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어난 검술실력과 문학적소양에도 불구하고 콤플렉스인 큰 코 때문에 늘 사랑 앞에 주저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시라노>가 2017년 초연보다 한층 발전된 완성도를 자랑하며 무대에 올랐다.

오는 10월 13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시라노>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큰 코를 지닌 남자 시라노와 그의 사랑을 받는 록산, 록산이 사랑하는 크리스티앙, 록산을 사랑하는 드기슈가 만나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시라노 역에 류정한, 최재웅, 이규형, 조형균, 록산 역에 박지연, 나하나, 크리스티앙 역에 송원근, 김용한, 드기슈 역에 조현식, 르브레 역에 최호중, 라그노 역에 육현욱이 출연한다.

실존인물인 시라노 드 벨쥐락을 모티브로 해 만들어진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 <시라노> 국내 초연은 배우 류정한의 첫 프로듀싱 작품이자, 프랭크 와일드혼이 음악을 담당하는 등 화려한 첫발을 내딛어 많은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류정한, 홍광호, 김동완 등이 출연한 화려한 스타 캐스팅에 비해 작품 완성도에서는 아쉽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번 2019년 재연은 초연의 아쉬움을 상당히 씻어냈다. 초연 당시 평면적인 캐릭터로 비판받던 여주인공 록산의 캐릭터가 강화되고 작품과 톤앤매너를 균일하게 가져가며 극의 흐름이 끊기지 않게 됐다.

초연 당시 록산은 소위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 속성을 지닌 캐릭터로 첫눈에 반한 크리스티앙을 대책 없이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밤의 어둠에 속아 시라노의 사랑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전쟁터에 몰래 숨어들어오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시라노가 그에게 보내는 헌신과 열정 역시 무게감을 갖기 힘들었다. 하지만 재연에서는 크리스티앙을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직접 해내는 인물로 변해 시라노라는 강렬한 캐릭터 못지않게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게 됐다.
 
 뮤지컬 <시라노> 공연 중 한 장면.

뮤지컬 <시라노> 공연 중 한 장면. ⓒ CJENM

 
시라노와 선의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크리스티앙과 극 중 악역으로 등장하던 드기슈의 역할과 비중도 변경돼 시라노와 록산의 관계에 무게감을 실었다. 덕분에 한층 더 이야기의 구성이나 집중도가 높아져 관객들에게 뮤지컬 <시라노>의 매력을 더 잘 전달하게 됐다. 왜냐하면 뮤지컬 <시라노> 최대의 매력은 극 중 대부분의 넘버와 장면을 소화하며 무대를 종횡무진 활약하는 시라노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초연에서는 록산이 뚜렷한 색을 보여주지 못하는 가운데 드기슈와 크리스티앙까지 각자의 매력을 보여주는데 집중해서 초점이 분산됐다면, 재연은 시라노와 록산의 이야기로 뚜렷하게 포커스가 맞춰진 덕분에 사랑을 위해 사랑을 숨겨야하는 시라노의 깊은 절망부터 위기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함, 사모하는 여인을 두고 고민하는 사랑스러움 등 다양한 매력을 더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 사이에 드기슈, 크리스티앙, 르브레와 라그노 등도 짧게 치고 빠지며 도리어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내려놓음으로써 빛난 셈이다.

전체적인 큰 줄기를 손대지 않으면서도 이런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새로이 연출과 각색에 참여한 김동연 연출의 공이 아닐까 싶다. 물론 록산이 재연에서 보여주는 변화가 초연과 비교해 진정으로 입체적인가 하면 의문의 여지가 있다. 초연과 비교했을 때 장면 자체가 새롭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 해당 장면에 대사나 행동을 조금 추가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초연에서 드기슈와 결혼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그냥 대사로 이뤄졌다면 재연에서는 칼싸움을 하며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시라노를 만나 처음으로 크리스티앙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굳이 '여성 문학지를 만들고 있다'는 대사를 추가하는 식이다. 이런 변화는 자칫하면 진정으로 캐릭터를 변화시킨 모습이 아니라 작은 설명을 덧붙이는 정도로 비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 시도는 관객의 상상력을 빈곤하게 만들기보다는 무대 위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을 오히려 더 명확하게 했다. 무대에 직접 보여지지 않는 이야기나 관계에 대한 상상력을 불어넣었으니 나무가 아닌 숲을 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초연에서 상당히 문학적인 언어들이 많이 사용된 것에 비해서, 재연에서는 말의 맛이 다소 사라져 투박한 느낌이 드는 점이나, 여전히 전체 톤앤매너에서 따로 벗어나있는 달나라 토끼 씬의 존재는(비록 원작이 그런 내용이라 해도) 여전히 아쉽다. 그러나 라이선스 작품이기에 큰 변화를 갖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재연에서 상당한 발전이 보인만큼, 이후 행보에 기대를 가져봐도 좋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서정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twoasone/)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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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문화, 연극/뮤지컬 전문 기자. 취재/사진/영상 전 부문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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