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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억'. 김환기 작가 작품이 기록한 한국 미술품 최고 경매 가격입니다. '868만원'. 한국의 미술 작가들이 1년 동안 작품 활동을 통해 얻는 평균 수입입니다. 극과 극의 양면이 공존하는 한국 미술계를 '미술톡(talk)'으로 들여다봅니다.[편집자말]
 
 한효석 작가의 작품들. 아트사이드 갤러리제공
 한효석 작가의 작품들(천장은 "자본론의 예언", 벽면은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는데 드러나고 만 어떤 것들에 대하여"). 아트사이드 갤러리제공
ⓒ 아트사이드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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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천장에 매달린 돼지가 비명을 지른다. 배가 불러 젖이 튀어나온 어미 돼지의 살갗을 파고든 새끼들이 서로 뒤엉켜 신음한다. 전시장 벽면엔 정육점에서나 볼 법한 빨간 고깃덩이가 사람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피부가 벗겨진 듯한 얼굴에 박힌 두 눈이 관객을 응시한다.

한효석(47) 작가의 작품들('자본론의 예언',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는데 드러나고 만 어떤 것들에 대하여')이다. '호러 작가', '엽기 작가'로 불리는 그의 작품 앞엔 '18세 이하 관람 불가'나 '임산부나 심장이 약한 분들은 주의해달라'는 문구가 붙기 일쑤다.
  
 한효석 작가가 지난 8일 경기도 평택의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효석 작가가 지난 8월 8일 경기도 평택의 자택과 작업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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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8일,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찾았다. 매실나무로 가득 찬 집 앞 텃밭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곳곳의 '돼지들'이었다.

"몇 개인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수없이 만들었죠. 저 스스로 만족을 못 해서 그래요.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웃음). 이렇게 실제 크기로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돼지가 엄청 크거든요. 죽은 돼지를 구해다 실리콘으로 본을 뜨고 레진을 부어서 만들어요. 사체가 부패하지 않으려면 아주 추운 겨울에 빠르게 작업을 해야 해요. 300kg이 넘는 돼지를 싣고 전북 정읍의 태인까지 내려가서 작업했어요. 집 앞을 지나다니는 미군들이 이게 진짜 돼지냐며 집에 들어온 적도 많아요. 그러다 친해진 사람들도 있고."

그의 집은 군부대 바로 옆이었고, 주변엔 미군 기지들이 많았다. 그는 이곳 평택에서 평생을 살았다고 했다.

"돼지 작업이 그냥 나온 건 아니에요. 저희 집이 여기서 30년 동안 목장을 했었거든요. 지금 저 매실나무들 있는 데가 다 목장이었어요. 이 주변 돼지 농장에서 일도 많이 했고요. 여기 이 큰 돼지 있죠? 이걸 모돈이라고 해요. 얘는 평생 우리 속에 갇혀서 새끼만 낳습니다. 한 350에서 400kg 정도 되는데 실제로 보면 무서울 정도로 커요. 우리가 먹는 돼지는 그 모돈이 낳은 새끼들이죠. 새끼 돼지의 삶은 딱 6개월이에요. 6개월 만에 110에서 120kg 정도로 클 때까지 먹을 걸 막 때려 박는 거죠. 그리고 '출하'돼요. 그게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들 모습이랑 비슷하다고 느꼈죠. 고깃덩이 얼굴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인종 차별해봤자, 얼마 안 되는 피부 벗겨놓고 보면 다 똑같다는 거. 미군기지가 많은 평택은 예전부터 '양공주', '양색시', '혼혈아'가 흔했고 전 그들과 함께 컸어요."

국립인천대학교 조형예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지난 2012년 영국 사치갤러리 큐레이터 팀이 선정한 한국 현대미술 대표작가 34인에 선정됐다.

