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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통설, 인쇄업은 정말 사양산업일까? 

지난 9일, '보진재'가 100년 가업인 인쇄업을 접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0년간 거듭된 적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쇄업을 접는다는 보진재의 사례는 '인쇄는 사양산업'이라는 통설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인현동 인쇄 단지의 모습. 흔히 ‘충무로 인쇄 단지’라 일컫는 곳이다. 도심의 고층 빌딩 사이에 분지처럼 자리잡은 이곳은 쇠락한 겉모습처럼 ‘사양산업’이라는 낙인이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다. 또한 이곳은 현재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 충무로 인쇄골목 인현동 인쇄 단지의 모습. 흔히 ‘충무로 인쇄 단지’라 일컫는 곳이다. 도심의 고층 빌딩 사이에 분지처럼 자리잡은 이곳은 쇠락한 겉모습처럼 ‘사양산업’이라는 낙인이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다. 또한 이곳은 현재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 최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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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인쇄업은 사양산업일까? 인쇄인들에게 물었다. 경력이 20년 이상인 인쇄인들은 인쇄가 사양산업이라는 데에 대체로 동의했다. 30년 경력을 훌쩍 넘긴 인쇄인은 인쇄업의 정점을 88올림픽으로 꼽았고, 그보다 10년 늦게 들어온 이는 97년 IMF 이후 줄곧 내리막이라 했다. 대부분 자기 경험 안에서 인쇄업은 늘 사양산업 소리를 들었던 셈이다.

다른 목소리는 젊은 인쇄인들에게서 나왔다. 인현동에 들어선 지 17년 동안 호황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한 40대 인쇄인은, 그럼에도 인쇄가 사양산업이냐는 질문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전단지로 대표되는 기존 홍보물 시장은 크게 줄었지만 다른 분야는 꾸준히 성장 중이라는 얘기다.

이는 종이를 공급하는 지류 회사 종사자의 얘기와도 일치한다. 패키징 분야는 가파르게 성장 중이고, 친환경 이슈로 다시 종이 가공품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엔 K-POP 붐을 타고 성장하는 굿즈 시장의 인쇄 수요도 눈여겨보고 있다고 한다. 

생존을 위한 진화는 시작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견해는 엇갈리지만 충무로의 소공인들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생존에 필요한 진화를 거듭해, 변하는 환경에 나름 적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는 나날이 발전하고 다양해지는 공존과 공생의 기술이다. 

단가 경쟁에 가장 취약한 인쇄와 후가공 업체들은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공간을 공유해 왔다. 인쇄기를 가진 임차인이 자투리 공간에 재단기를 가진 소공인을 들이고, 임대료를 나누는 식이다. 현장에서 '모찌꼬미'라 부르는 이런 형태는 일종의 지입제다. 임대료를 아끼려는 욕구에서 출발하지만, 그 결과 설비와 공간 등 생산 자본을 공유하고 생산 및 물류비용을 크게 줄이는 등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공유 공장'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충무로의 공유 공장은 인쇄 공정뿐만 아니라 기획이나 디자인과 인쇄 공정 간의 다양한 조합으로 확장되고 있다. 벌써 디자인과 인쇄의 조합은 옛말이 되었다. 디자이너가 인쇄 장비를 갖추고 예술과 문화를 접목한 콘텐츠 상품을 기획, 생산, 전시, 판매하기도 하고, 반대로 인쇄인이 디자인실과 공방을 꾸리기도 한다. 아직은 숍과 공방이 직접 매출로 이어지는 비중은 적지만, 이를 통해 잠재 고객을 발굴하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다고 한다. 
 
