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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광복회 우재룡' 표지
 "대한광복회 우재룡" 표지
ⓒ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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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1910년대 항일 결사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단체는 대한광복회'라는 대목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우고 민족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면서 '대한광복회가 전개한 의협 투쟁은 1920년대 의열 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고 기술했다.

1915년 중순부터 1918년 초반까지 약 3년 동안 맹활약을 펼쳤던 광복회는 성격상 구한말 의병의 후신이자 1920년대 의열단의 전신이었다. 광복회는 군자금을 모아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하고, 의연금 모금에 협조하지 않은 장승원 등 친일 부호들을 처단했으며, 세금 수송 차량을 탈취하고 그들의 중석광과 헌병 초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광복회는 1910년대 최고의 무장 항일운동 결사체

그 무렵은 나라가 망한 직후였기에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기였다. 게다가 강점기 초기인 탓에 일제의 무단 통치도 그 어느 때보다 극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회는 나라 안의 각 도는 물론 만주에까지 지부를 설치하는 등 전국 조직을 갖추고 활동했다. 2대 만주 지부장이 김좌진이었다.

총사령은 박상진이었고, 지휘장으로는 우재룡과 권영만이 활동했다.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전라도 지부장 이병찬, 평안도 지부장 조현균, 강원도 지부장 김동호 등의 도 단위 지휘자들과 사무총괄 이복우 등이 핵심이었다. 중국과 국내 독립운동을 연결하기 위해 설치한 단둥 안동여관 운영은 손일민이 맡았다.

의병 출신들이 앞장서서 의혈 투쟁 선도

선비 출신이 많았지만 우재룡, 권영만 등 의병 활동을 해온 인사들도 상당수 있었다. 구성원이 다양했던 만큼 광복회는 나라를 되찾아 임금을 본래 대로 옹립해야 한다는 복벽주의자들과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공화주의자들로 혼합되어 있었다. 우재룡 등 의병 출신들은 전투 경험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광복회의 의협 투쟁을 선도했다.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식을 마친 광복회가 처음으로 전개한 활동은 경주 효현교에서 세금 수송 차량을 공격한 거사였다. 그해 12월 24일 우재룡과 권영만은 무열왕릉 서편 솟티고개를 넘어 법흥왕릉 아래 고현천으로 나아가는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8,700원(현 시세 약 4억원)을 탈취했다.

광복회의 7대 강령 중 첫 번째가 '우리는 무력을 준비한다. 일반 부호의 의연과 일본인이 불법으로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여 이로써 무장을 준비한다'였으니 강령에 충실한 활동을 펼쳤던 셈이다.
 
 우재룡이 권영만과 함께 세금 수송마차를 탈취했던 경주 효현교('대한광복회 우재룡' 108쪽의 사진을 재촬영)
 우재룡이 권영만과 함께 세금 수송마차를 탈취했던 경주 효현교("대한광복회 우재룡" 108쪽의 사진을 재촬영)
ⓒ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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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 출신의 산남의진 선봉장 우재룡

창녕 출신의 우재룡은 이미 구한말 의병인 산남의진 활동 중 일제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합방에 따른 특사'로 풀려났다. 그는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보며 무력을 길러야 구국이 가능하다고 판단, 18세 때(1902년) 자원하여 진위대에 입대했었다. 그후 1907년 군대해산을 맞아 의병에 투신했고, 전국 굴지의 의병부대인 산남의진(의병장 정용기, 정환직 부자)의 연습장과 선봉장으로서 일본 군대에 맞서 싸웠다.

우재룡은 망국 이후 은거하던 중 박상진을 만나 새롭게 의기투합했다. 그는 이제 의병이 아니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하지만 우재룡은 박상진 등이 붙잡혀 순국한 후인 1921년 4월 18일 군산에서 '주비단'을 조직하여 광복회를 재건함은 물론 중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활동을 펼칠 계획에 몰두하던 중 마침내 체포되고 만다.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면서 도합 18년의 투옥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매일신보, '광복회 수괴' 우재룡을 체포했다고 대서특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21년 6월 11일자에 '광복회 수괴 우이견'을 체포했다는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게재했다. 우이견(우재룡)이 '대정 6년(1917년) 이래로 교묘히 종젹(종적)을 감초엇다가(감추었다가) 잡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넘겨졌다는 기사였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도 '장승원을 총살한 광복회원 우이견'이 '최근에 군산 디방(지방)에서 운동 중 4년 만에 경긔(경기) 경찰부에 테포(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우재룡이 광복회 초대 총사령 박상진의 피체 이후 제2대 총사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917년 11월 10일 장승원에게 직접 총격을 가해 처단한 지사는 채기중과 강순필인데도 신문이 '장승원을 처단한 우이견'으로 표현한 것은 그가 거사를 총지휘했기 때문이다.

