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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거리(구 개척리)에서 한국문화 거리 공연을 마치고 러시아 학생들과 기념으로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거리(구 개척리)에서 한국문화 공연을 마치고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거리(구 개척리)에서 한국문화 거리 공연을 마치고 러시아 학생들과 기념으로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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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2일부터 19일까지 7박8일 일정으로 김병우 교육감을 단장으로 하는 충청북도교육청의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사제동행 인문행성(인문학으로 행복한 성장) 국외 연수' 프로그램(이하 '동행연수')에 우리 학교 동아리 아이들 4명과 참여하였다. 이 후기는 총 60명 동행연수단의 자취에 남겨진 나름의 의미망을 성기게 거두어 곱씹어보는 이야기이다(2019 사제동행 인문행성 국외 연수 공식 밴드 주소 : https://band.us/n/a5a712K4Qf1fN).

이미, 연수단에 선발된 4월부터 60명의 다른 학교 인문 동아리와 마찬가지로 우리 학교 동아리도 3개월 이상 사전 학습과 매우 다양한 준비 과정을 거치고 짐가방을 꾸렸다.

그리고 우리는 나름 마음의 무게에 '역사 의식'이라는 것을 가지고(동행연수 지도교사의 입장에서 그러길 바라며) 공항에 집결하였다. 드디어 연수 출발이다. 아, 나도 그렇지만 우리 사제동행단 아이들이 저마다 우리 '역사'의 발자취에서 '의미' 하나씩이라도 거두기를('의미'에의 집착은 교사로서의 직업병이지만 특히 큰 행사에 오랜 시간을 준비하여 그 마음이 유난히도 컸으니) 바라며.

우리는 연길에 도착하여 용정으로, 그리고 중국의 국경 도시 훈춘에서 러시아 크라스키노로 월경하여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하바롭스크에 도착한 후 다시 남하하여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의 여정을 소화했다. 그 경로에서 우리는 백두산 천지, 윤동주 생가, 명동학교, 이상설의 서전서숙, 3.13 반일의사릉, 15만원 탈취 사건 기념비, 봉오동 전투 유적지, 도문조중변경(중구과 북한의 두만강 유역 접경), 연변대학교, 방천전망대, 안중근 단지동맹비 등을 경유하며 시낭송과 참배, 만세 삼창과 특강 등을 통해 항일 독립 운동의 뚜렷한 자취를 눈과 마음에 담았다(고 나는 여겼다).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거리(구 개척리)에서 러시아 소녀들과의 K-Pop 합동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거리(구 개척리)에서 러시아 소녀들과의 K-Pop 합동 공연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거리(구 개척리)에서 러시아 소녀들과의 K-Pop 합동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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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는 조명희와 김알렉산드리아, 최재형의 유산을 접하고 고려인 문화센터에 기록된 고려인의 디아스포라(Diaspora)의 아픈 역사를 다시 확인했으며 고려인 민족학교를 방문해 고려인 학생들과의 만남의 시간을 갖고 신한촌 기념비에 미리 준비한 헌화와 헌시를 했으며, 특히 연해주 이주 초기 동포들의 정착터였던 구 개척리(현재 아르바트 거리)에서 K-Pop을 비롯해 부채춤과 태권무 등 학생들이 준비한 한국 문화를 펼친 거리 공연을 통해 우리들 뿐만 아니라 푸른 눈동자와 금발 외국인들에게까지 가슴 벅찬 시간들을 만들어주었다(고 자평했다).

그런데 이 여정 초반 두만강을 따라 이동하는 차 안에서 지도 어플로 경로를 살피던 나는 불현듯 오래전에 접했던 함석헌 선생의 '씨알'을 떠올렸는데, 이후에도 계속 그 말에 붙들릴 수밖에 없었다. 고난의 역사를 관통한 우리들 기층 민중을 씨알이라 부르자며 선생이 말 한 바, 우리 씨알들이 겪은 고난의 역사가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했으나, 책을 접하던 당시나 지금이나 내 어리숙한 이해는 그 '뜻'에 다다르지 못했으며, 또 그 '뜻'을 이룬다 해서 씨알의 개별적 고난에 응당한 보상이 되기나 하는 것일까, 하고 의문시했었던 생각까지 뒤를 따랐다. 

