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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은 고 김학순(1924~1997)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중 최초로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날이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세계 최초로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며 자신이 실존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밝혔다. 1988년 윤정옥 교수가 '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처음 알린 지 3년만에 나온 첫 번째 생존 피해자 증언이었다.

할머니의 증언 이후 전국의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어 각자의 피해사실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위안부' 피해 증언을 대한민국 최초의 '미투 운동'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2012년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8월 14일을 세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로 지정했다. 정대협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여성인권단체들은 2013년부터 매년 8월 14일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다양하고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광주에 6개의 '위안부' 기림비는 모두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에 탄생했다. 광복 제 70주년을 하루 앞둔 날이자 제 3회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인 2015년 8월 14일에 세워진 기림비 '나비의 소원'에 이어 2년 뒤인 2017년 8월 14일 광주광역시 5구에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됐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지만 그 모습이 각기 다르다.

'나비의 소원' 평화비
  
 나비의 소원 평화비
 나비의 소원 평화비
ⓒ 김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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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청 앞에 세워져 있는 광주 평화비의 이름은 나비의 소원이다. 이병창 시인의 시 '나비의 소원'의 시비가 소녀와 함께 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나비가 앉아있고 왼손은 옷고름을 꼭 잡고 있다. 광주시민단체인 '광주나비'는 매달 첫 수요일 정오마다 기림비 앞에서 수요집회를 열고 있다.

못다 핀 꽃을 피우는 광주 광산구 평화의 소녀상
  
 광주 광산구 평화의 소녀상
 광주 광산구 평화의 소녀상
ⓒ 김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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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광산구 평화의 소녀상은 나상옥 작가의 작품으로 치맛자락을 불끈 쥔 오른손은 한과 분노를 상징하고 앞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간절히 희망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소녀상 뒤에 '못다 핀 꽃을 피우리라'라는 문구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광주 광산구민의 의지가 느껴져 방문객의 마음을 더욱 숙연하게 만든다.

광산구의 어등산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했던 호남의병의 최대전적지다.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광산구문화예술회관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이 운영했던 호남 최대의 정미소가 있던 자리다. 당시 인근에 위치한 동양척식회사 광산지소를 통해 농민들을 수탈했던 잔혹한 역사의 현장이다.

광주의 동구 평화의 소녀상
  
 광주 동구 평화의 소녀상
 광주 동구 평화의 소녀상
ⓒ 김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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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동구 평화의 소녀상도 광산구 평화의 소녀상과 마찬가지로 나상옥 작가의 작품이다. 하지만 그 생김새는 다르다. 동구 평화의 소녀상은 봇짐을 품에 안고 깊은 생각에 잠겨 고향을 생각하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구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 있는 금남로 공원은 1960년 3.15 의거가 있었던 장소이자 4.19 민주혁명이 최초로 시작된 장소다.

진실을 기록하는 광주 서구 평화의 소녀상
  
 광주 서구 평화의 소녀상
 광주 서구 평화의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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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호 작가의 재능기부로 광주광역시 서구청 앞에 세워진 광주 서구 평화의 소녀상은 펜과 종이를 쥐고 있다. 왜곡과 무관심에 맞서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결연한 자세다. 다른 소녀상과 달리 두 의자를 놓지 않고 긴 의자를 놓아 나란히 앉아 아픔을 공감할 수 있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제막식에는 양금덕 할머니와 오경애 할머니가 참여했다. 1944년 5월, 당시 나주 대청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양금덕 할머니는 일본에 가면 돈을 벌면서 중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다는 일본인 교장의 말에 속아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향했다. 이 후 할머니는 18개월 동안 쉬는 날 없이 매일 10시간이 넘는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는 1999년 3월 근로정신대 할머니 7명과 함께 일본 정부 및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진행했지만 일본 법원은 기각했다. 그러다 후생연금에 가입했었다는 사실이 증거로 드러나자 일본 사회보험청은 99엔(약 1000원)을 지급했다. 양금덕 할머니와 오경애 할머니는 당시 일명 '99엔 소송'의 당사자다. 2018년 11월 대법원은 양금덕 할머니를 비롯해 근로정신대 피해자들과 유족에게 5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아직 이행되지는 않고 있다.

광주 북구 평화의 소녀상과 학생의 날
  
 광주 북구 평화의 소녀상
 광주 북구 평화의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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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북구청사에 위치한 북구 평화의 소녀상은 최재덕, 정진영 작가의 작품으로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오른손을 높이 뻗어 평화를 상징하는 새를 날려 보내고 있다. 왼손과 발자국은 광주시민과 동행하고자 하는 염원을 표현했다.

광주 북구에 위치한 제일고등학교에는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이 있다. 1929년, 열차에서 일본 남학생이 통학하는 조선 여학생을 희롱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과 일본 교육당국이 가해자인 일본인 학생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자 이에 분노한 광주 지역의 학생들은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식민지 교육제도 철폐를 외치며 조직적인 시위를 시작했다.

