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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당 중앙정치훈련원에서 교육을 받은 재일대한청년단 간부 81명을 만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당 중앙정치훈련원에서 교육을 받은 재일대한청년단 간부 81명을 만나기도 했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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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보'를 1차적인 책무로 하는 대통령 이승만은 그 책무를 소홀히 했다.

여기저기에서 북한군의 남침 조짐이 있었음에도 엉터리 국방장관의 "각하의 명령만 있으면 북진하여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는 따위의 허장성세만 믿다가 결국 6ㆍ25전란을 당했다. 그리고 서울 시민을 적치하에 버리고 줄행랑을 치고, 피난지 부산에서는 정권연장에만 급급했다.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면서 1951년 11월 23일 자유당을 발족했다. 원내의 공화민정회, 원외의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총, 대한부인회, 농민조합연맹 등의 대표들을 모아 신당발기준비협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되었다. 원내파는 이갑성을 중심으로, 원외파는 이범석을 중심으로 각각 자유당을 발족, 하나의 이름으로 두 개의 정당이 만들어지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대한청년단
 대한청년단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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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한 대통령 직선제 및 사족으로 붙힌 양원제 개헌을 앞두고 두 개의 자유당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여, 저 악명 높은 자유당을 만들었다.

이승만이 1951년 11월에 제안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공고기간을 거쳐 1952년 1월 28일 국회의 표결 결과 재적 163명 중 가 19, 부 143, 기권 1로 부결되는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승만 측은 자유당과 방계단체인 국민회, 한청, 족청 등을 동원하여 1952년 1월 말부터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등의 명의로 국회의원 소환 벽보와 각종 삐라를 뿌리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또 전국애국단체 명의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 지지 관제데모, 가두시위, 국회 앞 성토대회, '민의 외면한' 국회의원 소환요구 연판장 등 광적인 이승만 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계속되는 관제데모와 경찰의 방관ㆍ방조 등으로 국회는 물론 사회의 반이승만 정서가 크게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야당은 국회에 개헌정족수인 3분의 2보다 1표가 더 많은 123명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 3월, 선거 벽보 포스터(대통령후보 이승만, 조병옥, 부통령후보 장면, 이기붕, 김준연 등)
 1960년 3월, 선거 벽보 포스터(대통령후보 이승만, 조병옥, 부통령후보 장면, 이기붕, 김준연 등)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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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 분위기가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기울게 되자 이승만은 더욱 강압적인 수법을 동원하고 나왔다.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직선제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5월 25일 정국혼란을 이유로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남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 측근 원용덕을 임명하는 등 군사력을 개헌공작에 동원했다. 적과 대치중인 전방 전투부대까지 후방으로 빼내어 계엄군으로 동원한 것이다.

계엄사령부는 즉각 언론검열을 실시하는 한편 내각책임제 개헌추진을 주도한 의원들의 체포에 나섰다. 5월 26일에는 국회의원 40명이 타고 국회에 등원하는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연행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시영ㆍ김창숙ㆍ장면 등 야당과 재야 원로들은 부산에서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어 이승만 독재를 규탄하고 나섰다. 그러나 6ㆍ25기념식장에서 의열단 출신 김시현ㆍ유시태 등의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이 터지면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다.

이승만 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회해산을 겁박하면서 발췌개헌을 추진했다. 발췌개헌이란,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에다 야당이 제안한 개헌안 중 국무총리의 추천에 의한 국무위원의 임명,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결의권 등을 덧붙인 두 개의 개헌안을 절충형식으로 취합한 내용이었다.

발췌개헌안은 7월 4일 심야에 일부 야당 의원들을 강제연행하고 경찰, 군대와 테러단이 국회를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 의결선포되었다.

발췌개헌은 순전히 이승만의 권력연장을 위한 사실상 친위쿠데타였다. 개정헌법에 따라 8월 5일 실시된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의 압도적 득표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시하에서 이승만의 일방적인 선거운동의 결과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운암 김성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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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