지금 동행연수단이 뒤따르는 길은 100여년 전 우리 땅에서 간도와 연해주로 이어지는 씨알의 고난의 길이다. 그런데 이 고난의 길이라는 것이, 차창 유리에 기대어 잠든 저 아이들에게, 또 개별적인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얼마나 투영되고 복원될 것인가? 

씨알이 민중이라면, 씨알들이 가장 먼저 '씨'로써 '알'을 삼고자 하는 대상은 결국 우리의 아이들일 것이다. 말하자면 아이들은 '씨알의 씨알' 인 셈이다. 요사이 대통령도 언급했다는 <90년생이 온다>는 책이 화제라고 한다. 그리고 그 책에서는 90년대 출생 세대의 특성으로 '간단하거나', '재미있거나', '정직하거나'를 제시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2000년대 출생인 우리 중학생들을 축약한 형용은 '더 간단하거나', '더 재미있거나', '더 정직하거나'가 아닐까?

복잡한 알고리즘은 AI가 대신할 수 있고, 재미가 없으면 어떤 의미조차 없으며, '핵인싸'가 되기 위해서 '까발려져야' 하는 세대들. '중2병' 또는 '급식충'과 같은 비하의 표현도 재미의 소재가 된다면 스스로 수백 번 수용하고 대거리의 소재로 삼는 아이들.

이 새로운 '씨알' 세대들은 역사 또한 그렇게 둥쳐버린다. 위에서 정리한 7박 8일의 여정 동안 솔직히 나를 비롯한 동행연수의 지도 교사들은 밤마다 협의회를 하며 속을 태웠다. 긴 시간 사전 학습과 다양한 체험으로 연수를 준비한 우리 아이들이 그토록 선행학습을 많이 했던 여정들을 허투로 낭비하거나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간단'과 '재미'와 '정직'을 담보할 연수 방법이 막상 걸음 닫는 현장과는 동떨어졌던 것이다. '간단'은 커녕 복잡한 변곡으로 이어짐을 찾고, '재미'와 동떨어진 일들의 사전(事前)과 사후(事後)의 '의미'를 해석하며, '정직' 너머의 '깊이'에서 솎아내야만 만난다는 '역사'를 이 새로운 '씨알'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기우에 불과한 나의 '꼰대'적인 걱정에 반전이 생겼다. 그 반전은 아이들이 스스로 만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간단하게', '재미있게', '정직하게'. 아이들은 역사를 새롭게 소화하고 제 것으로 만드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나는 믿는다. 지식인과 기성의 세대가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젠체하여 역사에 그어놓은 밑줄을 강요하다시피, 추상에 가까운 '민족애'와 잡념에 가까운 '인간애'를 공허한 교과서로 들이밀 때, 아이들은 사물함 속에 교과서를 기꺼이 쳐박아 버렸던 것이다.

아이들은 사물함 밖으로 뛰쳐나왔다. 교과서의 밑줄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가슴이 벅찼다. 내가 역사 의식 따위로 개조?하려던 아이들이 거꾸로 역사의 폐허 위에 어슬렁거리던 나를 개조하고 있었다.

연해주 초기 한민족 정착민들의 고난의 흔적이 자취를 감춘 그 곳-아르바트 거리에서 선열의 아픔(의미)을 되새기는 묵념이나 또 다른 강의를 진행했다면, 기념 사진을 더한 밋밋한 교과서 한 장을 더 추가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거리(구 개척리)에서 러시아 소녀들과의 K-Pop 합동 공연을 하는 동안 많은 현지인들과 관광객이 호응하고 있는 모습
▲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거리(구 개척리)에서 러시아 소녀들과의 K-Pop 합동 공연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거리(구 개척리)에서 러시아 소녀들과의 K-Pop 합동 공연을 하는 동안 많은 현지인들과 관광객이 호응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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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들은 이 거리에서 '의미' 보다는 '재미'를 (당연스럽게도) 먼저 찾아냈다.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의 '빨간 맛'과 '트와이스'의 'Cheer up', 그리고 'BTS'의 '아리랑'에 웨이브를 타며 러시아 10대 소녀 20여명과 떼춤으로 통일되는 장면은 '재미'가 역사의 각본을 이겨내고 마침내 '인간애'로 확장되는 모습의 '간단'하고도 '정직한' 실현이었다고 믿는다.