디자인을 기반으로 인쇄를 겸하면서 각종 콘텐츠를 기획, 전시, 판매하고 있다. 전형적인 주문생산업에서 나아가 새 시장, 새 소비자를 적극 찾아 나선 셈이다.
▲ 충무로 소재 인쇄 업체 코우너스 디자인을 기반으로 인쇄를 겸하면서 각종 콘텐츠를 기획, 전시, 판매하고 있다. 전형적인 주문생산업에서 나아가 새 시장, 새 소비자를 적극 찾아 나선 셈이다.
ⓒ 최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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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 공생은 충무로 인쇄인들의 DNA

더 나아가 이들은 네트워크를 구성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도 한다. 충무로에서 10년째 인쇄소와 공방을 운영하는 A씨는 을지로의 액자 가게, 디자이너와 연계하여 '기사 액자'라는 틈새시장을 만들어냈다. 이는 충무로 인쇄업의 특성이기도 하다. 다양한 재료상들을 보유한 을지로, 디자이너와 후가공 업체가 풍부한 충무로의 조합은 늘 이런 새로운 인쇄 상품을 기획해 왔다. 기존의 을지로와 충무로의 제조업 DNA에 최근엔 디자이너와 예술인들이 가세하면서 좀 더 세련된 기획들이 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인쇄인들 내부에서 기술 환경 변화를 주도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디자인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체적으로 교육 과정을 운영 중인 업체도 있고, 인쇄 소공인들이 모여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는 모임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인쇄인들은 서로 자신의 분야를 소개하고, 선도 사례를 나누기 위해 조직한 학습 네트워크 ‘인쇄인 스터디 포럼’을 진행 중이다. 8월에는 을지로의 메이커 기술인을 초대하여 인터랙티브 팝업 북을 소개했다. (블로그 인현동 뭐해?에서 갈무리)
▲ 인쇄인 스터디 포럼 지난 3월부터 인쇄인들은 서로 자신의 분야를 소개하고, 선도 사례를 나누기 위해 조직한 학습 네트워크 ‘인쇄인 스터디 포럼’을 진행 중이다. 8월에는 을지로의 메이커 기술인을 초대하여 인터랙티브 팝업 북을 소개했다. (블로그 인현동 뭐해?에서 갈무리)
ⓒ 박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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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쇄가 사양산업이냐는 질문은 인쇄인들에게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충무로 인쇄인들에게 기술과 시장의 이러한 변화는 인쇄업의 상수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생존의 조건임을 인지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늘 위기 속에 요동쳐 왔으면서도 아직도 5500개 인쇄업체와 1만5000명 인쇄인이 충무로를 지키고 있는 이유다.  

인쇄가 사양산업이냐고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

그럼에도 인쇄가 사양산업이냐는 질문은 거듭된다. 이런 질문은 대체로 인쇄업 밖에서 제기된다. 특히 재개발을 추진하려는 측과 이곳 산업을 보전하려는 측 사이에서 불거진다. 그러나 어느 지역에 자생한 산업 단지를 보전하기 위해 그 산업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은 불합리하다. 산업 가치 이전에 그곳을 일터로 삼고 있는 이들의 생존권의 문제이기도 하고, 질문 자체가 이 산업에서 무언가 도태시켜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도태(陶汰)'의 한자는 각각 사금을 얻기 위해 흙탕물을 이는 모습과 쌀을 이는 모습을 뜻한다고 한다. 도태는 체제의 위아래를 뒤바꾸는 물결의 역동을 전제로 한다. 물결을 일으킨 이는 특정한 대상을 도태시킬 의도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가벼운 것들을 흘려보내 사금을 남기려 하고, 누군가는 무거운 돌을 가라앉혀 쌀을 구별하려 한다.

앞서 보았듯이 충무로 인쇄인들은 기술과 시장의 변화가 일으킨 풍랑엔 진화를 거듭하면서 생존하고 있다. 그러나 재개발로 일어난 풍랑은 그 모든 진화의 수고를 쓸어버릴 것이다. 

인쇄업의 가치를 묻기 전에 리스펙트! 

