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7년여간 루게릭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신정금씨가 삶의 의욕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쓴 에세이입니다. 신정금씨는 온몸이 굳은 상태로 안구마우스를 이용해 눈을 움직여 글을 씁니다. 하루 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단 한 명에게라도 작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편집자말]
순해진 아침 햇살과 거실 창 밖으로 보이는 산밤나무의 제법 굵어진 밤송이에서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명절은 즐겁기만한 기다림이었다. 맛있는 음식들이 풍성하고 도시에 사는 사촌들을 오랜만에 만나고 게다가 친척들이 주는 두둑한 용돈은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종가의 종부였던 엄마의 고단함을 느끼기엔 철이 너무 없었다. 엄마의 고단함이 느껴질 즈음엔 나도 엄마처럼 종가의 종부가 되었다. 옛날과는 모든 면에서 편리해졌고 간소화 됐지만 결혼을 하고 명절을 맞이하고서야 비로소 엄마의 수고가 가슴에 와닿았다.

도시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의 진열대에서부터 명절이 다가옴을 느낀다. 진열대엔 갖가지 특산물과 제철과일, 생필품 선물세트까지 형편과 용도에 맞춰 선택할 수 있는 갖가지 제품들이 고운 단장을 하고 소비자를 유혹한다.

올 추석은 시기가 빨라 TV속 선물세트도 달라진 모습이다. 때이른 가을 과일 대신 복숭아 같은 여름 과일도 보이고 정육 코너엔 오래 조리해야 하는 갈비세트보다 구이용 냉장육이 더 많이 진열된 것 같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처지와는 달리 명절이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은 명절 준비로 분주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처지와는 달리 명절이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은 명절 준비로 분주해졌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건강할 때에는 명절을 앞두고 마음부터 바빠지고 부담스러워 흔히 말하는 명절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교통 체증도 스트레스에 한몫했다. 지금은 도로 사정과 여건이 좋아져 심하진 않지만 이십여 년 전엔 수도권에서 전라도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 적도 있었다.

잠을 설치며 가서도 음식을 만들어야 하고 차례상과 대식구 밥상, 술상을 차렸다 치우기를 반복하고 돌아오면 명절을 맞은 즐거움보다는 힘겨운 과제 하나 해낸 느낌이 들곤 했다.

투병 후 달라진 명절, 쓸쓸하고 힘겨운 날이었지만
  
7년여간 루게릭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건강했다면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대신해 모든 집안 대소사를 관장했겠지만 루게릭병은 나를 모든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없는 한정치산자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나는 중증장애인이라는 또다른 처지에서 명절을 맞이하고 있다. 막상 이 처지가 되고 보니 명절은 보통 때보다 더욱더 쓸쓸하고 힘겨운 날이었다. 당장 간병인 없이 가족들만의 도움에 의지하며 지내야 하고 무엇보다 아이들과 남편의 초라한 식탁 풍경이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언제부터인지 명절 연휴엔 명절 풍경이 나오는 TV를 거의 시청하지 않게 되었다. 귀성 행렬, 시장 풍경, 명절 음식들,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나들이객들과 연휴 해외여행객으로 붐비는 공항, 하다못해 명절 스트레스 소식까지 모든 것이 내겐 부러움이고 사치였다.
 
 추석 당일엔 고궁이나 민속촌에 가 사람들 틈에서 명절 분위기에도 취해봐야겠다.
 추석 당일엔 고궁이나 민속촌에 가 사람들 틈에서 명절 분위기에도 취해봐야겠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어느 것 하나 내가 누리고 함께할 수 없다는 게 더욱 쓸쓸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처지와는 달리 명절이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은 명절 준비로 분주해졌다. 습관적으로 음식 메뉴를 정하고 장을 봐서 음식을 만들고 차례상을 차렸다. 분주한 머릿속과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남편과 아이들이 함께해도 명절이 이렇게 쓸쓸한데 나보다 더 외로운 처지의 취약계층의 사람들은 얼마나 쓸쓸할까? 귀성객들 행렬을 보는 실향민의 마음은 어땠을까? 독거노인들이나 고아 등 명절이 더 외로운 취약계층 사람들의 쓸쓸함이 안타깝게 가슴에 와 닿았다.

요즘은 여러 이유로 홀로 명절을 보내는 이들이 늘고 명절 맞이 풍습도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나는 올해부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기로 하고 실천중이다. 올 추석 역시 적극적으로 즐겨볼 생각이다. 남편과 함께 장을 봐서 엄마가 보내주신 음식에 부족한 것을 채워 식탁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야겠다.

추석 당일엔 고궁이나 민속촌에 가 사람들 틈에서 명절 분위기에도 취해봐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니 올 추석이 기다려진다. 심신이 지쳐있는 모든 이들에게 한가위의 크고 밝은 보름달처럼 풍성하고 넉넉한 추석이 되기를 기도한다.

주여,
제 삶 안에서 지난 폭염같은 고통은 잊게 해주시고
다만 고된 시련 후에 얻는 여유와 감사함은
간직하게 해주소서
영글어가는 산밤나무의 알밤이 되어
어느 겨울 배고픈 청설모의 넉넉한 한끼가 되게 해주시고
무심히 걷다 만나는 어느 등산객의  가벼운 미소가 되게 해주소서
더 욕심을 낸다면 주여, 아주 가끔은 오래된 낙엽 속에 묻혀
어느 봄날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영광도 누리게 해 주소서

댓글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