"작가랍시고 보헤미안처럼 객기를 부리거나, 야바위꾼처럼 작품을 작위적으로 만들어놓고 그럴싸한 비평을 갖다 붙여 마치 대단한 것인 양 의미 부여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진짜 문제의식은 그 작가가 처한 환경에서 나오는 게 많다고 봐요. 지역적 환경에서 작품의 특별한 취향이 나오기도 하죠. 처음부터 글로벌리즘을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제 작품이 외국에서 호평을 받은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 작품의 진정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더라고요. 작가가 그 작품을 왜 만들었는지, 어떤 환경이 뒤에 있었는지를 보죠. 이게 현대 미술의 핵심이기도 하고요. 집, 학교, 학원만 뱅뱅 돌다 미대에 들어오는 요즘 학생들에게 가장 약한 부분도 이게 아닐까 싶어요. 할 얘기가 없는 거죠. 자기만의 주제 의식, 예술관을 가지는 것에 대해 강조하는 편입니다."

평택 미군기지 앞 화방에서 처음 빠진 미술
  
 한효석 작가의 작품들. 아트사이드 갤러리제공
 한효석 작가의 작품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는데 드러나고 만 어떤 것들에 대하여". 아트사이드 갤러리 제공
ⓒ 아트사이드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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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러 작가', '엽기 작가'로 불린다.
"호러는 무슨 호러예요, 그냥 우리 몸인데(웃음). 피부 벗겨서 고깃덩어리를 댄 것뿐이잖아요. 어렸을 때 우리 아랫집에 흑인 혼혈아가 살았어요. 나보다 몇 살 어렸는데, 어머니는 한국인이고 아버지는 확인이 안 됐죠. 근데 걔가 기껏해야 한 네다섯 살밖에 안됐을 때 동네 애들한테 놀림당하는 건 둘째치고 돌팔매를 맞아서 피를 흘리고 실신도 하고 그러는 거예요. 우리 집에 데려와서 눕히고 피도 닦아주고 했던 기억이 많아요. 그런 기억이 작품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줬죠. 껍질을 벗기면 혼혈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부자든 평민이든 다 똑같은 거 아닌가? 그렇게 고깃덩이 작업이 시작됐죠."

- 평택에서 살았다는 점이 작업에 크게 반영되는 것 같다.
"작가가 어떻게 생활했고 어디서 작업하는지에 대해 정답은 없어요. 예를 들어 누구는 도시 반지하에 살면서 몰입해서 만든 작품이 있을 수 있고, 제주도처럼 풍광 좋은 데서 나오는 작업도 있을 수 있겠죠. 그렇게 나온 두 작업은 완전히 다르겠죠. 저는 그런 환경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여기는 편이에요. 제가 평택에 살지 않았으면 당연히 이런 작업이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다양성이 있는 게 좋은 거죠."

- 어떻게 미술을 시작하게 됐나.
"그것도 평택이랑 상관이 있어요. 여기가 미군 기지가 많잖아요. 미군 부대 앞엔 소위 '이발소 그림'을 그리는 화방들이 많아요. 제가 아는 동네 형이 그런 화방들에 액자 납품하는 공장을 했는데, 거기 가면 별게 다 있는 거예요. 오락실도 없는 시골에서 거기보다 재미있는 데가 없었죠. 그림은 물론이고 유화 물감에 붓, 캔버스... 형들이 액자값을 못 받으면 화방에서 그런 걸 다 챙겨서 짐 자전거에 실어 오거든요. 나중에 액자 값 갚으면 다시 주는 식이었죠. 그렇게 유화 물감을 처음 만져보는데 찐득찐득한 게 물에 녹지도 않고 대체 이게 뭐냐 싶었어요. 너무 신기해서 형들한테 다음에 화방 갈 때 나도 좀 데려가 달라고 했어요. 화방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죠. 국민학교도 안 나온 화방 아저씨들 중에 지금 유명한 작가들보다 훨씬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이 아주 수두룩했어요. 천재적인 소질들이죠. 어깨 너머로 물감을 어떻게 다루고 그림을 그리는지 배우는 거예요. 그림에 확 빠져들었죠.

