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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광복의 그날 우리나라의 풍경은 어땠을까. 1945년 8월 15일 풍경을 짐작해볼 수 있는 광복절 관련 자주 볼 수 있는 사진들이 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만세 부르는 장면을 담은 사진도 그중 하나. 일왕의 항복 방송에 비로소 해방됐음을 알게된 우리 국민들의 감격에 찬 모습이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그러다 며칠 전인 지난 14일 오전, 한 라디오 방송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었다.

"…실제로 우리 한국에서는 일본 천황이 항복한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몰랐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라디오를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일본 천황의 라디오 방송이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한자가 섞여 있는데다가, 그당시 쓰던 일본어가 아닌 일본 황족어이기 때문에 항복 선언을 들었어도 사실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극소수였다고 해요. 

또한, 일본 천황은 항복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종전 조서'라는 명칭을 씀으로써 연합군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 이 정도의 의사만 밝혔다고 합니다. 그러니 '항복선언을 듣자마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이렇게 알려져 있기도 한데, 사실상 잘못된 표현인 것이지요. 그럼 언제 알게되었는가. 다음날 서대문 형무소와 마포 형무소의 정치범들이 석방되면서 우리 국민들도 해방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라디오에서 들은 것을 좀 더 이야기하면, 교과서에 실린 광복절 만세 부르는 사진은 현재 서울서부지방법원 자리에 있었던 마포형무소에서 찍은 것. 마포형무소는 일본이 설치한 형무소로 서대문 형무소와 함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뤘던 독립유적지다.
 
 <한 컷 한국 현대사> 책표지.
 <한 컷 한국 현대사> 책표지.
ⓒ 인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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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을 통해 추정해보는 1945년 8월 15일의 풍경이다. 사진은 찍는 순간 어떤 기록이 된다. 그래서 사진 한 장은 종종 어떤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존재인 사진으로 지난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다.

<한컷 한국 현대사>(인문서원 펴냄)가 그런 책이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거칠고, 많은 일들이 있었던 1910년부터 유신시대인 1971년까지의 중요한 사건들을 돌아본다.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사진은 35장이다. 사진 한장에 짧지 않은 글 한 편씩이다. '일본 항복 하루전'이란 제목의 글 첫머리에 실린 이 사진은 아마도 항복 선언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지 못하면 이해가 쉽지 않을 사진이기도 하다.
 
1926년 즉위한 쇼와 덴노는 군부에 기울어진 인물로 1925년 황태자로 섭정을 하며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일본 민주주의를 탄압한 악명높은 파시스트였다. 덴노가 군부에 기울어진 상태에서 1929년 대공황과 세계적인 군축협상은 군부의 힘을 더욱 강화시켰다. 온건파의 어떠한 노력도 일본 경제를 구하지 못하는 속에서 마침내 1936년 2·26사변을 계기로 군부가 확고한 주도권을 잡았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일본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8년 간의 장기전면전의 수렁에 빠뜨렸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가 "미국과 싸운다면 6개월 정도는 설쳐댈 수 있습니다만…."이라고 말했듯,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수세에 몰렸다. 조기 종전을 주장하는 야마모토의 주장은 육군 강경파에 거부 당하고, 1943년 야마모토가 전사하면서 전쟁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101쪽)
 
 "1945년 8월 15일 정오. 쇼와 덴노의 항복 선언을 들은 후 어느 일본인 가정이 통곡하며 덴노와 일본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이다. 덴노의 항복 선언을 듣고 통곡하는 일본인들, 그들의 전쟁은 끝났을까? 그렇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쇼와 덴노의 항복 선언을 들은 후 어느 일본인 가정이 통곡하며 덴노와 일본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이다. 덴노의 항복 선언을 듣고 통곡하는 일본인들, 그들의 전쟁은 끝났을까? 그렇지 않았다."
ⓒ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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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 선언 당사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본 천황 중 가장 낯익은 이름일 쇼와 덴노. 그가 즉위할 무렵 일본은 이미 만성적인 경제불황이 시작됐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승전국으로 패전국 독일이 중국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이권을 넘겨받기로 했으나 이에 반발해 일어난 5·4운동으로 좌절, 1차 대전에 지출한 전쟁비용을 충당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중화학공업에 과도하게 투자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에 무리한 전쟁과 대륙 진출을 반대해왔던 온건파들은 경제불황을 극복하려면 군비지출을 줄이고 산업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로 군부 강경파들과 온건파 및 군산복합체의 갈등이 심해졌다. 그럼에도 군부와 쇼와 덴노에 의해 전쟁은 계속됐고 패전까지 가게 된 것이다.

