도 알려지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 기억해 내고, 찾아가고, 그리고 이름 모르는 독립운동가들을 단 한 분이라도 더 찾아내는 것, 그런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홍소연 해설사에 따르면, 1919년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우리민족은 30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전체 독립운동가를 다 합치면 100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름을 찾은 독립운동가는 겨우 1만5689명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후손을 몰라 훈장을 전달하지 못한 독립운동가가 무려 6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임시정부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선생 등의 묘가 있었던 '송경령능원(만국공묘)'에서 탐방단 중 중고등학생들이 묵념을 하는 장면. 탐방단은 김인전 선생의 묘 앞에 간단한 제사상을 차리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임시정부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선생 등의 묘가 있었던 '송경령능원(만국공묘)'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홍소연 해설사. ⓒ 오마이뉴스 장재완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임시정부가 탄생했던 거리 '서금이로'를 알리는 팻말.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 거리 어딘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해가 진 어두운 길을 걸어 우리는 서금이로를 향했다. '서금이로'는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어난 곳으로, 비록 '임시'라는 딱지가 붙었지만 이 길 '어딘가'에서 대한민국이 시작됐다. 그러나 지금은 그 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걷는 도중 '임시정부 2청사'라고 할 수 있는 곳을 지났다. 옛 주소는 하비로 321호이고, 현재 주소는 회해중로 651호다. 지금은 "H&M'이라는 의류쇼핑몰이 들어서 있다. 당시 임시정부는 이 곳 청사 2층 외벽에 당당히 태극기를 내걸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예관 신규식 선생'이 거주했다는 상하이 남창로 100농 5호다. 좁디좁고 어두운 골목을 지나면 곧 쓰러질 것처럼 허름한 건물이 나온다. 지금도 중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우리는 겉에서만 잠시 보고 나와야 했다. 예전에는 '신규식 선생 거주지'라는 안내판이 있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1922년부터 1926년까지 거주했던 황피남로 350농 '영경방'을 둘러본 뒤에 도착한 첫날 마지막 방문지는 '황포탄 의거지'다. 중국 근대의 출발점이라는 상하이의 와이탄 한가운데 위치한 공동마두(과거에는 세관마두)가 의열단원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이 1922년 3월 28일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키이치를 죽이기 위해 권총을 쏘고 폭탄을 던졌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했던 장소다.

[둘째 날] 쫓기는 임시정부, 그들을 돕는 중국인들....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가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처음으로 피난처를 마련했던 자싱(가흥)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거주지' 외관. ⓒ 오마이뉴스 장재완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가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처음으로 피난처를 마련했던 자싱(가흥)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거주지' 내부 전시실 모습. ⓒ 오마이뉴스 장재완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가 중국인 저보성 선생의 도움으로 처음으로 피난처를 마련했던 자싱(가흥)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거주지'. 1층 전시실에는 김구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과 저보성(주푸청)선생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을 실물 2/3크기로 재현해 놓은 전시물이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탈출해야 했다. 일본은 김구 선생에게 현상금 60만원을 내걸었다. 오늘날의 돈으로 200억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거금이다. 윤 의사의 의거는 중국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개석은 "중국의 백만대군이 못한 일을 한 한국 청년이 해냈다고"고 높이 평가했다. 중국 사람들이 임시정부를 돕고 나선 이유다.

국민당 간부였던 저보성 선생은 자신과 가족들의 위험을 무릅쓰고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을 자신의 고향인 자싱으로 피신시켰다. 자싱시 일휘교 17호는 김구, 이동녕, 이시영, 송병조, 조성환, 엄항섭, 조완구 등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의 피난처이면서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하기도 한 곳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곳에서 3년간 숨어 지냈고, 김구 선생은 중일전쟁 발생 직후까지 5년 동안 자싱을 주된 근거지로 삼고, 주변의 거미줄처럼 발달한 운하망을 이용하여 외교, 군사, 정보수집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중국정부에 의해서 관리되고 있는 이곳의 1층은 전시실로 보존되어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었고, 2층은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이 살았던 모습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특히, 임시정부 요인들이 저보성 선생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물 2/3 크기로 만들어져 있는데, 목숨을 걸고 우리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중국인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 곳에 온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한 방문객은 방명록에 이렇게 남겨놓았다.

"저희 임시정부 요원들을 보호해주신 중국 인민들의 성의에 감사드립니다. 영원한 양국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합니다."

