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트북> 스틸컷

영화 <노트북> 스틸컷 ⓒ 글뫼


멜로드라마는 대체로 첫사랑,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 불치병, 신분 차이 등등으로 시작해서 쟁쟁한 경쟁자를 만나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다가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마침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다른 장르라면 몰라도 멜로드라마가 해피엔딩이 아니면 관객은 상당히 '언해피' 해지기 때문이다.
 
요즘 드라마 작법을 배우는 나는 이 법칙에서 벗어나는 애정극을 써볼까 하며 불철주야 드라마 모드로 살고 있다. 머리가 맑은 날에는 드라마를 쓰고 머리가 멍한 날에는 드라마를 본다. 그도 저도 지치는 날에는 아이디어를 얻어볼까 하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본다.
 
식탁에 앉아 젤 먼저 나의 절친인 오빠에게 전화했다. 비혼인 오빠는 "나를 주인공으로 두 여자가 한꺼번에 나를 좋아하는 드라마 좀 써줘. 내 평생소원이 삼각관계에 한 번 빠져보는 건데 이생에서는 틀렸으니 드라마라도 좀 써봐"(내 마음의 말 : 오빠, 삼각에 앞서 이각이라도 먼저 어떻게 해보는 게 어떨까요?). 애처로운 마음에 오빠를 어떤 사람으로 설정할지를 물어보면, 그런 거 필요 없고 그냥 여자들이 보기만 하면 반하는 캐릭터로 만들어 달란다. 대체 그런 캐릭터가 있기나 해? 마성의 카사노바 캐릭터, 일단 접수.
 
밥을 먹으며 통화 내용을 들은 아들은 통화가 끝나자 "엄마가 쓰는 주제는 일단 대중적이지가 않아. 사람들은 예술 영화 안 좋아해"라고 한다. 이노무시키, 키워놨더니 뭘 안다고 훈계다. 나는 또 깨달았다. 묻지 않을 때는 충고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걸. 나는 사춘기 아이가 엄마에게 대들 듯이 툭 쏘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 말하고 보니 이거 뭔가 찜찜하다. 또 참견을 들을까 봐 슬그머니 내 방으로 들어왔다.
 
친구에게 전화했다. 친구는 내게 다짜고짜 일단 드라마 속에서 결혼 제도를 바꾸라고 한다. 모든 결혼이 3년 만기로 끝나는 설정을 하고, 계속 살고 싶은 사람은 세금을 3000만 원쯤 내야 하는 이야기. 그래서 더 살고 싶어도 돈 때문에 할 수 없이(?)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이야기를 써달라고 한다. 이거 뭔가 냄새가 난다. 아니, 그런 사사로운 감정 말고 좀 그럴싸한 이야기 없냐고 묻는 내게 꽥 소리를 지른다. "지금 당장 그것이 시급하다고!" 드라마가 앞서가야 제도가 따라갈 것 아니냐며 나더러 작가정신이 없다고 난리다. 이건 뭐 현장에서 민원을 접수하는 공무원도 아니고.
 
부모의 반대로 헤어지는 이야기... 왜 진부하지 않지?
 
 영화 <노트북> 스틸컷

영화 <노트북> 스틸컷 ⓒ 글뫼


주변에서 아이디어 얻기를 실패한 나는 인터넷으로 돌아왔다. 영화 사이트에서 이런저런 영화를 검색하다가 영화 <노트북>을 발견했다. 2004년 개봉하고 2016년에 재개봉했던 그 영화. 나는 이 영화를 4번 봤다. 스토리는 뻔한데 볼 때마다 자꾸 빠져든다. 라이언 고슬링의 매력적인 눈빛과 레이첼 맥아담스의 사랑스러운 미소, 결정적으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나온다. 쇼팽의 프렐류드 4번. 이 곡이 나올 때마다 나는 번번이 무너진다. 쇼팽씨는 어쩌자고 이런 곡을 만들었을까.
 
<노트북>은 첫 문단에 쓴 '애정극의 정석'을 거의 충족시키는 전형적인 영화다. 뻔한 이야기를 어떻게 뻔하지 않게 표현했는지 이번에는 관객 입장이 아닌, 작가의 입장으로 다시 들여다볼까 한다.
 
