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들>(2016)과 <우리집>(2019)의 주인공은 단연 아이들이다. 윤가은 감독은 그간 한국영화에서 이야기의 한쪽 구석에 자리했던 아이들의 손을 잡고 중심으로 걸어 나왔고, 그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오롯이 담아오고 있다. 아이들의 세계라지만 동시에 감독은 "쭉 품고 있던 나의 이야기"라 고백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장편 데뷔작인 <우리들>과 <우리집>은 '우리'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이라는 것과 등장인물이 아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주제나 그 특징이 서로 다른 독립적인 작품이다. 전작을 통해 아이들의 미세한 심리를 관찰했던 감독은 <우리들>을 통해선 가족과 집의 존재 의미를 묻는다. 영화는 부모의 잦은 싸움이 고민인 12살 하나(김나연)와 잦은 이사로 친구들을 사귀지 못하던 유미(김시아)-유진(주예림)이 서로를 만나 함께 고민을 나누고 갈등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22일 개봉을 앞두고 윤가은 감독과 배우 김나연을 함께 만났다.
 
 영화 <우리집>의 촬영 현장. 윤가은 감독과 배우 김나연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영화 <우리집>의 촬영 현장. 윤가은 감독과 배우 김나연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 롯데엔터테인먼트

 
첫 만남, 그리고 반성문
 

시작은 2015년으로 거슬러 간다. 한참 <우리들>을 준비하던 윤가은 감독은 가정폭력에 괴로워하는 한 중학생의 이야기를 <소라>라는 제목을 붙여 품고 있었다. 그렇게 1년, 2년을 지나며 아동학대 부분이 빠지고 지금의 이야기로 서서히 형태를 잡아갔다.
 
주위에선 <우리들>에 이은 '우리 시리즈'를 이미 염두에 둔 게 아니냐 묻지만 <우리집>이라는 제목이 붙은 건 2017년 초 무렵이었다. "애초에 계획한 것처럼 얘기해야 할까요?"라며 윤가은 감독이 웃어 보였다. 제목을 정한 후 <우리들>에 출연했던 배우들을 등장시키기로 했다. "그때 그 친구들이 잘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나간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지난 언론시사회 때 윤 감독은 말한 바 있다.
 
"감독님과 첫 대화요? 2018년 3월이었나.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딱 하나 기억하는 게 평소에도 요리를 좋아하는지 물으셨어요. 전 '좋아한다. 미역국을 끓여봤다'고 했어요." (김나연)

 
<우리집> 속 하나의 소원은 온 식구가 한 식탁에 함께 밥을 먹는 것. 바쁜 업무로 집에 늦게 들어오기 일쑤며, 게다가 크게 싸우기까지 하는 엄마와 아빠를 위해 매번 하나는 밥상을 차려놓는다. 윤가은 감독은 작은 손에 진심을 담아 요리를 해 본 배우를 하나로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것. 엄마의 권유로 우연히 오디션장을 찾은 김나연은 자신이 평소 해 먹는 요리, 그리고 가족에 대해 또박또박, 꽤 자세히 말했다.
 
"혹시나 해서 제가 꼬치꼬치 물어봤어요. 나연 배우의 요리 얘기가 인상적이었거든요. 요리 과정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것도 놀랐고, 그 미역국이 엄마 생일 때 한 것이더라고요. 기특했죠. 실제로 나연 배우는 집에서 막낸데 식구를 관찰하고 그들의 반응을 하나하나 편하게 느끼고 있었어요. 아, 이 친구가 보기보단 많은 걸 느끼면서 살고 있구나 궁금했죠." (윤가은)
 
"처음 해보는 요리가 많았어요! 오므라이스도 먹고, 수박화채도 먹는 장면이 있는데 촬영하면서 음식 먹는 것도 처음이었고, 다 처음이었어요. 그게 다 경험이니까. 리허설 때 숙제로 그런 요리를 해보고 (촬영에) 들어갔어요. 제 키가 지금의 절반만 했을 때부터 엄마가 요리 할 때 옆에서 채소를 잘게 썰고, 반찬 가져다 놓는 걸 좋아했거든요. 제가 직접 재료를 썰고, 요리를 완성하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너무 좋아해서 꿈이 요리사였던 적도 있고, 배우도 하면서 요리도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김나연)
 
 
 영화 <우리집> 스틸컷

영화 <우리집>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우리들> 때 경험을 살려 윤가은 감독은 첫 만남부터 오디션, 그리고 현장 디렉션까지 고려한 일종의 수칙을 만들었다. '어린이 배우들과 함께 하는 성인분들께 드리는 당부의 말'이라는 제목과 함께 총 9가지의 수칙이 담겨 있었다. '어린이 배우를 프로 배우로 존중하기', '신체 접촉시 미리 알리기', '어린이 배우 앞에서 욕하지 않기', '외모가 아닌 행동을 칭찬하기' 등. 이 수칙 얘기가 화제가 될 때마다 윤가은 감독은 매우 민망해 하지만, 여태껏 한국영화 현장에서 볼 수 없던 좋은 시도인 건 분명하다.
 