탐방단은 조금 걸어 매만가 76호 김구 선생의 피난처로 이동했다. 비좁은 2층 판잣집으로 되어 있는 이곳은 저보성의 양아들 진동생의 집이다. 이곳에서 김구 선생은 낮에는 뒷문으로 나가 주애보가 젖는 배를 타고 나갔다가 밤에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 김구 선생이 사용했던 침대와 옷장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2층 마루 한쪽의 비상 탈출구가 인상적이었다. 이 곳에서 사다리를 내려 1층 복도로 내려오면 곧바로 뒷문으로 나가 배를 탈 수 있다.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자싱(가흥)에 있는 김구 선생 피난처 매만가 76호 입구 모습이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자싱(가흥)으로 피난한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매만가 76호. 이 곳은 중국인 저보성(주푸청) 선생의 수양아들 전동생(첸둥성)의 별채로, 뒷문으로 나가면 곧바로 배를 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김구 선생의 피난처인 해염(하이옌)의 재청별장(재청별서) 입구. ⓒ 오마이뉴스 장재완

  
다음 방문지는 하이옌(하염) 재청별장(재청별서)이다. 이곳은 1916년 남북호 호숫가에 건축된 근대식 별장이다. 수배를 받아오던 김구 선생은 일본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다시 주가예(주보성의 며느리)숙부가 소유하던 이 별장으로 피신했다. 김구 선생은 1932년 7월부터 12월까지 이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재청별장 뒤뜰에는 김구 선생의 둘째 아들 김신 장군이 쓴 '음수사원 한중우의(韓中友誼)'표지석이 서있다. '물을 마시며 근원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김구 선생의 피난을 도왔던 저보성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표한한 글귀다.

김구 선생도 백범일지에 자신의 피난을 돕기 위해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으로 1박 2일에 걸쳐 배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걷고 걸어 고개를 넘으며, 자신을 안내했던 주가예의 고마움에 대해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저부인(주가예)은 굽 높은 신을 신고 더위에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고개를 넘었다. 친정 여자 하인 하나가 내가 먹을 음식을 들고 따라왔다. 우리가 이렇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을 활동사진기로 생생하게 찍어 자손만대에 전하고 싶지만, 활동사진기가 없으니 문자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중 누가 저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치 않으리오."

하이옌을 떠나 탐방단은 항저우(항주) 임시정부 청사로 이동했다. 윤봉길 의사 의거로 인해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가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사용했던 곳이다. 우리가 방문한 장생로 호변촌 23호는 항저우에서 두 번째로 마련한 임시정부 청사다. 처음에는 임시정부 군무장 김철이 머물렀던 곳을 청사로 사용하다가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항저우 청사는 2014년, 중국의 국가급 항전 시설 및 유적지로 지정된 곳이다. 이 청사에 들어서면 김철, 송병조, 차리석 선생의 사진이 걸려있다. 이 분들은 임시정부의 피난시기 '파수꾼 3인방'으로 불린다. 1층에서 영상을 통해 이 청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은 뒤 임시정부 요인들이 사용했던 침실과 집무실 등을 둘러봤다. 특히, 2층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중국인인 저보성 선생에게 수여한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후 탐방단은 한국독립당 항저우 본부 사무소 터인 '사흠방 40호, 41호',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이 생활했던 '오복리', 임시정부 군무장 김철이 머물렀었고 항저우 첫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했던 '군영반점(청태 제2여사,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곳)'등을 돌아봤다.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항저우(항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청사 내 전시실에 걸려 있는 당시의 태극기.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임시정부 항저우 청사 내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항저우 청사 시절 임시정부 요인들. ⓒ 오마이뉴스 장재완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둘째 날 밤 진행된 '역사강의' 시간. 강사로 나선 홍소연 해설사가 김구 선생이 남긴 '쟁두운동(爭頭運動)을 피하고 쟁족운동(爭足運動)을 해야 한다'는 말을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둘째 날 마지막 일정은 역사강의시간이다. 백범김구기념관 자료실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심산 김창숙기념관에서 일하고 계신 홍소연 해설사가 강사로 나섰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라는 주제로 약 1시간 가량 경술국치에서 시작, 임시정부의 탄생,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광복 후 정세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김구 선생이 남긴 '나의 소원'에는 바로 이러한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를 소개하는 대목이 잘 정리되어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특히, 이날 강의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을 한마디로 정의 한다면 '옳을 의(義)'다.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남겨 놓은 '새살림 차리어 고루 잘살게', 김구 선생이 남긴 '우리 동지들은 쟁두운동(爭頭運動)을 피하고 쟁족운동(爭足運動)을 해야 한다'는 말을 꼭 기억해 달라"는 말이 인상 깊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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