당연히 충무로 인쇄업이 사양산업이냐는 질문에 몇몇 인쇄인은 예민했다. 대학 때 디자인과 편집 일로 드나들기 시작해 지천명에 이른 어느 인쇄인은 인쇄가 사양산업이냐는 질문에도, 인쇄업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도, 이곳을 활성화하기 위한 대안에도 간단히 대답했다. '리스펙트(Respect!)' 이곳의 침체나 활성화 방안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이곳 인쇄인들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문제의 핵심을 꼬집는 답변이었다. 

창조인쇄, 창의문화인쇄, 인쇄혁신… 이곳 인쇄업에 대한 수사는 계속 변해왔지만 정작 정부나 지자체에서는 이곳 인쇄업을 방관하거나 고사시키기로 일관해왔다고 한다. 인쇄 공장의 환경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개선안 대신 단속을 나왔다. 아직도 재래식 화장실이나 남녀 공용 화장실이 많아 여성 인쇄인 중에는 방광염에 시달리는 이도 꽤 된다고 한다. 

길기원배 바둑대회요? 단속만 하지 말아 주세요

인터뷰를 마치고 비가 오는 명보극장 건너편에 갔다. 맑은 날이면 이동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바둑을 두는, '길기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트럭 기사님 한 분이 우산을 쓰고 젖은 의자에 앉아 함께 바둑을 둘 상대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런 저런 얘기끝에 물었다. 길기원배 바둑대회를 열면 어떨까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더 부연하지는 않았지만 내쫓지만 말아 달라는 이야기가 덧붙었을 것이다. 민원이 이어져 책상과 의자를 갖다 놓으면 구청에서 가져간다고 한다. 바둑알 장기알도 이전엔 길에 놓았지만, 이제는 설렁탕집에 맡겨놓았단다. 

혈류처럼 인현동의 골목을 누비며 숨통을 틔우는 분들이지만 이분들이 편하게 대기할 장소 하나가 없다. 생산의 제일 아랫단을 차지한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 이분들에 대한 예의부터 갖추는 것이 어느 디자이너가 말한 리스펙트의 첫걸음이 아닐까.

다시 묻는다, 도태가 아닌 공존을 위해서
 
9월 9일 명보극장에서 대각선 방향에 있는 이동 노동자들의 쉼터엔 충무로에 들어서는 주상복합 건물 현수막과 전단지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 9월 9일 길기원 9월 9일 명보극장에서 대각선 방향에 있는 이동 노동자들의 쉼터엔 충무로에 들어서는 주상복합 건물 현수막과 전단지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 최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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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간 9일 다시 길기원을 찾았다. 평소 이동 노동자들이 바둑을 두던 자리에는 충무로에 들어서는 주상복합을 분양한다는 전단지가 놓였고, 그 옆에 현수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진짜 이곳을 휩쓸 태풍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이, 이날 보진재가 인쇄를 접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쇄업은 사양산업인가?' 이번에는 인쇄인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오는 19일 저녁 7시 소통방에선 이곳 인쇄인들이 모여 이 문제에 대한 난상토론을 갖기로 했다. 이제까지 반복된 질문이지만 질문자가 바뀌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의미는 크다. 도태시킬 누군가를 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껏 인쇄인들이 성취해 왔듯이 공존과 상생을 위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인쇄인 스스로 조직한 학습 네트워크 인쇄인 스터디 포럼에서는 오는 19일 젊은 인쇄인들이 모여 같은 주제를 두고 토론을 벌이기로 했다. 오래도록 반복된 질문이지만 공존과 상생을 위한 질문이기에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 인쇄가 사양산업이라고 생각하세요?  인쇄인 스스로 조직한 학습 네트워크 인쇄인 스터디 포럼에서는 오는 19일 젊은 인쇄인들이 모여 같은 주제를 두고 토론을 벌이기로 했다. 오래도록 반복된 질문이지만 공존과 상생을 위한 질문이기에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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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다시세운프로젝트, ##충무로 인쇄골목, ##인쇄인 스터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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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네트워크(사) 대표. 문화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 지역 현장에 들어가 지역 이름을 걸고 시민대학을 만드는 'OO(땡땡)은대학' 프로그램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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