"단편 때도 그랬고, 예전에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왕왕해서(윤가은 감독은 논술 강사 일을 하기도 했다-기자 말) 오래전부터 느낀 걸 정리한 거예요. 말로만 하면 날아가 버리니까. 또 저도 못 지킬 때가 많고, <우리들>이라는 장편을 겪으면서 새로 알게 된 게 많았죠. 배우에게 특히 아이들이다 보니 제가 실수하면 그게 참 괴롭더라고요. 뭘 써놓으면 저도 기억하기 쉽고, 새로 오신 스태프 분들도 파악하기 쉽고요. 제겐 그 수칙이 '앞으로 이렇게 하겠습니다'하는 반성문과도 같아요. 사실 이번에도 못 지킨 게 많아요." (윤가은)
 
이 말에 김나연이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했다. 그간 몇몇 단편 영화, 드라마 현장을 경험한 나연에게 직접 물었다. 분명 <우리집> 현장이 달랐는지. 그가 분명하게 답했다.
 
"제가 여태껏 나간 촬영 현장은 되게 빠듯하게 돌아가고, 제 분량이 끝나면 전 한쪽에 앉아 있고 그랬거든요. 근데 <우리집> 현장은 촬영이 끝나고 괜찮았냐 물어보시는 것도 많았고, 스태프 분들이 저희들에게 '많이 덥지?' 하면서 걱정도 해주셨어요. 수칙이 있다고 해서 보니 정말 우릴 위해 주시는구나 느꼈어요. 감독님은 잘 못 지킨 것 같다 하시는데 전 정말 다 잘 지켜진 것 같거든요. 너무 감사했어요." (김나연)
 

감독의 마음을 스태프들 역시 공유하고 있었다. 배우들 리허설을 준비하던 한 연출부 스태프는 직접 가정통신문 형식으로 배우들에게 준비해야 할 것을 정리해 전달하기도 했다고. "이 현장이 아이들 중심이라는 걸 애초부터 이해한 사람들이 많이 합류했다"며 윤가은 감독은 "제가 부탁한 것이 아니라 다들 아이들과 즐겁게 작업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우리집>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

"혹시나 해서 제가 꼬치꼬치 물어봤어요. 나연 배우의 요리 얘기가 인상적이었거든요. 요리 과정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것도 놀랐고, 그 미역국이 엄마 생일 때 한 것이더라고요. 기특했죠." ⓒ 롯데엔터테인먼트

   
마법과 같았던 순간들
 
사실 두 번째 장편을 찍고 개봉을 앞둔 과정에서 윤가은 감독은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장편 데뷔까지 걸린 시간들, 그리고 막상 차기작을 준비하면서까지도 본인이 택한 방식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도 희미해졌다. "한국에서 첫 영화를 만들고 개봉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다 보니까"라며 윤가은 감독은 말을 이었다.
 
"<우리들>을 만들기 전에도 만든 후에도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를 누가 보냐는 말을 꽤 들었어요. 그 영화에 대한 시장이 없다시피 하니 하지 말라는 말을 오래 들어왔는데 제 입장에선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일단 (차기작을) 빨리 찍자고 마음 먹은 후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 했어요. <우리들>은 초등학생들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포착되는지 보고 싶었고, <우리집>은 구조와 캐릭터가 있는 이야기를 배우들과 풀어가고 싶었죠. 관객으로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이고 싶었는데 여전히 고민입니다(웃음)." (윤가은 감독)
 

그런 마음들이 담긴 <우리집>. 감독과 나연, 그리고 기자가 서로 기억나는 장면과 순간을 나눠보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하나 아빠에게 술 먹자며 새벽에 전화하는 '주 대리'에게 아이들이 장난 전화를 걸어 욕 한 바가지를 선사하는 장면을 꼽았다. "주 대리 너 그렇게 살지 마!", "똥이나 많이 싸!" 등 참신하면서도 아이들 진심이 느껴지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원래 대사가 없는 신이었어요. 제가 전화번호를 누르고 유미(김시아)가 한마디, 유진(주예림)이가 또 한마디 하는 거였는데 예림이가 똥 대사를 하면서도 저랑 시아랑 너무 웃겨서 계속 웃었어요." (김나연)
 
"리허설 때도 예림이가 똥 얘길 많이 하더라고요. 그 단어가 강렬하게 있나봐요(웃음). 사실 실제로 전화를 걸게 했는데 그 대상이 제 어머니였거든요. 아이들이 곧 장난 전화할 거라 알려드린 뒤 아이들이 전화한 거죠. 전 나연이가 만든 대사를 좋아해요. '술은 니 친구들이랑 먹어!'(웃음)." (윤가은 감독)
 
"저는 아무래도 바닷가에서 유미랑 나눈 감정신이 남아요. 전까지는 하나와 유미가 부딪히는 게 없었는데 고민이 가장 많은 순간에 딱 마주친 거니까. 하나도, 유미도 힘든데 그걸 말로 다 하면서 풀어진 것 같아요. 촬영 전날 걱정이 많았어요. 이런 감정 표현을 하는 게 처음인데 진짜 하나라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나? 내가 잘 해낼 수 있나 고민이었어요. 근데 당일 연기하다보니 감정이 올라오더라고요. 어쩌다 올라왔는지 모르겠는데 저절로 그렇게 됐어요. 유미랑 하나랑 서로 감정을 쌓고 쌓고 했으니까 그런 것 같아요." (김나연)
 
