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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기사] 9월 1일 관동대지진, 목숨 걸고 조선인 보호한 일본 경찰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흉흉한 괴소문이 돌고, 조선인 대학살이 자행되던 일본. 그중 가장 잔인했던 가나가와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조선인을 보호한 오카와 쓰네키치 경찰서장(大川常吉署長, 1877-1940). 그의 인도적인 대처는 오늘날, 한일 교류에 어떠한 메시지를 선사하고 있을까?
    
관동대지진 당시의 유언비어방지 전단지 전단지에는 굵은 글씨로 첫 줄에 <ありもせぬ事を言觸らすと、處罰されます>(있지도 않은 일을 퍼트리면, 처벌하겠습니다.) 라고 적혀있다.
1920년대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은 약 8만명이었다.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죽은 사람이 6천 여명으로 알려져 있으니, 15명 중 1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 속에서도, 오카와 쓰네키치 경찰서장처럼 조선인을 보호한 민간인과 경찰관도 있었음을 알린다.
▲ 관동대지진 당시의 유언비어방지 전단지 전단지에는 굵은 글씨로 첫 줄에 <ありもせぬ事を言觸らすと、處罰されます>(있지도 않은 일을 퍼트리면, 처벌하겠습니다.) 라고 적혀있다. 1920년대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은 약 8만명이었다.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죽은 사람이 6천 여명으로 알려져 있으니, 15명 중 1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 속에서도, 오카와 쓰네키치 경찰서장처럼 조선인을 보호한 민간인과 경찰관도 있었음을 알린다.
ⓒ 방재 시스템 연구소(防災システム?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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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관동 대지진은 6천여 명의 조선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의 역사를 만들었다. 아픔을 씻어낼 겨를도 없이 1938년에는 국가총동원법 공포로 인해, 일제에 노동력과 물자를 수탈당하는 억울한 나날이 이어진다. 심지어 1942년에는 강제징병도 실시돼 조선의 청년들이 일제의 무모한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1945년 해방의 기쁨도 반짝. 1950년 6월 25일 또다시 비극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렇게 한국 전쟁은 1953년 7월 27일까지 약 3년간 지속한다.

한국 전쟁의 아픔 속에서 관동대지진은 어느덧 30년 전의 사건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의 오카와 서장을 잊지 않고 1953년 3월 21일에 오카와 서장이 안치된 동점사(도젠지, 東漸寺)에 감사비를 세웠다. 정확히 말하면 조총련(일본에 거주하는 친북한계 재일동포 단체)에서 감사비(현창비, 顯彰碑)를 설립한다. 전쟁 중에 설립된 비석이어서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在日朝鮮統一民主戦線)'이라는 분단의 아픔도 함께 담겨있다.
 
오카와 쓰네키치 서장 감사비 .
▲ 오카와 쓰네키치 서장 감사비 .
ⓒ 김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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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大川常吉氏之碑 (고 오카와 쓰네키치씨 비석) / 국문번역:김보예
関東大震災当時流言蜚語により 激高した一部暴民が鶴見に住む朝鮮人を
관동 대지진 당시 유언비어에 의해 격앙된 일부 폭민이 쓰루미에 사는 조선인을

虐殺しようとする危機に際し 当時の鶴見警察署長 故大川常吉は
학살하려는 위기가 있었을 때, 당시의 쓰루미 경찰서장이었던 고(故) 오카와 쓰네요시는

死を賭してその非を強く戒め 三百余名の生命を救護した事は 誠に美徳である
죽음을 무릅쓰고 폭민에 강력히 대응하여 삼백여 명의 생명을 구한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미덕이로다.

故私たちはここに 故人の冥福を祈り その徳を永久に讚揚する
그런고로 우리는 이곳에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 공덕을 영원히 찬양하도다.