화방들이 다 미군 상대하는 장사다 보니까 미국에서 들어오는 미술 잡지나 화집들도 엄청 많았어요. 그림을 부탁한 미군들이 많이들 갖다줬던 거죠. 그림들이 워낙 싸고, 질도 좋으니까. 덕분에 전 '아메리칸 포토리얼리즘(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발생한 미술 사조로, 추상이 지배하던 당시 흐름에 반하여 사진 같은 극도의 사실주의를 주창하던 경향)' 같은 걸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다 접했어요. 어떻게 보면 평택 미군기지라는 독특한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혜택이랄까요. 좀 아이러니하죠.

초등학교 이후론 교내 미술대회를 하면 항상 최우수상이었어요(웃음). 그러면서 시 대회, 도 대회도 나가게 됐죠. 고등학생 땐 안 나가도 되는 각종 대학교 미술대회에 나가서 학교도 빼먹고. 에이 미술대회는 무슨 미술대회에요, 그저 기차 타고 하루 이틀 학교 안 가도 되고 하니까 열심히 다닌 거죠(웃음)."

공모는 스무 번 다 떨어지고, 벽화 그리며 돈 벌고
  
 한효석 작가가 지난 8일 경기도 평택의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효석 작가의 평택 작업실. 바흐의 무반주 첼로가 흐르고 있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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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작가'라는 별칭이 무색하게 그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나긋나긋했다. 절규하는 돼지와 적나라하게 발가벗은 나체 모형이 뒹구는 작업실에선 바흐의 무반주 첼로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 사이사이 커피를 내려주거나 텃밭에서 직접 따온 방울토마토를 깨끗이 씻어 대접하기도 했다.

- 늦게 대학에 갔다고 들었다.
"스물여섯에 갔어요. 고등학교 때 홍익대 미대 시험을 봤는데 떨어져서 군대를 갔어요. 군대 갔다 와서 한 2년은 학교 갈 생각을 안 하고 주로 공사장에서 일했어요.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뇌수술을 받으시고 목장도 서서히 기울면서 결국 파산했거든요. 제가 돈을 벌어야 했죠. 사료 배달도 하고 낚시도 했어요. 사료 가게를 하는 동네 형이 있었는데 하루에 몇천 포씩 납품을 해요. 하나에 25kg짜리를 두 개씩 이고 가요. 너무 힘들죠. 그저 오후에 새참에 막걸리 한잔 받아먹는 맛에 하는 건데(웃음). 저녁에는 또 낚시를 해요. 이게 또 돈이 되거든요. 평택 쪽에 저수지가 많은데, 거기서 향어나 잉어를 잡아서 평택 터미널 앞 민물고기 도매센터에 파는 거예요. 한 마리에 만오천 원은 쳐주니까 열 마리, 스무 마리 잡으면 이십 만원은 금방 벌죠.

그렇게 돈을 벌다가, 일이 생겼어요. 저한테 그림 가르쳐주던 동네 형이 계셨어요. 이 시골에서 고3 때 홍대 서양화과를 붙었으니까 거의 뭐 전설적인 사람이었죠. 그 형이 늘 절 보면 '네 재주를 안 살리고 왜 그러고 사냐'고 했어요. 어느 날은 식사라도 하자는데 그 말이 듣기가 싫으니까 안 갔죠. 근데 그해 추석 다음날 형이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교통사고로. 그 소식 듣자마자 딱 들은 생각이, 그래, 학교 가자. 내가 젊은 나이에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건 좀 아니다. 나를 좀 다른 세계에다가 가져다 놓자. 바로 수능 공부하고 그해 홍대에 붙었어요. 그때 만약 학교를 가지 않고 일을 계속했다면 돈 많이 벌었겠죠."