우재룡은 그 사이에 14회나 압록강을 넘나들면서 광복회 만주 지부(길림 광복회)를 결성했고,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의연하라는 포고문을 발송하는 일을 전담했다. 그는 이미 의연금을 내고 있는 부호들에게도 포고문을 보냄으로써 만약의 사태가 빚어졌을 때 그들을 보호하려는 치밀함까지 선보였다.

37세에 투옥되어 53세에 출감

우재룡은 18년에 이르는 투옥 생활을 했다. 두 번째 투옥은 37세 때의 일이었는데  출옥하니 어느덧 53세나 되어 있었다. 다시 투쟁을 준비하던 중 나라가 독립을 되찾았고, 그는 광복회를 다시 재건하여 국가 초기의 사업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등에 업은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 등의 방해로 광복회는 곧장 해산되고 말았다.

게다가 김구, 여운형 등이 피살되는 상황에 그도 내내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산에 숨어 살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좋은 때는커녕 전쟁이 일어났다. 우재룡은 간신히 생명을 부지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절망감과 노환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갔다.  
 
 표지 뒷면 일부
 표지 뒷면 일부
ⓒ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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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맞았지만 절망감과 노환 못 이기고 별세

우재룡의 생애를 총정리한 평전이 출간됐다. 충남대 이성우 교수가 집필한 평전 〈대한광복회 우재룡〉은 1900년대 구한말 의병의 구국 항쟁에서부터 1955년 전쟁 직후까지의 정치상황을 생생하게 말해준다. 나라를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친일파들이 준동하고 있는 어지러운 세상과 항일 투쟁이 뜻대로 이뤄지지 못하여 지사들이 순국해가는 모습을 읽을 때면 저절로 눈시울이 젖는 책이다.

저자는 책에서 '우재룡은 겉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묵묵히 자기에게 맡겨진 소임을 실천하는 독립운동가였다'면서 '3·1운동 후 조직되는 주비단이나 광복 후 조직되는 재건광복회처럼, 자신이 실질적인 지도자 위치에 있던 경우에도 이러한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묘비명에도 '일제에 대항해 나라를 구함에 있어 일생을 백척불굴의 정신을 발휘했으나 대표적 지위에 앉지 않고 실천을 주로 하여 기민한 작전으로 적을 괴롭혔다'라고 새겨져 있다.

책은 '광복회의 의열 투쟁은 1919년 조직된 의열단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의열단은 광복회의 의열 투쟁 정신을 계승했고, 광복회의 경험과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단체였다. 뿐만 아니라, 1920년에 활동했던 무장투쟁 단체들에도 광복회의 방략과 정신은 계승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광복회의 독립운동사적 의의를 보태어 해설하고 있는 부분이다.
 
 '대한광복회 우재룡' 뒷표지의 일부
 "대한광복회 우재룡" 뒷표지의 일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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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독립지사의 삶 알아야 하고, 경외해야 마땅

마지막으로 '우재룡의 용력은 대단하여 장사의 기상을 보였으며, 70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그의 안광(眼光)은 사람들을 압도했다'라는 산남의진 정용기 의병장의 증손 정희영의 증언을 돌이켜본다. 우재룡은 별세 직전의 고희 나이에도 세상을 형형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은 어떠한가. 사회는 여전히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고, 나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오늘의 상황이 '경제 침략'이라는 이름을 얻고 있는 지경임에도 국내 인사까지 '강제 위안부는 없었다'라고 공공연히 발언하고 있다.

사람들을 압도하는 우재룡 지사의 눈빛도 우리나라에서는 효험이 없다는 말인가.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어 계시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받으신 독립지사인데도 아는 이 별로 없는 이 현실은 무엇이라고 변명할 것인가. 이제라도 많은 사람들이 우재룡 이름 석 자를 기억하기를 기대하면서 '애국지사 우재룡 평전' 〈대한광복회 우재룡〉을 조용히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덧붙이는 글 | 이성우 저, <대한광복회 우재룡>(2019, 선인), 신국판 양장 415쪽, 3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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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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