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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하늘에 양떼구름이 가득합니다. 햇볕은 따갑고, 선득 찬 기운마저 달려듭니다. 가을이구나, 알아챔과 동시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제부터 읽어 오늘 아침에 마친 <작별>의 여운이 진해서일 겁니다. 그러나 내심 부정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작별>에 편승한 저의 작별 때문입니다. 그러잖아도 가을을 타는 제가 자칫 가을 속으로 사라질 판입니다.
 
책 20쪽에 실린 크리스틴과 로물루스(위) & 로물루스(아래)
 책 20쪽에 실린 크리스틴과 로물루스(위) & 로물루스(아래)
ⓒ 김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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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은 아들 레이먼드가 아버지 로물루스를 회고한 평전입니다. 아들이 평전 작가인 경우는 제게 처음입니다. 1950년에 호주(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한 자칭 루마니아계 독일인 로물루스의 생애는 파란만장합니다. 그걸 철학적으로 드라마틱하게 해석한 레이먼드의 시선이 다른 회고록이나 평전에서는 마주하기 힘든 따뜻함을 일굽니다. 물론 그 젖줄은 로물루스의 "특성"(성품)입니다.
 
"성품-그들은 둘째 음절을 강조하면서 '캐릭터'character 대신 '카락터'karacter라고 발음하곤 했다-은 아버지와 호라 아저씨가 중요하게 여긴 도덕 개념이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을 훌륭하다고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안정된 기질을 나타냈다. (...중략...) 정직, 성실, 용기, 관용(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태도) 그리고 힘든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은 그 당시 내가 알았던 사람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덕목이었다.

그들은 말과 행동에서 개성에 대한 의심을 나타냈는데, 개성은 깊이가 없고 변하기 쉬운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청교도적인 신념을 나타내긴 했지만, 그 엄격한 성향은 성품과 동일한 집단에 속한 한 개념에 의해 완화되었다. 그 개념은 특성 a character이라는 것으로서 (같은 뿌리를 가진) 성품character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한결같고 심오한 어떤 것을 말한다."(110쪽)
 
언젠가 형은 사람의 성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형의 성품은 좋거나 나쁜 인품을 염두에 둔 가능태입니다. 그러나 레이먼드의 성품은 변화 차원이 아니라 유무 차원입니다. 그래서 툭하면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면서"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있는 어머니 크리스틴은 "성품이 없는 여자"입니다. 있는 성품을 따른 데서 상심과 고통을 얻는 로물루스가 이젠 사라진 인간 유형으로 부각된 게 <작별>의 남다름입니다.

호라 아저씨의 동생 미트루와 아내의 불륜을 알고도 보여준 관용, 즉 "동정적 숙명론"에 대해 저는 많이 놀랐습니다. 그건 형이 옹호한 복혼제(複婚制, polygamy)류의 문화 충격이어서가 아닙니다. 불가항력적인 욕망에 휘둘리는 실존적 상황에 처한 두 인간을 연민하는 인식 지평이, 석사 학위가 둘이어서 그보다는 제도교육 경험이 아주 풍부한 제가 여전히 맹탕 인간임을 깨닫게 하니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어머니와 불륜 관계를 가졌다고 그를 탓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관계는 어머니의 탓이라 여겼고(어머니가 주요 원인이라고 본 의미에서), 어머니의 방탕한 기질이 표출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미트루 아저씨가 그 자신도 통제할 수 없으며 고통을 주고 압도해버리는 무언가에 빠져버렸다고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했다."(91쪽)
 
레이먼드도 미트루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잘 지냅니다. 미트루 외에도 자꾸 확충되는 가족의 범주가 제 눈을 크게 만듭니다. 특히 아버지의 성품과 동궤라 할 호라 아저씨는 레이먼드의 인생에 헤드라이트 같은 정신적 아버지입니다. 비행 성향이 강해지던 십대의 레이먼드가 지금의 인문학부 교수가 되게 한 공로자입니다. 그런 관계의 시너지효과가 틱낫한 스님이 강조하는 '어울려 존재함'일 겁니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은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다행히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훌륭한 노동자란 어떤 사람인지, 정직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우정이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아버지에게서, 아버지의 친구인 호라 아저씨에게서 그리고 그들의 우정에서 보았던 것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84쪽)
 
아버지가 장년기에 아내로 맞이한 개방적이고 너른 품새의 밀카 아주머니, 그리고 황폐한 프리그모어의 삶에 기쁨을 더해준 네 마리 동물도 레이먼드의 '다문화주의'를 있게 한 '어울려 존재함'입니다. 더불어 삶을 꾸준히 실행하는 형도 불특정 다수에게 '어울려 존재함'의 고리일 겁니다. 때론 너무 바쁘게 움직이느라 평온한 현재의 순간들을 놓치는 듯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관점에서 제 고개를 갸우뚱대게 합니다만.

어쨌거나 아버지 로물루스의 가을은 '정신 이상'과 함께합니다. 그의 극단적인 순수함을 악용하는 현실에 크게 부딪친 충격의 여파입니다. 그러나 로물루스는 "정신병보다 더 나쁜 병은 없다"고 말할 만큼은 정신을 부여잡습니다. 그래서 소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형용하기 힘든 고초를 겪고도 정신 이상자가 되기는커녕 여전히 사회 운동에 동참하는 형이 뿌리 깊은 '순수한 도덕주의자'로 다가옵니다.

형! 저는 레이먼드가 간파한 아래 인용 속 호라 아저씨에게 공감합니다. 발화, 통화, 그리고 대화는 각기 의미가 다르기에 그렇습니다. 어울려 존재함에 소통하는 대화의 즐거움은 필수입니다. 그건 일상적 연계가 깨진 관계에서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제가 요즘 행한 작별은 그런 유지불가의 관계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SNS에 쌓인 친구들을 떨어내는 클릭을 꼭 해야 하는지 자문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조차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은, 대화 상대가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고 온당하게 반응할 거라고 믿을 만한지를 알 수 있느냐의 여부에 좌우되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대화의 즐거움에서 본질적이었다."(167쪽)
 
결론적으로 <작별>은 아버지 로물루스와 그와 어울렸던 존재들을 기리는 아들 레이먼드의 긴 추도사입니다. 그 유의미한 먹먹함에 안겨 저도 형에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점점 더 낡은 집이 되어가는 거울 속 제 모습을 향해서도 웃어봅니다. 이 가을앓이가 딴딴한 겨울채비가 되기를 바라면서. 형! 가을걷이철입니다. 두루 풍성한 결실을 맞이하시길 소망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newcritic21/24)에도 실립니다.


작별 - 로물루스, 나의 아버지

레이먼드 게이타 (지은이), 변진경 (옮긴이), 돌베개(2019)


태그:#작별, #로물루스, 나의 아버지, #레이먼드 게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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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종류의 책과 영화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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