- 2012년 영국 사치갤러리 큐레이터 팀이 선정한 한국 현대미술 대표작가 34인에 선정되는 등 젊은 나이에 외국에서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덴마크에 있는 갤러리에서도 지원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한국 미술시장은 여건이 좋지가 못해요. 수년간 외국 돌아다니면서 계속 도전하고, 전시도 하면서 노력했죠. 부지런하게 살았어요. 지원받기 위해서 각종 공모도 많이 했고요. 처음 2년 동안은 공모만 스무 번을 냈는데 다 떨어졌어요. 그땐 정말 낙담했죠. 그러다가 한 군데가 되고, 두 군데 되고. 나중엔 지원을 많이 받았어요. 발품 판 거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안 되니까. 제 작품이 팔리기 시작한 건 서른일곱, 서른여덟부터예요. 그전까진 병원에 들어가는 그림들 몇십 점씩 그려서 파는 것부터 시작해서 벽화 그리기까지 별일 다 했어요. 벽화 같은 건 하나 하면 몇백씩 목돈으로 들어오니까 미리 시안 다 만들어서 구청이니 동사무소니 뛰어다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50m, 200m 되는 벽화를 그리는 거죠. 강의도 많이 했어요. 10년 동안 강사로 열 개 대학을 다녔으니까. 그러면서 또 내 작업은 작업대로 해야 하고. 잠을 많이 못 잤죠. 그러다 교수가 되고, 갤러리에 전속되면서 다른 일은 안 해도 되는 정도가 됐어요. 아침에 출근하는 대부분 사람들도 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잖아요. 작가도 뭐 별거 있나요, 마찬가지예요(웃음)."

'예술가' 무시하는 분위기라면 좋은 작가 안 나와
  
 한효석 작가가 지난 8일 경기도 평택의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의 작업실 주변엔 작품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는 "작가란 그저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작가랍시고 보헤미안처럼 객기를 부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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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허위의식에 찬 작가관을 경계하던 그는 "작가란 그냥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실제 그가 늘 갖고 다닌다는 작가 노트엔 그림보다 글씨로 된 메모가 더 많았다. 작품 제목이 되기도 했던 '누가 이 아름다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는가' 같은 글귀도 눈에 띄었다. 그는 "작가는 보헤미안이 아니라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인간답게 바꿀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노예처럼 작업하고, 선비처럼 생활하며, 신처럼 생각하라'라는 한 선배 조각가의 말이 자신의 생활 모토라고 했다.

그의 집 바로 옆에는 창고 겸 작업실이 있었다. "작업실만 들어오면 머리가 아파요. 할 게 너무 많이 보여서." 그는 흔쾌히 작업실을 보여줬다. 작업들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설명해줬다. 그는 "입체 작업을 하기 때문에 그라인더 같은 기계를 많이 쓴다. 소음도 많고 분진도 날리는데,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작업할 수 있는 이곳이 좋다"고 했다.

- 요즘엔 어떤 작업을 하고 있나.
"최근엔 고깃덩이 얼굴 작업은 잠시 그만두고 인간 군상 입체 작품을 주로 만들고 있어요. 목 매달린 사람들, 그리고 높은 단 위에 여러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도록 만드는 작업들이에요. 먼저 '목 매달린 사람들' 작업은 백인과 흑인의 나체 모형에 흑백 색깔을 서로 다르게 입혀서 봉 끝에 목을 매달은 작업이에요. 차별은 해봐야 당하는 쪽만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가하는 쪽에도 똑같은 문제가 야기된다는 거죠. 미국에서 일어나는 총격 살해사건들이 단적인 예입니다. 제목을 '불평등의 균형'이라고 해봤어요. 이 역시 이곳 평택에서 살며 생긴 문제의식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죠.