"전 사실 제가 뭘 안 한 장면이 좋아요. 제가 개입하거나 이끈 장면이 아닌 배우들 스스로 만들어간 장면들이죠. 마트에서 장 보는 신이라든가, 물놀이하는 신 등이 그래요. 제가 제 영화를 볼 때 되게 부끄러운데 그런 장면을 볼 땐 어깨가 좀 펴진다랄까. 억지로 제가 한 게 아닌 아이들이 만들어준 장면을 너무 좋아해요." (윤가은 감독)

 
 영화 <우리집>에 출연한 배우 김나연.

"수칙이 있다고 해서 보니 정말 우릴 위해 주시는구나 느꼈어요. 감독님은 잘 못 지킨 것 같다 하시는데 전 정말 다 잘 지켜진 것 같거든요. 너무 감사했어요." ⓒ 롯데엔터테인먼트

 
"아이 영화? 의무감 아닌 제 취향일 뿐"
 

영화 속 하나처럼 김나연에게도 실제 오빠가 있다. 반 농담으로 오빠와 관계를 물으니 웃으며 한숨부터 쉰다. 이제 고3인 오빠가 다른 집 오빠들처럼 동생을 잘 안 챙겨주는 게 불만 아닌 불만이라고.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 언니 옷을 입을 수도 있고, 어른 되면 친구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라고 말할 땐 영락 없는 14살 또래의 모습이었다. 가족 영화를 하며 스스로에게도 가족의 존재 이유를 던지고 있는 걸로 보였다.
 
"처음에 전 가족이라면 무조건 완성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하나 역을 맡았잖아요. 그러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이혼하든, 안 좋은 일이 있든 그건 가족의 실패가 아니라 어쩌면 더 좋은 과정을 거쳐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안 싸우고 항상 화목한 게 좋은 가족이기보다는 가끔 싸워도 아니면 헤어져 살더라도 서로 행복할 수 있으면 좋은 가족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완벽하게 모여 있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구나 느껴요. 완벽하진 않아도 행복할 순 있을 것 같아요." (김나연)
 
"제가 어릴 때 겪은 문제들이 성인이 된 이후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아 있더라고요. 가족의 모습을 스스로 정의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 있는 것 같았죠. 시나리오를 고쳐가며, 또 지금의 배우들이 들어오면서 가족을 하나의 형태로 정리할 수 없다는 걸 느낍니다. 지금 이런 모습이지만 이후엔 바뀔 수도 있는 게 가족 같아요. 시나리오 쓰면서 제 힘으론 가족을 정의할 수 없음을 깨달았어요. 하나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가 제겐 큰 숙제였거든요. 하나의 마음이 튼튼해지고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만들수록 모르겠고... 이렇게 변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을 받아들인다면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 생각하게 됐어요." (윤가은 감독)
 
국내에선 거의 독보적으로 아이의 세상을 바라보고 영화로 제시하고 있는 윤가은 감독. 꼭 아이들의 세계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잠시 생각 후 그가 내놓은 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냥 제 취향인 것 같다는 것 생각이에요. 제가 아이들 세계에 관심이 많듯, 누군가는 사랑 이야기, 누군가는 케이퍼 무비를 좋아하시죠. 제 속에 맺힌 게 많은 느낌이랄까. 실제로 아이들 이야길 해주는 경우가 많이 없잖아요. 영화에선 특히 그렇죠. 사실 청소년 문학은 많거든요. 문학에선 아이들이 자신과 접점이 있는 이야기를 찾을 수 있는데 영화에선 밀려나 있어요.

사회 최약체인데 우리가 같이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근데 제가 재밌으니까 하는 거죠(웃음). (제가 경험한) 옛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제의 이야기를 오늘 할 수 있게 된 거랄까요. 어젠 화나거나 혹은 힘이 없어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면 오늘은 좀 차분하게 할 수 있겠다라는. 멀리 있는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예요. 제겐." (윤가은 감독)
 
 
 영화 <우리집> 스틸컷

영화 <우리집>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기에 감독의 차기작에도 관심이 몰릴만하다. "약간 쉬고 싶긴 한데..."라며 윤 감독은 옆에 있던 김나연에게 물었다. "감독님이 충분한 휴식을 취했으면 좋겠다"며 "왜냐면 촬영 때 감독님이 끼니를 제대로 못 챙겨 드셨는데 영양 보충하면서 1년 팍 쉬시고 다음 영화를 팍! 찍으면 좋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웃음)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이들 세계로 들어가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게 여전히 있거든요. 기회가 또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아직 구체화 된 건 없어요. 친구나 가족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이돌 팬으로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연애 이야기일 수도 있죠." (윤가은 감독)
우리집 김나연 윤가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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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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