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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여자친구는 서로 다른 국적을 갖고 있다. 나는 한국인, 여자친구는 싱가포르인이다. 1년 반째 교제중인 우리는 작년 겨울 서울 소재 어느 쉐어하우스에서 만났다. 입주자들은 반절 이상이 외국인으로 대부분 인턴이나 어학 연수를 위해 한국에 들어와있었다. 여자친구도 한 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위해 한국에 온 케이스였다.

한달쯤 먼저 하우스에서 생활을 시작했던 나는 이미 어느 정도 하우스 분위기에 적응을 마친 후였다. 당시 나는 대만인 친구와 2인실을 함께 쓰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인턴으로 일하기 위해 온 친구 둘, 어학원에서 일본어 강사를 하던 일본인 친구 한 명, 그 외 이탈리아, 스위스, 홍콩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었다. 

하우스 생활을 시작하기 전 가졌던 걱정들이 많았다

여자친구도 나도 하우스에서 다른 입주자들과 평생 간직할 만한 소중한 추억들을 쌓을 수 있었다. 나중에 함께 하우스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며 깨달았던 것은 우리 모두 하우스 생활을 시작하기 전 공통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각자의 국가에서 같은 국적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맺는 인간관계도 우리를 피곤하고 지치게 만들 때가 많은데, 다른 국적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는 더 힘들지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불필요한 걱정들이었으나, 당시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이 가질 만한 생각이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인들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소한 어조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오해는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한국어의 장점 중 하나인 풍부한 표현력은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하는데, 에둘러 우회하는 표현이 가능하여 서로에게 눈치를 주고 눈치를 보는 상황들이 연출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언어적 특성은 사실 부차적이다. 개인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한국 문화 속에서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마지못해 내리게 되는 선택과 결정들이 많아지고 그렇게 한걸음 물러날 줄 아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점점 더 피곤한 곳이 된다.

여자친구가 싱가포르에서 인간관계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과도하게 치열한 경쟁 생태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인당 GDP가 거의 6만불에 육박하는 싱가포르는 성경 속 다윗과 같은 국가이다. 작지만 강한 나라 싱가포르는 리콴유 전 총리의 훌륭한 리더십 아래에서 과거 약소국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서구에서도 인정하는 세계 최대 금융 중심 국가 중 하나로 우뚝 섰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발전사가 그러하듯 바깥에서 볼 때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도 그것의 주인공들의 입장에선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여자친구가 다니던 싱가포르의 난양공대(NTU). 싱가포르 여행 중 촬영한 사진이다.
 여자친구가 다니던 싱가포르의 난양공대(NTU). 싱가포르 여행 중 촬영한 사진이다.
ⓒ 김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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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고 간절한 노력과 희생,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으로 점철된 이야기들, 한국인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이야기들이 싱가포르 밖으로는 성공 신화로, 안으로는 자랑스럽지만 동시에 가슴 아픈 사연들로 읽혀지고 있다.

급속한 발전을 이룬 아시아 여느 다른 국가나 똑같이 싱가포르도 사회보장시스템이 취약하여 국민 모두가 자기 안위와 궁극적 생존을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작은 영토에 필연적인 부족한 자원은 상황을 더욱 극단적으로 만든다. 가까운 과거에 맛보았던 성공 경험은 싱가포르 국민들을 멈추지 않고 달리도록 자극하는데 다른 여러 조건과 더불어 이것은 그들의 행복의 조건과는 관련이 없다. 이와 같은 경쟁 시스템 아래에서 정직하고 건설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여자친구는 싱가포르인으로서, 자기 나라에 대해 비슷한 태도를 갖는다. 하우스에서 만난 프랑스 친구들은 프랑스에 대해, 일본 친구들은 일본에 대해, 그리고 대만 친구나 이탈리아 친구도, 이 모두가 자기 나라에 대해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일본에서의 삶에 질려 한국에서 2년째 체류하며 일본어 강사로 일하고 있는 일본인 친구를 통해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엿볼 수 있었다. 또 어린 시절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길게는 1년 짧게는 6개월 정도 한국을 방문하며 "난 한국이 가장 좋아"라고 말하는 프랑스 친구를 통해 유럽에 대해 한국인들이 갖는 문화적 열등감과 낭만적 동경심에 대해 성찰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한국인들 상당수가 한국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로 접근한다.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 현재 이곳에서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면, 자연스레 멀리 있어 '덜 선명해 보이는' 장소들을 동경하기 마련이다. 내가 만난 일본인 친구도 그랬고, 프랑스 친구도 그랬다. 다 그렇다.