글의 부제는 '일본 군부 강경파 쿠데타 실패와 덴노의 면죄부'. 글은 항복 선언 하루 전인 8월 14일 당시 강경파 일부 군부에 의해 모의, 실행직전까지 갔으나 미수에 그쳤다는 군부 쿠데타 이야기로 시작한다.

'병력 부족과 덴노 및 군 수뇌부의 설득으로 결국 쿠데타를 포기하고 자살하거나 항복하면서 미수로 그쳤다'는, 한 일본 작가에 의해 <일본의 가장 긴 하루, 운명의 8월 15일>이라는 논픽션 소설로 발표됐으며, 영화로도 제작해 그 사실을 많은 일본인들에게 알린 그날의 쿠데타 이야기로 말이다.
 
실제로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덴노의 은혜"라고 선전했다. 군부의 본토 결전을 막고 항복을 결단해서 1억 일본인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 그 속에서 일본인들은 덴노에 대한 사죄로 할복하거나, 덴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서 오늘의 일본 경제를 건설했다는 의식이 형성되었다. 전후 일본의 부활은 덴노의 덕이라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2003년 일본 언론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덴노에 대한 호감이나 존경을 가진 자들이 응답자의 60% 이상이었다, 21세기 일본의 덴노에 대한 인식은 이런 이데올로기 속에서 현재도 공고히 존재하는 것이다.

일제 침략은 덴노에 의해 이루어졌다. 덴노는 전범이며 일본은 덴노제가 폐지되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 보수 우익은 1945년 8월 15일부터 덴노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까지 성공해왔다. 8월 14일의 숨가쁜 갈등은, 8월 15일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106쪽)
 
어떤 과정을 거쳐 항복 선언 방송이 녹음되고 방송까지 갈 수 있었는가. 누구보다 전쟁을 지지했던 쇼와 덴노는 패전의 책임으로부터 어떻게 면죄부를 갖게 됐을까. 책에 의하면 항복 직전 당시 강경파 군부인 도조 히데키 등은 군사정권 수립을 위한 쿠데타를 공공연히 선동했었다고 한다. 그들이 선동한 쿠데타는 정말 그들만의 순수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을까.

책은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항복마저 '덴노의 1억을 살린 은혜'로 조작한 끝에, 항복 선언을 들은 후 덴노와 패전국 일본을 위해 통곡하고 기도하는 한 일본 가정의 모습.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항복을, 항복과 전후 일본에 덴노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여전히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한다.

글을 쓰는 와중 제74회 광복절 날 일본 소식이 전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했다는. 아베 신조가 그 야스쿠니 신사에 예물을 보냈다는 내용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 우리의 광복절에 그들이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하는 것은 전쟁에 희생된 군인들에 대한 추모 정도로 지레짐작했었다. 다만 추모일까. 얼마나 안일한 역사인식인가. 무지가 부끄럽다.
 
 "1919년 3월 25일의 시흥보통고등학교 7회 졸업식 사진이다. 제복을 입고 칼을 찬 교사에게 배우는 학생들. 고등학생이었다면 오히려 반감을 샀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보통학교, 오늘날의 초등학교 학생들이다. 어린 마음에 제복과 칼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어지면, 성장해서도 제복과 칼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제복'을 통해 지배하려 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더 큰 '야망'이 있었다."
 "1919년 3월 25일의 시흥보통고등학교 7회 졸업식 사진이다. 제복을 입고 칼을 찬 교사에게 배우는 학생들. 고등학생이었다면 오히려 반감을 샀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보통학교, 오늘날의 초등학교 학생들이다. 어린 마음에 제복과 칼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어지면, 성장해서도 제복과 칼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제복"을 통해 지배하려 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더 큰 "야망"이 있었다."
ⓒ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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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몇번이고 들춰봤던 사진들은 ▲ 시흥보통공립학교의 7회 졸업식 사진 속 칼 찬 교사 모습 ▲ 1919년 2월 9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일본식 장례의식인 봉고제를 치르는 고종황제의 장례식 한 장면 ▲ 탄광으로 끌려간 징용 노동자가 숙소 벽에 쓴 낙서 ▲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후 말년을 보내던 '70대 어느 날의 홍범도'로 추정되는 사진 ▲1930년대 멋진 양장을 한 여성과 양복을 입은 남성이 호텔 카페에서 밝게 웃으며 커피를 마시고 담소하는 사진 등 일제강점기에 해당하는 1부와 2부 사진 10장. 이들 사진들은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까? 우리 근현대사를 쉽게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들이다.

한 컷 한국 현대사 - 빛바랜 한 장의 사진이 품고 있는 속 깊은 역사, 그 순간의 이야기

표학렬 (지은이), 인문서원(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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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