전문적인 공연 동아리가 아닌 아이들의 율동과 몸짓, 악기 연주, 랩과 부채춤, 태권무 등의 모양새는 엇박자와 서투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그런 표정 하나하나는 기획이 만들어 제공하는 가공과 자극의 컨텐츠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흔히 만나볼 수 없는 살갑고 순박한 것이었다. 순간의 판타지였다고 폄하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인간 상호간에 느끼는 우정이야말로, 이념이나 민족 그리고 역사의 경계 너머를 관통하는 씨알들의 생명의 '뜻'이라고 믿는 관점에서, 나는 이 동행연수단의 '중딩이'들과 러시아 동아리 아이들이 함께 열광하며 껴안고, 웃음 짓고 인스타와 페메의 아이디를 주고받으며 '몸으로' 대화할 때, '독립'과 '해방'의 지평이 '우정' 너머 '자존'으로 무한 확장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감히 말하자면, 함석헌 선생이 이 땅의 씨알들에게 그들이 본시 가지고있던 '인(착함)과 용(용맹)과 지(재능)'를 소환하기 위해 요구했던 '자유(자존)'의 현장이 아니었던가?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거리(구 개척리)에서 우리 학생의 랩 공연에 러시아 소녀들이 호응하며 함께 어울리고 있다
▲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거리(구 개척리)에서 랩 공연하는 우리 학생 블라디보스토크 아르바트거리(구 개척리)에서 우리 학생의 랩 공연에 러시아 소녀들이 호응하며 함께 어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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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랩에 화답하고, 전체 동행연수단이 펼친 아리랑 플래시몹의 처음 보는 스탭을 함께하며, 나누어준 태극기를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열심히 흔들고 뜻도 모르는 한국어 만세 삼창을 힘차게 함께 외친 러시아의 금발 소녀들. 그것은 국경과 민족 너머 '자유(자존)'의 생동하는 표현이었고, 우리 아이들이 표현한 '자유(자존)'와의 합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곳에서 확인했듯 이 시대의 새로운 '씨알'들은 국경과 민족 너머의 시공간에서 개별 인간들의 자유와 자존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따라서 나는 함석헌 선생이 복원하자고 외친 우리 씨알의 DNA-착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너그럽고, 날쌔고 용감하고, 재능있는-그 알맹이 '뜻'이 여기서 나타났고, 이후에도 이것이 우리를 우리답게 살게하는 것이라 믿는다.

우리 선열들이 걸었던 애족의 길이 인간을 보듬으려는 애민의 마음에 닿아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듯이, 오늘의 중학생 아이들이 평소에는 서로 욕을 하거나 스마트폰에 빠져 허우적거렸음에도 '세상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웃고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역사의 씨알의 뜻에 가닿는다고 믿는다. 우리는 사람이 어울리는 재미의 역사를, 그 현장을 만들 수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온 저마다의 학교에서 아이들을 다시 모아 동행연수의 후기를 '재미있게', '단순하게', '정직하게' 저마다의 역사로 쓰게 될 것이다.

이제, 씨알이 씨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 연수 후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간단하고, 정직하고, 재미있게' 역사를 만들어준 대한민국 중학생들, 만세! 러시아 친구들, 만세!"

태그:#사제동행, #국외연수, #충청북도교육청,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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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학교 교사, 아이들을 통해 앞날을 꿈 꾸고, 소소한 일상 예술들을 통해 세계와 세계 속의 사람들과 함께 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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