일본은 광주에 휴교령을 내리고 시위에 가담한 학생들을 구속했다. 하지만 학생 시위에 일반 시민들이 가담하면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학생이 주도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3.1운동 이후 전개된 최대 규모의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참가학생은 5만 4000여 명이고 1462명이 체포됐다. 2330명의 학생은 무기정학을 당했고 582명이 투옥됐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11월 3일은 '학생의 날'로 지정되었다.

광주 남구 평화의 소녀상과 이옥선 할머니
 
 광주 남구 평화의 소녀상
 광주 남구 평화의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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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남구 평화의 소녀상은 이이남 작가가 제작했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옥선 할머니의 16세 소녀 시절과 92세인 2017년 현재 모습을 표현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16세의 소녀가 당당히 서있는 92세 할머니가 되도록 역사는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할머니와 소녀가 함께하는 모습이 제대로 해결된 것 없이 흘러가버린 긴 세월을 느끼게 만들어 보는 이의 슬픔을 더한다. 미디어 아티스트인 이이남 작가는 이 소녀상에 '진실(Truth)'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1927년 부산에서 출생한 이옥선 할머니는 1942년 7월 29일 열다섯 살의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가 되어 지옥 같은 3년을 보냈다. 이옥선 할머니는 1945년 해방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 머물다 2000년 6월, 조국을 떠난지 58년 만에 귀국했고 이듬해 국적을 회복했다. 이옥선 할머니는 2002년 미국 브라운대 강연을 시작으로 해외에서도 활발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참상을 알리고 있다. 영화 <귀향>의 실존 인물이며 장편 만화 <풀>도 이옥선 할머니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광주 남구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양림동 지역은 펭귄마을이 있어 광주시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지역에는 광주 3·1운동을 이끌었던 수피아여고가 있다. 1919년 3월 10일 광주 3.1만세운동에 앞장서서 독립을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 옥고를 치른 2명의 교사와 21명의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길이 기념하기 위해 1995년 5월 10일 동상을 건립했다.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수피아홀에서 치마를 뜯어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고 3월 10일 수피아 전교생이 숭일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서까지 행진했다.

광주 남구 평화의 소녀상 이외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을 특정한 기림비도 있다.

남원 평화의 소녀상과 길원옥 할머니
 
 남원 평화의 소녀상
 남원 평화의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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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평화의 소녀상은 특별히 '일본 땅을 다 줘도 나를 13세 나이로 되돌릴 수 없다'고 말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를 모델로 하고 있다. 길 할머니는 13살과 15살에 두 번이나 위안소로 끌려간 기구한 삶을 살았다.

길원옥 할머니는 2017년 8월 14일 90세의 나이에 노래 15곡이 담긴 음반 '길원옥의 평화'을 발표하며 어렸을 적 꿈이었던 가수로 데뷔했다. 이 수록곡 가운데 하나가 <남원의 봄 사건>으로 그의 대표 애창곡이다. 길원옥 할머니는 전국 곳곳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에 '평화비' 문구를 직접 쓰기도 했다. 할머니는 지금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과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외치며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남원 평화의 소녀상은 길원옥 할머니의 키와 같은 158cm이다. 소녀의 얼굴은 실제 길원옥 할머니의 젊었을 적 사진을 토대로 길원옥 할머니의 13세 때 무렵의 얼굴로 제작했다. 소녀상 뒤에는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이 발자국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인 길원옥 할머니의 발을 직접 떠서 만들었다. 할머니의 발자국 뒤에 있는 나비떼는 일본군 '위안부'로 희생되어 돌아오지 못한 20만 피해자들을 의미한다.

남해 평화의 소녀상과 고 박숙이 할머니
 
 남해 평화의 소녀상
 남해 평화의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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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소녀상은 1938년 남해의 어느 바닷가에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녀 옆에는 그가 강제로 끌려갔던 바래현장에서 발견된 호미와 소쿠리가 있다. 조개를 캐다가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잔혹한 역사의 증거품이다. 어깨 위에 새를 올린 소녀는 두 손에 동백꽃을 들고 먼 곳을 바라보고 서있다. 남해 평화의 소녀상은 당시 생존해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숙이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박숙이 할머니는 당시 "니도 숙이가? 내도 숙이다!"라며 첫인사를 나눴다고 전해진다.

소녀상 왼편에는 '숙이나무'라 불리는 동백나무가 있다. 동백나무는 박숙이 할머니가 평소에 좋아하는 나무이고, 숙이나무는 할머니와 태어난 연도가 같아 동갑내기 친구다. 할머니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동백나무는 매년 붉은 꽃을 피운다. 동백꽃은 험한 세월을 이겨내는 할머니들의 강인한 인생을 상징하며 평화를 갈망하는 할머니들의 염원이기도 하다.
 
 숙이나무
 숙이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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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 구보 <사색여담> 시리즈 저자 <그렇게 여행자가 된다> <상처 위를 거닐다> <여행, 그 너머에 있을 무언가> <아파야 보이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