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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선생
 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선생
ⓒ 은평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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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선생의 기념비가 서울 은평구 연신내 물빛공원에 세워졌다. 윤기섭 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서간도로 망명한 이래 해방으로 환국할 때까지 35년간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946년 귀국한 이후 불광동에 자리잡은 후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한국전쟁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납북돼 1959년 7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냉전시대에 납북되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윤기섭 선생은 뒤늦은 1989년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지난 8월 14일 열린 제막식에서 윤기섭 선생의 손자인 정철승 변호사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했다. 

통일을 못보고 가는 것이 한이다. 갈라진 조국을 후세에 물려주게 되어 죄가 크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가니 허망하다 남한에 있는 자식들이 보고 싶구나.
살아들 있는지 다시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수야 없지.
남 부끄럽지 않게 살다 죽었다는 것을 후세들에게 전해다오.
70 평생 모든 것을 나라의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바쳤건만.


정철승 변호사는 "할아버지가 납북된 후 어린 세 딸과 남게 된 할머니가 갖은 고생을 다하셨는데 뒤늦게라도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기뻐하셨다"고 전했다. 2018년 3월에는 육군사관학교장으로부터 명예졸업증서를 수여받기도 했다. 

'자진 닭 울니 붉은 해 쑥 솟는고나'는 윤기섭 선생이 독립을 맞이하면서 쓴 글귀다. 오랜 독립운동 끝에 독립을 맞이한 기쁜, 새로운 나라를 향한 기대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임시정부 요원들이 귀국을 앞두고 함께 쓴 글. '한글로 자진 닭 울니 붉은해 쑥 솟는고나'라고 쓴 윤기섭 선생의 글이 보인다.
 임시정부 요원들이 귀국을 앞두고 함께 쓴 글. "한글로 자진 닭 울니 붉은해 쑥 솟는고나"라고 쓴 윤기섭 선생의 글이 보인다.
ⓒ 박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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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섭 선생의 호 규운(虬雲)은 '낮게 가는 구름'이라는 뜻으로 '겸손'을 의미한다. 신흥무관학교를 책임지고 운영하고 임시정부의 혼란을 수습하고 해방 이후 임시정부 요원들이 떠난 자리에 남아 임시정부 가족들과 교민들을 귀국시키는 역할을 맡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듯이 선생은 앞에 나서서 두드러지기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을 살피고 일을 도모하는 삶을 살았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윤기섭 선생은 1887년 4월 4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부친 윤기영은 한말 유학자로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이런 가풍으로 어린 시절부터 문중에서 설립한 사숙에서 한학을 배울 수 있었고 서울 보성학교에 입학한 후 190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로 부임한 이후 교사로 재직하면서 신민회에 가입하게 된다. 이곳에서 교육자로 지낸 2년 동안의 경험은 이후 신흥무관학교 및 인성학교에서 교육 구국운동을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1911년 이희영, 이시영, 이동녕 등과 서간도로 망명하게 된다. 그곳에서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 설립에 참여하는데 경학사는 신민회 계열 민족운동세력이 최초로 공화적 민족주의에 입각해 결성한 독립운동단체로 서간도 독립운동의 효시였다. 윤기섭 선생은 경학사 산하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에 10년간 학감·교감·교장 등을 맡아 3천 5백 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후 서간도에서 상해로 이동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게 된다. 

임시정부를 만나다

그가 상해로 간 이유는 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되어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고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자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상해 도착 후 임시정부 인사를 만나게 되는데 이 때 만난 인사가 바로 안창호 선생이다. 때마침 지금의 국회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리고 있었고 윤기섭 선생은 서간도 의원으로 선출돼 의정원 의원이 된다. 이후 '군사에 대한 건의안'을 의정원에 제출하는데 주요 내용은 '군무부를 만주로 이전해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을 재편성하고 이들을 기반으로 금년 내에 독립전쟁을 개시하자'였다. 

윤기섭 선생은 "우리가 비참한 전투를 한 후에야 세계가 움직이겠고 우리가 비참한 전투를 당한 후에야 국민의 단합이 완성되리라"며 금년 내에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의정원과 임시정부는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에 특파원을 보내고 신흥무관학교에 재정적 지원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로 서북간도 지역 독립군들은 대부분 러시아로 이동해 서북간도 지역 독립군을 재편성하겠다는 계획은 진행되지 못했다. 
 
8월 14일 열린 윤기섭 선생 기념비 제막식 장면. 왼쪽부터 윤기섭 선생의 손자 정철승 변호사와 장녀 윤경자 여사 그리고 삼녀 윤한옥 여사
 8월 14일 열린 윤기섭 선생 기념비 제막식 장면. 왼쪽부터 윤기섭 선생의 손자 정철승 변호사와 장녀 윤경자 여사 그리고 삼녀 윤한옥 여사
ⓒ 정철승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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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원 의장을 맡다

임시정부는 대통령과 국무원들 사이의 불신과 갈등으로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 중이었고 의정원이 대통령의 상해 부임을 촉구하자 상해로 부임했지만 국무총리 및 국무원들과 대립을 빚게 되었고 혼란은 심해졌다. 국무총리, 학무총장, 군무총장, 노동국총판 등이 사퇴하고 대통령 사임 요구도 거세지자 이승만 대통령도 사직한다는 뜻을 밝히고 남경으로 떠났다. 