높은 단 위에 사람들을 빼곡하게 세워놓은 작업은 사회 구조에 대한 메시지에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신분과 지위 고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평등해야 하는데, 세상은 결코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결코. 제 생각에 이건 아주 구조적인 문제이고, 그로 인한 피해는 늘 대다수의 익명인들 몫입니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디디면 나가떨어져서 재기가 불가능해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구조. 명퇴(명예퇴직) 당하고, 자영업자로 내몰리다가 푹푹 쓰러지고. 위험한 현실이지만 다 우리 주변 얘기죠. 아직 더 작업해야 해요. 또 노예처럼."

- 한국 미술의 문제점은 뭐라고 보나.
"제가 작가로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건 사람들의 괄시였어요. 예술가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이란 게 그래요. 똑같은 사람인데 미대 나와서 미술 작가라 그러면 갑자기 눈빛이 확 바뀌어요. 존중은커녕 무시하죠. 연인들과 헤어져야 했던 많은 이유도 부모들의 반대였어요. 사람은 보지도 않고 예술가라고 하면 벌써 끝이에요.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작가들이나 학생들 얘기 들어보면 변한 게 없거든요. 부모들이나 주변에서 긍정적으로 지켜봐주고 인정해주지 않으니 다들 나와서 살고 싶어 해요. 그러다 보면 작업실도 숙식이 되는 공간으로 얻어야 하니 돈이 더 들죠. 슬슬 상대적인 비교가 시작돼요. 옆에 있던 친구들은 취직하거나 공무원 시험 봐서 나보다 안정적으로 사는 것 같고, 박탈감이 들죠. 그러면 작업 못 해요. 하지만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그런 생각 드는 게 당연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좋은 작품이나 좋은 작가가 나올 수 있을까요?"

선비같이 일정했던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빨라졌다.

"근데 작가들을 무시하는 게요, 미술계 안에서도 그래요. 몇 년 전 전시 때 일입니다. 지방에서 열린 꽤 큰 전시였는데, 개막하고 나서 술자리가 열렸어요. 참여한 작가들도 많이 모였고 이 바닥에서 이름 있는 평론가나 전시 기획자들도 있었어요. 밤늦게 술자리가 끝났는데, 미술관에서 평론가나 전시 기획자들한테는 호텔 숙박권을 주더라고요. 당연히 작가들 것도 있을 줄 알았죠. 근데 작가들 건 없다고 그냥 가라는 거예요. 하 참... 다들 조용히 모텔에 가서 자는데, 기분이 진짜... 더러웠어요. 사실 그날만큼은 작가들이 주인공이거든요. 어떤 기분이냐면요. 축구 시합이 있어서 11명이 두 시간 동안 죽도록 뛰었는데, 경기 끝나고 났더니 '축구 대회를 열어주신 누구누구 님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주세요!' 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젊은 작가들이 갤러리나 미술관에 잘 안착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없는 것도 문제라고 봐요. 이름 없는 대안 공간에서 조그만 전시 해봤자 아무도 안 오거든요. 그러다 보니 모두들 네임 벨류 있는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하는 단체전에 이름이라도 한번 올려 보려고 목을 매죠. 그 정도는 돼야 기획자나 갤러리리스트들이 찾아오니까. 지금 대형 미술관들도 보면, 우리 젊은 작가들이 과연 설 자리가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이미 다 알려진 작가들 전시가 되풀이되거나 외국 작가들 전시로 가득해요.

반대되는 좋은 사례로 대구 미술관의 경우를 보면, 지속적으로 지역 작가들 전시를 열어줍니다. 너무 보기 좋죠. 대형 미술관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우리 젊은 작가들에게 조그만 공간이라도 내어주고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건 결국 작가들이잖아요. 그렇게 작가들을 위한 축적의 시간이 확보돼야 전반적인 콘텐츠의 수준도 발전하겠죠."


그는 그럼에도 미술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이 고맙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그는 송탄 터미널까지 배웅을 나왔다.
 
 한효석 작가가 지난 8일 경기도 평택의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직접 송탄 터미널까지 배웅을 나왔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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