一九五三年三月二十一日 在日朝鮮統一民主戦線 鶴見委員会
1953년 3월 21일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 쓰루미위원회


서로의 마음이 모이는 곳

동점사는 쓰루미역(鶴見駅) 동쪽 출구(東口)에서 2.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쓰루미역에서 택시를 타면 7분 정도 걸리며, 요금은 800엔정도(2019년도 기준) 나온다. 쓰루미역은 전철(JR)로 도쿄역(東京駅, 직통)에서는30분, 요코하마역(横浜駅, 직통)에서는 10분 거리에 있다.
 
동점사(도젠지, 東漸寺) 입구 .
▲ 동점사(도젠지, 東漸寺) 입구 .
ⓒ 김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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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9월 1일이 되면 쓰루미구(鶴見区)의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은 동점사로 와서, 오카와 서장의 감사비 앞에 앉아 '관동대지진과 조선인대학살'에 대해 배운다. 그리고 오카와 서장의 일화를 통해 '인종·국적을 불문한 생명의 존엄성과 평등함'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9월 1일쯤에는 한국인도 찾아와 헌화를 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우린 그렇게 알게 모르게 마음을 모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도 진심으로 사과해 주세요

가나가와신문(神奈川新聞, 2013년 09월 28일)에 의하면, 1995년 12월 오카와 서장의 손자(大川豊, 오카와 유타카)가 서울에 있는 어느 병원 행사에 초대받아 내한한 적이 있다. 내한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유타카 씨는 200여명의 병원 스탭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このような歓迎にお礼の言葉もありません。しかし、祖父がしたことはそんなに褒められることなのでしょうか。当時、日本人が韓国朝鮮の方にあまりにひどいことをしたため、当たり前のことが美談になってしまった。だから私が日本人としてみなさんに申し上げる言葉は、これしかない。『ミアナムニダ』(ごめんなさい)

너무나 따뜻하고 뜨겁게 맞아주셔서 말을 잇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하신 일은 이토록 칭찬받을 만한 일인가요? 당시 일본인은 한국(남한)과 조선(북한)에 입에 담기 힘든 심한 짓을 자행하였기에, 당연한 행동이 미담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일본인으로서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 (국문번역 김보예)

우리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사과이지 않은가? 행사장은 큰 박수로 가득 찼다고 한다. 오카와의 서장의 업적을 기르는 일은 한국인의 몫이다. 시대의 비극에 사죄하는 것은 일본인의 몫이다. 유타카씨의 사과가 내 마음을 울린 것은 그가 원하는 역사가 아닌, 우리의 아픔이 서려 있는 역사를 봐주었기 때문이다.

오카와 서장은 고마우신 분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그의 업적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 또한 피해의 역사만을 강조하며 감사해야 할 분들을 외면한 세월이었다. 양국은 각자 바라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며 지금껏 온 것이 아닐까?

오카와 서장의 인도적인 대처는 오늘날, 한일 교류에 역사의 양면이 있음을 선사하고 있다. 또한 그의 손자 유타카 씨는 역사 속에서 서로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칼럼을 읽으면서 "우리보다 역사를 외면하고 단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일본이에요"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거다. 맞다. 나도 알고 있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대처해야 할까?

먼저, 우리가 일본에게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여 명확히 해나갈 필요가 있다. 우린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식 사과' 받기를 원한다. 강제징용 보상요구, 위안부 수요집회, 일본 불매운동 등,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우리의 굳은 의지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필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홍대 일본인 폭행'과 '상점 및 매장에 일본인 출입 금지 문구를 게재'하는 것과 같은, 개인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행동을 피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역사가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도구로 이용되길 바라지 않는다. '화합과 화해'의 도구로 사용되길 바란다. 냉철하면서도 온화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상대에게 나의 아픔을 전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우리가 역사를 통해 한층 품격있는 국민으로 성장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광양시민신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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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여행에서 1시간만 마음을 써 주세요” 일본의 유명 관광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우리의 아픈 역사가 깃든 장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정보 부족과 무관심으로 인해, 추도 받아야 할 장소에는 인적이 드물다는 현실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많은 분들이 역사에 관심을 가져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사(칼럼)를 연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