이 때 윤기섭 선생은 대통령과 각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고 나섰다. 이를 위해 협성회(협성회)라는 단체를 조직했지만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세력의 압박도 커져갔다.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하와이로 돌아가 버리고 임시정부는 방치되었다. 

혼란스런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다. 국민대표회의는 국내외 대표자들이 모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책을 강구하자는 것으로 국내외 각 지역에서 135개 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1923년 상해에서 열렸다. 윤기섭 선생은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의 운명이 논의되기 전에 임시정부 자체적으로 해결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건의안을 의정원에 제출했지만 부결됐다. 

이후 열린 의정원 정기회의에서 윤기섭 선생은 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오늘날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의정원 회의에는 '이승만대통령탄핵안과 임시헌법개정안'이 제출되는 등 정부옹호파와 개조파가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진행됐다. 윤기섭 선생은 양측의 대립을 일단락 짓고 의장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의장에 선출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돼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꾸었고 김구 선생이 국무령에 선출돼 윤기섭 선생 등을 국무원으로 선출했다. 

윤기섭 선생은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단일지도체제를 국무위원들이 책임을 지는 집단지도체제로 바꾸는 헌법개정안을 마련했다. 국무위원제가 시행된 이후 윤기섭 선생은 국무위원으로 선임돼 활동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주로 군무부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교육과 훈련을 담당했던 경험 때문으로 보인다. 

보병조전 저술

보병조전은 과학적인 훈련을 하기 위한 군사교범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편찬되었다. 임시정부에서도 보병조전을 편찬했는데 저술자가 윤기섭 선생이다. 그는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군사교범 편찬을 맡았다. 기록에 따르면 "직접 일본병서와 중국병서를 구하여 번역하고 그 중에서 새로운 병서를 만들어 사용하고 특히 구령을 통일시켰다"고 한다. 책의 분량은 본문과 부록을 포함해 모두 244쪽이며 앞의 강령과 뒤의 부록 그리고 모두 3개부로 구성되었다. 

국제공동관리 반대운동

1941년 미일간의 전쟁이 일어난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을 국제공동관리로 하자는 논의가 진행됐다. 이 소식을 들은 임시정부는 국제공동관리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중국 정부가 나서 이를 반대해 줄 것을 요청하고 한인들을 모아 반대운동을 펼쳐나갔다. 

당시 윤기섭 선생은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제공동관리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한국은 일제가 패망하는 즉시 독립되어야 하고 어떤 형식이든지 국제세력에 의한 통제는 반대하는 뜻을 중국 미국 영국 소련 등에 보내는 한편 독립운동 단체와 한인들을 동원해 반대운동을 펼쳤다. 

임시정부 가족 인솔과 귀국

윤기섭 선생은 중경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임시정부는 급히 입국했지만 윤기섭 선생은 남아 임시정부 가족들과 한인들의 귀국을 도왔다. 교통편을 마련하는 게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을 귀국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해를 넘긴 1946년이 되어서야 버스 10대를 마련해 중경에서 남경까지 이동했다. 1차로 250명, 2차로 40명 그 뒤로 3차, 4차까지 한인들을 이동시켰다. 

윤기섭 선생은 교민들 대부분을 떠나보낸 후 마지막으로 중경을 출발했다. 임시정부 가족들 그리고 부인과 두 딸과 함께였다. 장강을 타고 내려와 무한으로 다시 버스를 타고 상해로 이동한 후 배편이 마련되는대로 임시정부 직원과 가족들을 귀국시켰다. 윤기섭 선생은 1946년 4월 26일 상해를 떠나 4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1911년 서간도로 망명한 후 35년만의 귀국이었다. 

한국전쟁과 납북

귀국이후 윤기섭 선생은 고향 파주와 가까운 불광동에 자리 잡고 농사를 지으면 지내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됐다. 6월 19일 국회 개원식이 열린 후 6일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남한의 주요인사와 함께 납북됐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 고위직에 있던 옛 동지 김원봉의 지원을 얻어 독자적인 정치세력 형성에 나섰지만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이후 윤기섭 선생은 북한 정부의 강압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을 여러차례 벌여 건강이 악화돼 1959년 2월 27일 평양에서 숨을 거두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윤기섭 선생에게 드린 명예졸업증서
 육군사관학교에서 윤기섭 선생에게 드린 명예졸업증서
ⓒ 박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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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윤기섭선생,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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