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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북산악연맹 비장애인 산악인과 추진복지재단 발달장애 청소년이 함께 걸으면서 만들어낸 땀내나는 이야기입니다. - 기자말

승무원 시험을 본 적 있다. 면접장소는 대구의 한 대학교 강의실이었다. 낯선 대학의 교정은 유난히 넓고 복잡했다. 높은 구두를 신었지만 조바심 때문에 걸을 수도 없었다.

뛰다시피 하며 길안내 표지판도 보고 몇 번을 물어서 겨우 교실을 찾아갔다. 입고 간 블라우스가 땀에 젖어서 후줄근해졌다. 옷도 말려야 하고 화장도 고쳐야 할 텐데 하면서 교실문을 열었다. 내 또래 여성 지원자들 200여 명이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경쟁자 수에 놀란 것도 있지만 똑같은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한 사람들이 한 공간에 앉아 있는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흰색 블라우스에 무릎 위까지 오는 검정색 치마, 머리는 승무원 올림머리.

나도 같은 차림이었다. 고운체로 걸러낸 듯한 모습. 얼굴까지 비슷해 보였다. 이 중에서 나를 드러낼 수 있을까? 아니 어떤 틀에 가장 들어맞아 보이는 게 필요할 것 같았다. 내가 아닌 승무원이라는 틀.

나는 떨어졌다. 한 학기 휴학을 하지 않았다면 붙었을까? 이번 입사기준은 2월 졸업 대상자 중에 뽑는다며 8월 졸업 예정인 나는 채용 기준에는 맞지 않는다는 말을 면접관에게 들었다.

그날 입었던 블라우스와 구두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떨어지길 잘했다. 지금은 등산화를 신고 있다. 험한 산길도 끄떡없는 등산화. '히말라야 희망 원정대' 5차 훈련은 지리산 뱀사골이다. 뱀사골탐방지원센터에서 화개재까지 갔다가 다시 뱀사골로 원점 회귀하는 코스. 18.4km로 만만치 않는 거리다.
 
 뱀사골 다리. 무더위를 산행으로 이겨냅니다!
 뱀사골 다리. 무더위를 산행으로 이겨냅니다!
ⓒ 김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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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등반대장(일명 현대장)은 지루한 계곡길을 걷는 대원들이 지치지 않게 치킨을 시켜주겠다며 전화로 주문하는 척을 했다. "요OO에 주문할까? 'OOO민족에 주문할까?" 동욱이에게 물어봤다.

지리산 산골에서 치킨 주문이라니, 가뜩이나 덥고 힘든데 동욱은 대답하는 에너지를 아꼈다. 현 대장은 전화기를 꺼내서 "아, 네... 12시 10분까지 간장소로 치킨 가져다 주시면 됩니다" 하고 통화를 (하는 척) 했다.

출발한 지 3시간 만에 드디어 간장소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자며 현 대장이 치킨 두 마리를 꺼내자 동욱이 입이 벌어졌다. "진짜 치킨이네" 하면서 싱글벙글했다. 나는 현 대장이 치킨 얘기를 꺼낼 때부터 도시락으로 치킨을 싸 왔나 보다 했는데, 동욱은 몰랐나 보다. 뭐든 미리 알아서 좋을 건 없다. 동욱이가 알려준 진리다.

이제 간장소에서 화개재까지 2.7km만 가면 된다. 밥 먹고 난 뒤라 몸도 무거운데, 계단이 많았다. 이번엔 조창신 원정 대장이 화개재에 도착하면 시원한 식혜를 주겠다며 공약을 걸었다. 이번엔 나도 입맛을 다셨다.
 
 김미경 대원과 짝꿍 임형규 대원
 김미경 대원과 짝꿍 임형규 대원
ⓒ 김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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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희 훈련대장, 고동욱 대원
 조현희 훈련대장, 고동욱 대원
ⓒ 김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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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먹는 치킨과 식혜 맛은 안 먹어 본 사람은 모른다. 산 다닌 지 겨우 3년이 된 나는 산과 삶은 같다며 개똥철학을 떠들고 다니는데 사실 이 맛에 산에 다니는 거다. 눈치 보며 식혜 두 잔을 마셨는데 엄청 득을 본 기분이다.

산행 거리의 1.5배로 걷는 사람이 있다. 원정 팀의 사진촬영을 맡은 김용우 작가(지도위원).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먼저 올라가서 고공샷을 찍는가 하면 쉴 때에도 대원들이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서 연신 셔터를 누른다.

그래서 살이 빠지셨나? 훈련 시작하고 부쩍 살이 빠진 모습이다. 살이 빠진 이유를 걱정스레 물어보자 김 작가는 당뇨약을 바꾸면서 살이 빠졌다고 했다. 그 약이 궁금해졌다.

작년에도 이번과 똑같은 코스로 훈련을 왔다고 했다. 동욱은 "에구구구, 나는 못 가. 죽어도 못 가"를 연발하며 버티기를 했다고 했다. 사탕 하나 주고 200미터 가기를 반복했다고, 인왕이까지 울었다고 하니 볼 만했을 것 같다. 185센티미터에 290사이즈의 신발을 신는 인왕이가 우는 모습, 상상이 안 가는데... 작년 뱀사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반환점 화개재(지리산)에서 인증샷
 반환점 화개재(지리산)에서 인증샷
ⓒ 김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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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이가 그 얘기를 몇 번을 꺼내며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했다. "작년에 여기서 점심을 먹고 이 바위에서 쉬었는데?" 하면서 기억을 더듬더니 "이 길 내려오면서 울었어요"라고 했다. 지금은 힘들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괜찮다며 웃는 인왕이다.

이런 비교는 필요하지 않을까. 지난 시간 속에 나와 오늘의 나를 비춰보고, 내일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 살아보지 않은 내일은 두렵고 불안하지만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나를 느낀다면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 아닐까.

인왕이가 작년의 어느 시간을 더듬는 사이, 나는 면접장에 앉아있던 그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른 지원자들을 흘끔거리며 비교하기를 거듭하던 나에서 지금은 얼마나 걸어 나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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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좋아하다가 <연하산방>팟캐스트를 하게 되었고, 책을 좋아하다가 글이 쓰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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