이 영화는 노아(라이언 고슬링)와 앨리(레이첼 맥아담스)의 사랑 이야기다. 로맨스 소설의 대가인 니콜라스 스파크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그의 장인, 장모의 실제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물론 각색이 되었지만.
 
노을이 진한 아름다운 호수에 나룻배 한 척이 떠다닌다. 그 나룻배는 새들과 함께 하얀 집을 향해 들어오고 그 장면 위로 "나는 특별하지 않고 그냥 보통사람이다. 내 이름은 곧 잊히겠지만, (중략) 난 온 마음과 영혼으로 한 여인을 사랑했고 그것만으로 여한 없다"라는 할아버지의 내레이션이 있다. 그리고 그는 어느 할머니에게 가서 책을 읽어주며 영화는 시작된다.
 
노아는 친구와 놀러 간 카니발에서 앨리를 보자마자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듯 사랑에 빠졌다. 환하게 웃는 앨리의 모습을 보는 노아. 이 순간 매초가 나노 단위로 잘리며 시간이 정지한 듯 느리게 흘러간다. 앨리에게 다가가는 노아. 그런데 막무가내로 데이트 신청하는 장면은 불편하고 위험하다. 놀이기구 관람차에 매달려 데이트 안 받아주면 뛰어내리겠다고 떼를 쓰는데, 자해공갈단도 아니고 놀이기구에서 저런 장면은 자제하기.
 
첫 데이트, 둘이 춤을 추는 장면에서 빌리 홀리데이의 I`ll be seeing you가 흘러나온다. 이 노래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음악으로, 장면으로, 대사로 변주되며 영화 전반에 흐르고 있다. 둘은 폭풍처럼 서로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앨리는 부잣집 딸, 노아는 목재소에서 일하는 노동자, 결국 앨리 부모님의 반대로 둘은 헤어진다. 이런 건 전형적인 이야기. 하지만 음악과 영상과 주인공들의 연기력 때문인지 진부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런 부분은 배우들의 연기력에 의존해야겠다.
 
명절 끝, 화가 났다가 즐거웠다가 한다면
 
 영화 <노트북> 스틸컷

영화 <노트북> 스틸컷 ⓒ 글뫼


7년의 세월이 흐르고 약혼자가 있는 앨리는 우연히 노아의 소식을 접하고 홀리듯 그를 만나러 간다. 예상대로 둘은 자식들을 낳고 잘 살았다. 영화의 반전은 노트를 읽어주는 할아버지가 노아이고 이야기를 듣는 할머니가 앨리다. 앨리는 치매로 인해 기억상실이 왔고 둘의 사랑을 기록한 노트를 매일 노아가 읽어준 거다. 잠시 앨리가 기억이 돌아왔을 때 둘은 I`ll be seeing you에 맞춰 다시 춤을 추고, 두 사람이 나란히 한 침대에 누워, 세상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할 때 노아는 앨리에게 I`ll be seeing you라고 말한다.
 
첫사랑, 불치병, (치매로 인한) 기억상실, 신분 차이, 부모님의 반대, 쟁쟁한 경쟁자 등 소재는 별다를 게 없는데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좋아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뭔가 신박한 소재를 찾는 것보다 일상적인 이야기지만 그 속에서도 감동을 끌어내는 게 핵심인데, 그러려면 깊숙이 들여다보고 디테일을 살려야 한다는 깨달음이 왔다. 처마 밑의 파랑새를 밖에서만 찾을 뻔했다.
 
결론적으로 <노트북>은 영혼을 정화하는 아름다운 영화다. 슬프고 우울하고 화나고 외로울 때 위로가 되는 영화. 명절 끝에는 심신이 미약해진다. 몸이 피곤하니 화도 났다가, 그래도 개중에 반가운 얼굴도 있으니 반짝 즐겁다가, 또 돈이 많이 나가니 통장은 가볍고 마음은 무겁다. 이럴 땐 이런 영화가 힐링이다. 이미 개봉한 지가 좀 됐으니 봤다 해도 다 잊어버렸을 터. 고생한 나를 위로해줄 이 영화를 다시 보며 열불이 나는 마음 온도를 낮춰보자.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노트북 컴퓨터가 아니에요 라라랜드도 함께 봐요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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