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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시절 법학과를 졸업했다. 사법시험 합격수기를 보고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으며, 사법시험 공부하는 선배들이 일상생활이나 술자리에서 장난처럼 사용하던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무죄추정의 원칙"과 같은 단어들도 무작정 멋있어 보였다.

처음으로 접했던 전공과목이었던 '민법총칙' 교수님이 칠판에 한자로 마구 판서하시던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신입생 시절 리포트를 쓰기 위해 방청했던 어느 지방법원의 재판에 법복을 입고 등장했던 법관의 아우라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판사님 입장하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법대(法臺, 재판부가 앉는 자리)는 한없이 높아 보였으며, 법대로 걸어 들어오는 판사들의 모습은 너무나 커 보였다. 법을 조금 더 공부하고 재판정에서 방청객이 일어나는 이유가 법관 개인에 대한 인사가 아니라 사법부에 대한 존중과 존경의 의미와 더불어 재판 시작 전 분위기를 정돈하는 의미도 있다고 알게 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판사가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경외로운 존재로 인식돼 벌떡 일어났었다. 그만큼 법관은 법을 공부하는 나에게나 법 때문에 함께 방청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에게 일반인과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선출되지 않는 권력, 사법부

대한민국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로 나누어진 삼권분립국가이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 입법부의 국회의원과 달리 사법부를 구성하는 판사는 선출되지 않는다. 판사는 선거와 같은 다수결에 따른 결과와 관계없이 사법부의 구성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과 법률에 의해 법관의 양심에 따라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억울함이 없는 판단을 하라고 헌법에 명시했다.

삼권분립 기관 중 유일하게 선거와 같은 절차적 정당성이 없기에 법관들은 더욱 양심적이어야 하고 외부의 힘과 내부의 압박에 철저하게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선출되지 않는 사법부가 국민들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다. 헌법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헌법 제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법관은 그 헌법과 법률을 개별 사안에 적용해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직업이다. 헌법과 법률은 국민 누구나 검색할 수 있고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양심'이다. 대한민국에서 법관의 '양심'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법관의 '양심'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서울지방법원장을 지낸 이우근 변호사는 2010년 2월 8일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법관의 양심을 이렇게 정의했다.

"양심(conscience)은 공동체성을 나타내는 con(함께)과 이성을 뜻하는 scientia(앎)의 합성어다. 양심은 '사회 공동체의 이성적 윤리의식'이다. 그래서 양심은 실정법의 세계로 들어온다. 헌법은 모든 국민의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면서(제19조), 법관에게는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할 것을 요구한다(제103조).

두 조문의 양심은 의미가 같지 않다. 앞의 것은 개인의 기본권으로 주관적·인격적인 것이고 뒤의 것은 법관이 따라야 할 재판의 준거(準據)로서 객관적·규범적인 것이다. 법관의 양심은 법전에서 나오지 않는다. 양심은 인격이다. 사법시험 하나로 인격을 검증할 수는 없다."

법관의 양심은 한없이 무거워야 한다. 개인의 기본권인 양심과는 다르게 법관이 따라야 할 양심은 객관적이며 규범적인 것이며 인격이다. 객관적이고 규범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일반 국민이라면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기준이어야 한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헌법과 법률에 따라 기계적으로 판단하고 권력자와 조직 논리에 따라 '특별'하게 부여받은 사안에 대해서는 '양심'의 영역이 한없이 확장되는 판결은 더 이상 국민들이 신뢰하지 않는다.

사법농단의 진실을 추적한 <두 얼굴의 법원>

양승태 코트(대법원)의 사법농단을 파헤친 이 책은 2017년 2월 이탄희 판사의 사직서 제출부터 세 차례에 걸친 대법원의 진상 조사, 검찰 수사와 재판,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내막을 담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는 특정 재판에 관해 정부 관계자와 재판 진행을 논의하고 의견서 작성 등 자문을 해 주었다. 거기에 더해 일선 재판부에 연락해 특정한 내용과 방향의 판결을 요구하고 재판 절차 진행에 관해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양승태 대법원장의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대통령과 청와대와 거래를 시도했다. 이는 실제로 재판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법원행정처 문건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 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 추진 전략' 중 일부 (책 235쪽에서 첨부된 자료)
▲ 법원행정처 문건 법원행정처 문건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 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 추진 전략" 중 일부 (책 235쪽에서 첨부된 자료)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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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11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정치적, 경제적, 사화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법원은 국민을 헌법과 법률이 정한 기본권의 주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반 국민들은 대법관이 높은 보수와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만큼, 그 정도 업무는 과한 것이 아니며, 특히, '내 사건'은 대법원에서 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들임" (법원행정처 문건 '8.29.(금) 법무비서관실과의 회식 관련_2014.8.31 일부)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만 내려오시라

법원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재판 결과는 새로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국민들은 재판을 진행했던 판사의 이름을 검색해서 비판한다. 법원 스스로 "법원의 재판은 신성하다"라고 떠들어봐야 귀를 기울이는 국민은 별로 없다.

사법농단 사태를 통해 보았듯이 대학 신입생 시절 그렇게 우러러보았던 판사라는 사람도 사법부라는 회사의 조직원일 뿐이었다. 헌법과 법률에 의해서 양심에 따라 판단하기보다는 조직의 힘에 굴복하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에 손을 비비는 조직원일 뿐이었다. 그들만의 세상에 사는 착각을 하면서 하는 짓은 일반 회사원과 전혀 다를 바 없다면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만 내려와야 한다. 재판 결과는 신성하다고 말하면 뭐 하나? 일그러진 양심으로 재판하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아는데…

서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두 눈을 가리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뜨고 있다. 두 눈을 가린다는 의미는 공정한 재판을 의미한다. 법원 스스로 우리나라 법관들은 두 눈을 뜨고 있으니 공정한 재판은 기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재판정에서 검사나 변호인들은 판사를 부를 때 항상 습관적으로 붙이는 "존경하는 재판장님"과 국회의원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항상 습관적으로 붙이는 "존경하는 OOO 의원님"이라는 말에서 '존경'이라는 말은 이 책의 제목인 '두 얼굴을 가진'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두 얼굴의 법원> 권석천 지음.
▲ 권석천 지음 <두 얼굴의 법원> <두 얼굴의 법원> 권석천 지음.
ⓒ 조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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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두 얼굴의 법원 - 사법농단, 그 진실을 추적하다

권석천 (지은이), 창비(2019)


태그:#사법농단, #두얼굴의법원, #양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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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에 행복과 미소가 담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대구에 사는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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