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영화를 보면 매번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위기와 역경에 좌절을 겪은 주인공이 이를 극복해내고 결국 빌런을 무찌르는 장면이다. 이런 장면들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주변 인물들이 히어로에 굳건한 믿음을 보인다는 점이다. 흔히 액션이나 히어로물의 주인공은 믿음직스럽고 듬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어떠한 위기에서도 믿을 수 있는 '믿을맨'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낸다.
 
반면 그 누구도 믿음을 보이지 않는,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본인에게 확신이 없는 인물도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산다는 건 믿음과의 대결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가 끊임없이 누군가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이 맡은 일을 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모두가 히어로가 될 수 없듯 항상 모든 일에 성공하거나 능력에 자신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사회는 때로 히어로가 아닌 개인에게도 태도를 요구하곤 한다. 이런 분위기는 자신을 믿을 수 없기에 남도 믿을 수 없는, 그래서 하나의 실패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패배자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문제를 가져온다.

싱글맘으로 살던 어느날, 불쑥 찾아온 '믿음직스럽지 못한 동생'
 
 <유 캔 카운트 온 미> 스틸컷

<유 캔 카운트 온 미> 스틸컷 ⓒ 필름뱅크

   
<유 캔 카운트 온 미>(2001)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유명한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데뷔작이자 <어벤져스> 시리즈의 헐크로 유명 배우 반열에 오른 마크 러팔로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다. <유 캔 카운트 온 미>는 남동생을 신뢰하지 못하는 누나와 그런 누나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남동생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싱글맘 새미는 여덟 살 된 아들 루디와 어린 시절부터 살았던 마을에서 지내고 있다. 평생을 안정되고 편안한, 정석적이라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온 새미지만 몇 번의 부정을 저지르고 죄책감에 빠져 지낸다.
 
그러던 그녀 앞에 몇 달간 소식이 끊겼던 남동생 테리가 나타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고아처럼 지낸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다. 착실한 새미의 삶과 달리 테리의 삶은 자유분방하다. 혹시나 테리가 정신을 차리고 정착하기 위해 찾아왔나 했건만, 역시나 돈을 빌리러 왔다는 동생의 말에 실망하는 새미. 그럼에도 새미는 아버지가 없는 아들 루디에게 좋은 남성의 본보기를 보여줄 기대라고 생각해 동생을 집에 머무르게 한다.
  
 <유 캔 카운트 온 미> 스틸컷

<유 캔 카운트 온 미> 스틸컷 ⓒ 필름뱅크

 
하지만 테리는 사고를 반복해서 저지른다. 심지어 조카 루디를 새미의 전 남편에게 데려갔다가, 테리는 폭행시비에 휘말린다. 남매지만 테리는 새미와 완전히 다른 성향의 사람이다. 자유분방하고 유랑하는 삶을 추구하는 그는 누나가 자신을 이해하고 한 번이라도 믿음을 보여주길 바란다. 테리는 그저 루디를 그의 아버지와 화해시키고 싶었고, 결국 떠나갈 자신을 대신해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자라기를 원했다. 하지만 테리의 방식은 새미가 이해하기에는 정석적인 삶의 방식과 거리가 멀다.
 
어쩌면 새미에게 테리의 삶은 질투를 불러왔을 수도 있다. 새미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 너무 답답해서, 홀로 아들을 키우는 부담감 때문에 현재의 삶을 떨쳐내고 싶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생을 탓하며 믿음을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테리는 진심으로 새미에게 이야기한다. "한 번만 나를 믿어달라"(You can count on me)고. 비록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 정처 없이 떠도는 사고뭉치지만, 어디에선가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 달라고 말이다.
  
연극 오디션 중 스스로 실망한 남자, 그가 감독에게 한 제안은
 
 <비거 댄 더 스카이> 스틸컷

<비거 댄 더 스카이> 스틸컷 ⓒ Code Entertainment

 
테리가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믿음을 구했다면, 영화 <비거 댄 더 스카이>(2005)의 피터는 그보다 더 가까운 자신에게 믿음을 구한다. 극 중에서 연극 <시라노>의 남자주인공에 지원한 피터는 오디션 중 스스로의 연기에 낙담한다. 오디션 지원 이유를 묻는 감독에게 그는 '여자친구에게 차여서 충동적으로 지원했다'고 고백한다. 회사에서 너무나 평범하고 여자친구에게 차였어도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어 누나에게 위로받는 피터는 스스로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다.
 
그저 <시라노>의 대본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모두 들어있다는 이유로 과감하게 오디션에 지원한 피터. 하지만 이내 오디션을 보면서 자괴감에 빠지고 포기하려 한다. 감독은 놀랍게도 그런 피터를 주인공으로 발탁한다. 하지만 이 꿈과 같은 이야기는 동화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피터는 실수를 반복하고, 연극 상영 자체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어 피터는 주인공 배역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배역을 하나 달라'고 말이다.
 
'주인공 대신 단역이라도 배역을 달라'는 피터는 감독에게 오디션 첫날 만난 록산느 역의 그레이스가 그에게 해준 말을 전한다. '작은 배우는 있어도 작은 배역은 없다'는 말을 말이다. 피터는 그레이스의 한마디, 그리고 마이클과 키피 같은 무대를 사랑하는 배우들을 만나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세상에는 인생을 주인공처럼 살아가는 이들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피터는 '단역배우처럼 존재감은 작지만 자신이 맡은 역할을 묵묵히 해나가는 이들'의 가치를 알게 된다.
  
 <비거 댄 더 스카이> 스틸컷

<비거 댄 더 스카이> 스틸컷 ⓒ Code Entertainment

 
<시라노>의 주인공 시라노는 비록 크리스찬의 뒤에 숨어 지낸다. 자신이 사랑하는 록산느에게 크리스찬의 이름을 빌려 편지를 보내는 시라노는 사랑에 있어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절절한 사랑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피터는 비록 사랑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 뒤에서 자신의 감정을 절절하게 표현한 시라노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스스로를 믿지 못해, 또 당당하지 못해 무대 위에 서지 못했던 그는 무대 위에 서는 모든 이들이 역할에 관계없이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된다.
 
세상에 모든 이들이 마치 영웅과 같은 든든하고 듬직한 이들로 가득하다면, 역설적으로 영웅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보통의 존재들이 있기에 영웅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위기의 상황에 나타나는 게 영웅이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움직이는 건 보통의 존재, 바로 우리라 할 수 있다.

삶에 대한 믿음은 자신을 믿고 다른 이의 삶을 믿어주는 자세에서 시작된다. 비록 미덥지 못하고 답답하더라도 삶이란 무대 위에 작은 배역은 없다는 마음을 지닌다면 믿음의 새싹이 피어날 수 있음을 두 영화는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기자의 개인 블로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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