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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다가왔다. 이맘때면 책장에서 이억배 작가의 <솔이의 추석 이야기>를 꺼내 읽는다. 95년도에 나온 책이니까 출간된 지 14년 된 책이다. 출간 당시에도 95년도 추석을 반영한 게 아니라 그 전 세대의 추석을 그렸다고 했으니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된 옛날 추석 이야기다. 

20여 년 전 추석 이야기
 
 '솔이의 추석이야기' 겉표지
 "솔이의 추석이야기" 겉표지
ⓒ 길벗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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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겉표지를 넘기면 속표지에 솔이로 추정되는 아이와 엄마가 한복을 다리고 있다. 다음에 오는 첫 장면에 두 밤만 지나면 추석이라고 하는 걸 보니 추석 때 입을 옷인 듯하다. 

이발소, 치과, 세탁소, 슈퍼, 목욕탕 등 우리 동네 추석 전날 풍경이 그려진 첫 장면은 분주함이 가득하다.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보기 힘든 빨간 우체통, 파마한 뒤 머리에 비닐캡을 쓴 사람들, 명절 전날 붐비는 목욕탕, 동네 슈퍼에 가득한 과일과 선물상자 모습에서 명절 전 설렘이 느껴진다.

다시 책장을 넘기면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캄캄한 거리를 솔이네 가족이 걷고 있다. '추석 연휴'라고 써붙인 동네 슈퍼를 지나 솔이네 가족은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새벽같이 나왔는데도 기다란 줄 맨 끝이다.
 솔이네 가족은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새벽같이 나왔는데도 기다란 줄 맨 끝이다.
 솔이네 가족은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새벽같이 나왔는데도 기다란 줄 맨 끝이다.
ⓒ 길벗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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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기 위해 줄선 사람들의 복장, 선물이 든 종이가방에서도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다. 아기공룡 둘리 풍선도 보이고 '잘잘잘'에 나오는 모자 쓴 아저씨도 있다. 잠든 아이를 업고 안고 한 젊은 부부와 지팡이 짚고 두루마기 입은 할아버지, 책 보는 군인 아저씨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서 있다.

버스를 탔다. 그런데 도대체 차가 움직이질 않는다. 버스 전용차선이 없던 시절 서로 뒤엉킨 차들 때문에 꽉 막힌 도로에 간이 노점 식당이 열렸다. 사발면에 물을 부어 먹는 솔이, 도로에서 아이 소변을 해결하는 엄마, 오징어 파는 아저씨 등 지금은 볼 수 없는 명절 귀향길 풍경이다. 

드디어 시골에 도착한 솔이네 가족. 마을 입구 당산 나무 뒤로는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 온가족이 모인 솔이네 할머니 집에서는 부엌과 마당에서 음식을 만드느라 바쁘다.

차례를 지낼 때 남자와 아이들은 절을 하는 데 할머니랑 솔이 엄마는 방 밖에서 음식을 준비한다. 성묘도 가고 농악대도 나오고 신명난 놀이 강강술래로 추석이 마무리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솔이네 짐에 할머니가 챙겨주는 참기름이며 옥수수, 감, 호박이 얹어진다.

다시 가게 문이 닫힌 어두 컴컴한 길, 솔이와 동생은 각각 아빠와 엄마 등에서 잠이 들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솔이네 부모님은 집에 돌아와 시골에 전화를 한다.

명절 전 거리의 분위기부터 고향가는 길, 추석 준비와 추석 당일 풍경,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 시간 순서에 따라 추석 풍경을 담은 <솔이의 추석 이야기>는 따스한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그림책은 시대상을 반영한 좋은 책이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 속 명절 풍경이 못 마땅하니 책을 보고 난 뒷맛이 쓰다.

요즘의 명절 풍경은 어떤가. 예전에는 <솔이의 추석 이야기>에도 나오듯 명절을 맞아 때 빼고 광내기 위해 목욕탕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하고 새 옷도 사 입었다. 집에서 자주 씻을 수 있는 요즘은 명절 전날 목욕탕에 가기 보단 명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연휴 마지막 날 온 가족이 찜질방에 간다. 