어쩌면 이미 잘 알아 예상되는 것들에 대해 경멸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방에 대한 예측이 쉽다는 것은 반대로 상대방이 내게 갖는 기대의 유형 또한 일정하며 내가 자유로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반경이 그렇게 넓지 않다는 것이다. 그 좁은 선택의 공간 속에서 우리 모두는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다.

한국에서 지내며 부여 받은 역할과 규범들이 일본에 가면, 프랑스에 가면, 혹은 다른 어딘가로 가면 더 이상 우리의 생각과 몸을 옭아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머지 않아 우리가 이방인으로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규칙들이 존재함을 깨닫고 결국 한국에서 견딜 수 없어 피해왔던 것들이 다시 우리를 괴롭히기 시작할 것이다.  

하우스 생활이 화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우스는 단체생활에 필요한 양보와 타협은 물론이며 서로 다른 국적과 문화에서 비롯되는 다름에 대한 포용력까지 요구되는 장소였다. 이렇게만 두고 보면 하우스에서 갈등과 마찰이 많이 생길 것 같으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단체생활을 자진해서 하겠다고 입주한 사람들이라는 점과,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어울려보려는 호기심과 개방성이 미리부터 불관용과 비타협의 자세를 차단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우스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만나 함께 살아가는 작은 섬 같은 곳이었다. 어떤 사회규범도 우리를 옭아매지 않았으며 우리는 어떤 커다란 공동체의 일원이기 이전에 우리 자신으로 먼저 존재할 수 있었다. 서로를 예측이나 계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서로의 의도를 가늠하지 않았다. 예상할 수 없어서 규정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열린 마음과 미소로 다가가고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똑같은 마음과 표정으로 환대해주었다.

미지의 대상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고 환대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하우스의 존재 방식을 볼 때 당연했다. 국적은 달라도 짓는 미소는 같았다. 같은 농담에 같이 웃음을 터뜨리며, 스피커에 연결된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고, 다같이 평상에 둘러 앉아 술을 마시며, 각자의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혹은 비밀스러운 경험들이나 감정들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간혹 새벽 늦은 시각까지 자리에 남아 인생에 대한 열띤 철학적 논의를 펼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서로와 주고 받을 수 있었다.
 
 싱가포르와 한국 국기, 그 외 다양한 나라의 국기들. 올림픽이 열리던 평창의 어떤 곳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싱가포르와 한국 국기, 그 외 다양한 나라의 국기들. 올림픽이 열리던 평창의 어떤 곳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 김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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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친구는 하우스 생활 초기 아무도 자신을 모른다는 생각에 큰 자유감을 느꼈다고 한다. 도피성 해외여행을 떠나는 한국인들에게서 흔히 듣는 말이다. 외국에서 받는 해방감과 자유감, 그리고 그 반대에 놓인 억압과 부자유. 나 자신이 한국땅 밖에서 가졌던 감정과 생각들, 그리고 하우스에서의 경험 등에서 돌이켜볼때, 어찌됐든 누구나 자기다울 때 가장 행복한 것이다.

행복의 조건은 멀리 있지 않다. 하지만 당연히 인정하는 바, 그 조건을 이루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종종 머릿속에 그려 왔던 저 먼 이국땅에 있을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태그:#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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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4학년 재학중 독서문화콘텐츠 사회적기업 쿱(KOOB) 소속 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