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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만 희귀본을 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2년 동안 애타게 찾아다닌 절판본이 있다. 죽음을 주제로 한 책 중에서 단연 손꼽는 고전으로 추앙받으며 197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The denial of Death)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문화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의 평생에 걸친 역작인 <죽음의 부정>은 2008년에 국내에 번역됐지만 절판됐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진지한 논의나 성찰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과 같은 책이니 재출간에 대한 열망이나 절판본을 구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최초의 번역본이 절판되면서 국내 독자들은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만나게 된다'는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 이 책의 절판본을 필사적으로 구하려고 했던 독자들의 소망과 이 책을 재출간하고 싶다는 출판계의 의지에 대한 응답은 뜻밖에도 9살 소녀의 '죽음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호기심이 충만하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신감이 넘쳤던 9살 소녀는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해결되지 않는 과제 즉 죽음의 비밀을 스스로 알아내기로 했다. 9살 인생에서 모르는 것은 책이나 질문을 통해서 모두 알아낼 수 있었는데 유독 '죽음'만은 지금까지 유용했던 그 어떤 경로로도 알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줬던 세상의 모든 지식공급체계에 대한 보답으로 이번엔 자신이 직접 새로운 지식의 공급자가 되기로 했다. 어느 날 오랫동안 공부하고 생각해낸 계획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다행히 그녀의 선구적인 실험에는 비용이 많이 소요되지 않았다. 또 별도의 실험실도 필요하지 않았다. 
 
죽음의 부정 표지
▲ 표지 사진 죽음의 부정 표지
ⓒ 한빛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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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소녀는 급식으로 나온 우유에 실리카겔을 말아 먹었다. 이 알갱이들이 그녀를 죽음으로 편안하게 데려다줄 것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프런티어 정신이 가득한 실험은 실패했다. 죽지는 않고 배만 불러왔기 때문이다. "인체에 무해하나 먹지 마시오"라는 문구를 실리카겔을 먹고 나서야 읽었다. 소녀의 장이 충실이 제 할 일을 한다는 것은 증명됐지만 죽음의 비밀을 알아내겠다는 야심 찬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실행력이 남달랐던 이 소녀는 포기를 몰랐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플랜B를 가동했다. 이번엔 다소 자금을 필요로 하는 실험이었다. 밀폐된 공간에 백합을 두고 자면 질식사할 수 있다는 도시 괴담을 들은 것이다. 소녀는 용돈을 모아 산 백합 한 단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했지만, 안타깝게도 두 번째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소녀가 경험한 것은 질식이 아니었고 꿀잠이었다. 

용감했던 9살 소녀의 두 번의 시도는 <죽음의 부정>의 저자인 어니스트 베커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어니스트 베커의 병실을 찾아갔을 때 그가 맨 처음 꺼낸 말은 다음과 같다. "최후의 순간에 절 찾아오셨군요. 제가 죽음에 관해 쓴 모든 것을 드디어 검증할 때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보여줄 기회가 찾아온 거죠. 제가 과연 존엄하고 인간답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 <죽음의 부정>(한빛비즈) 서문 중에서

어니스트 베커의 집요하고도 치밀한 죽음에 대한 탐구는 그가 사망한 지 3개월 후 퓰리처상을 수상함으로서 미진하나마 그 열매를 거뒀고, 9살 소녀의 두 차례에 걸친 무모한 죽음 체험 시도는 수십 년이 지난 2019년에 그 결과물이 탄생했다. 시간이 흘러 편집자로 성장한 그 9살 소녀의 손에서 <죽음의 부정> 복간본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간을 위한 초역본을 구하는 과정은 어린 시절 미처 이루지 못한 죽음에 대한 실험만큼이나 험난했다. 

인터넷 중고서점에 입고 알람을 걸어뒀지만 눈앞에서 놓치기를 반복했다. 알람을 받고 얼른 들어가 보면 그사이에 다른 발 빠른 독자가 낚아채 가곤 했다. 어디엔가 다소곳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신을 기다릴 것 같아서 오프라인 헌책방을 돌아다녔지만, 그 어디에도 없었다. 상심에 빠진 그녀를 구출해준 곳은 도서관이었다. 이마저도 공용 서가가 아니고 신청을 하면 사서가 별도 서가에서 책을 가지고 나오는 방법으로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간신히 책 내용을 검토해서 재출간을 확정했지만, 출간을 진행하자면 책이 꼭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초역 번역본 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책을 수집하다 보면 꼭 그 책을 읽고 싶다기보다는 사냥에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기는데 이 오기야말로 책 수집가를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한 인터넷 서점의 알람이 뜨자마자 전광석화처럼 클릭해서 마침내 정가의 4배를 주고 초역본 <죽음의 부정>을 구할 수 있었다. 헌책방과 인터넷을 뒤진 지 2년 만의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한빛비즈가 새로 낸 <죽음의 부정>은 독자를 세 번 놀라게 한다. 그 가격이 첫 번째이며, 내용의 난해함이 둘째, 고급스럽고 튼튼한 장정이 마지막이다. 비싼 가격에 투덜거리면서 주문을 하지만 일단 이 책을 손에 넣으면 반드시 만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믿을 만한' 번역가 노승영 선생의 손을 거친 작품이라는 것이 이 책의 가치를 더한다.

천으로 표지를 삼은 튼튼하고 고급스러운 장정을 만지다 보면 출판사가 이 책의 제작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실감이 된다. 표지의 반 이상을 천으로 마감하고 하단에는 종이를 사용하는 독특한 구조인데 종이에는 '죽음'과 '부정'이라는 두 개의 단어를 연상하게 하는 어지혜 작가의 그림이 인쇄돼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책이라 저작권료 자체는 비싸지 않았다. 덕분에 절약한 비용과 이윤의 상당 부분을 책의 완성도에 투자했다. 책을 읽다 보니 편집자가 겪었던 그간의 고충을 알겠다. 뒤로 갈수록 난해해서 읽기를 포기하는 독자가 많다. 이런 독자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지구를 떠나시면 안 됩니다."

태그:#죽음, #죽음의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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