한복도 세배를 해야 하는 설에 주로 입고 추석에는 어린 아이가 아니면 잘 입지 않는 편이다. 고향에 내려가느라 밀리는 고속도로 풍경은 여전하지만 도로 위 노점에서 사발면을 사먹는 대신 고속도로 휴게소 맛집을 찾아간다. 또 고속도로만 밀리는 게 아니라 공항도 붐빈다. 추석 연휴에 차례를 지내지 않고 가족 단위로 여행을 가는 모습이 추석 명절 풍경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림책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솔이 아빠가 들고 있던 파랑색 쇼핑백은 예전 수원에 있던 하이웨이 백화점 쇼핑백이다. 하이웨이 백화점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동수원 뉴코아가 있다. 요즘이라면 뽀로로 풍선일텐데 둘리 풍선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여러 가지가 변한 가운데 변하지 않은 장면이 있다. 추석 전날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과 차례를 지내는 장면이다. 과거와 현대를 관통하는, 시대를 뛰어넘는 명절 풍경이다.

<솔이의 추석 이야기>에서 마당 한 가운데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고 부엌 아궁이 앞에서 앞치마 두르고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들이다. 솔이네 아빠는 집 밖에서 동네 친구인지 어르신인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남녀 성별에 따라 역할이 명확히 나눠져 있는 명절 준비 모습이 이 장면에 잘 담겨 있다.

추석 당일 차례를 지내는 장면에서도 그렇다. 방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문 밖에서 음식을 썰고 나르는 할머니와 솔이 엄마가 나온다. 방 안에서는 잘 차려진 푸짐한 제사상에 남자와 어린 아이들이 절을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명절 풍경이다.

20여 년 후 추석 이야기, 변한 게 없다

나의 경우, 명절 때 시가에 도착한 첫 날은 마트에서 장을 본다. 둘째날인 명절 전 날에는 음식을 한다. 고모님 가족이 오면 온 가족이 다 모이는 단촐한 가족이라 음식을 조금 해서 일이 고되진 않다. 일이 힘들지 않다고 성별에 따라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는 구조까지 괜찮은 건 아니다.

어머님, 고모님, 내가 바닥에 신문지를 펼치고 음식 준비를 하면 아버님과 남편, 아이는 목욕탕에 간다. 내가 음식하는 동안 아이 돌보기는 남편 역할이라 작년부터 목욕탕에 간다. 누군가는 아이를 돌봐야 하니 합리적 분담 같지만, 남편이 음식하고 내가 아이 돌보는 걸로 역할을 바꿀 수는 없기에 이상한 분담이다. 

'다른 집처럼 명절 노동 스트레스가 없으니 좋지 않냐'는 남편은 어느 지점이 문제인지도 잘 모른다. 성별에 따라 기본값이 설정돼 있는 명절은 여자에게 즐거울 수 없다. 노동하는 강도에 개인차가 있을 뿐 남녀에 따라 역할이 나뉘어 있는 명절 노동 구조는 같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낼 때도 그렇다. 나는 이름도 모르고 일면식 조차 없는 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차린다. 남편은 자기 할아버지를 위해 전 하나 부치지 않고 절을 한다. 이 상황이 나는 부자연스러운데 남편은 의문을 품지 않는다.

"엄마, 여자들은 왜 절 안 해?"

뭣 모르고 절 하던 시기를 지나 아이가 명절 제사 때 한 이야기다. 고정관념이 없는 아이는 의문을 품는다. 남아에 장손인 동글이(별명)는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어른들이 제사상 앞에 앉혔다. 5살부터는 술을 따르게 했다. 제사상 앞에서 동글이에게도 역할이 주어졌다. 만약 동글이가 여아였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제사상 앞에서 절 하고 술 따르고 했을까? 21세기에 태어난 동글이가 경험하는 추석이 20세기 솔이와 같다는 게 답답할 따름이다.

그림책이 나온 95년도에 솔이가 때때옷을 입었으니 지금쯤이면 성인이 됐을 거고 만약 결혼을 했다면 어느 집 며느리가 됐을 거다. 아마 자기 엄마처럼 솔이도 부엌에서 음식하며 추석을 보내고 있겠지. 어른이 된 솔이가 들려주는 <다시 쓰는 솔이의 추석 이야기>를 상상해 본다. 세기를 뛰어 넘는 명절 남녀 역할 분담이 사라져야 명절 스트레스도 없어질텐데 다음 세기에는 가능할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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