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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메니아 인들이 성지로 여기는 아라랏트 산은 스탈린에 의해 터키에게 넘겨지고, 대신 스탈린은 크림반도를 획득한다.
 아르메니아 인들이 성지로 여기는 아라랏트 산은 스탈린에 의해 터키에게 넘겨지고, 대신 스탈린은 크림반도를 획득한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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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집권하였을 때 나라는 낙후된 농업 국가였다. 그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고도성장을 견인하였고, 마침내 세계적인 공업국가로 나라를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그는 20여 년의 강력한 철권통치를 단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경쟁자를 암살과 테러를 통해 제거하기도 했다.

그 결과 그가 집권하는 시기 인권과 민주주의는 후퇴하였고, 그는 독재자라는 오명을 갖기도 했다.

그는 누구일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 싶은 인물은 박정희가 아닌 스탈린이다.

코카서스 3국 중 조지아는 스탈린의 모국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의 조국에 대해 특혜를 베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코카서스 민족들은 우월한 러시아 문화에 머리 숙이고 들어와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구설수에 오를 것을 우려한 나머지 집권 시절 조지아에 대한 특별대우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국 조지아는 그런 스탈린을 넓은 품으로 안고 있었다. 스탈린의 고향 고리에는 그의 박물관과 동상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스탈린 사망 후 집권 한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였을 때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는 대규모 추모 집회와 항의집회가 열렸다고 하니 조국은 스탈린을 버리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스탈린이 태어난 조지아 고리에 남아 있는 스탈린 동상
 스탈린이 태어난 조지아 고리에 남아 있는 스탈린 동상
ⓒ 하나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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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러시아 레바다센터(Levada Center)에서 러시아 137개 도시의 18세 이상 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조사했다고 한다. 그 결과 1등은 51%를 차지한 스탈린이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지난 20년간 스탈린이 가장 인기가 높은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고도 레바다센터는 덧붙였다.

스탈린에 대해, 공산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코카서스에서 만난 젊은이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직접 경험하지 않아서 잘 모른다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조사 결과를 피부로 느끼기는 좀 어려웠다.

공산주의를 경험한, 스탈린을 경험한 그들의 부모, 조부모에게 물어봤더니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라는 답변이었다고 현지 가이드들이 전해주었다.

왜 러시아인들은 스탈린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일까?

1917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 그러나 곧 반혁명이 일어나고 이는 적백내전(러시아 내전)으로 발전하여, 치열한 싸움이 전개된다. 소비에트는 1921년 승리를 거두지만 이미 만신창이 폐허가 된 상태였다. 이처럼 내전에 상처입고, 단지 낙후된 농업국가에 불과했던 소련을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강력 실행해 미국에 맞서는 강력한 공업국가로 탈바꿈 시킨 것이 바로 스탈린이기 때문 아닐까?

게다가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히틀러에 의해 영국, 프랑스 등 전 유럽이 줄줄이 무너질 때 그와 맞서 승리를 쟁취한 것 역시 스탈린의 중요한 업적으로 지금까지 러시아인들의 자존심으로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스탈린의 사회주의 정책은 교육, 의료 등에서 사회복지 수준을 대폭 높였으며, 이로 인해 평균수명, 문자 해독률 등 구체적인 수치가 크게 향상된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노인들 중에서는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는 중국의 마오쩌둥,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북한의 김일성 등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하다보니 스탈린에 대한 향수는 강력했던 구소련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일 것이며, 또한 그나마 평등했던 시대에 대한 아련한 추억일 것이다.
  
 아르메니아 코탹 박물관. 스탈린은 '아라라트 코냑'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코탹 박물관. 스탈린은 "아라라트 코냑"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 이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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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의 코냑 박물관에서도 스탈린 이야기는 튀어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얄타 회담에서 처칠 총리가 아르메니아 코냑을 맛보고 그 맛에 반했다고 한다. 스탈린도 평소 그 코냑을 즐겨 마셨는데 처칠 총리에게 아르메니아 코냑 365병을 선물하며 일 년 내내 마시라고 했다는 일화이다. 그 때 권했다는 '아라라트 코냑'은 지금도 아르메니아의 대표적 브랜디 상표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아르메니아의 코냑을 좋아했던 스탈린이었지만 아르메니아에게는 너무도 큰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아르메니아 인들의 성지라고도 할 수 있는 아라랏트 산 일대를 터키에게 넘겨준 장본인이 바로 스탈린이다. 대신 스탈린은 크림반도를 챙겼다. 이처럼 약소국은 강대국의 결정에 오늘날까지도 눈물 흘리며 자신들의 성지를 국경 너머로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슬픈 운명일 수밖에 없다.

아르메니아 가이드 아르메닌은 "그때의 일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슬픈 순간입니다"라며 말을 이어가기 힘들어했다.

조지아는 단지 스탈린의 고향에 머물지 않았다. 스탈린의 공산주의 투쟁 현장이기도 했다. 스탈린이 세계사에 남을 은행 강도였다는 사실도 그곳에서 처음 알았다.

혁명자금이 필요했던 레닌은 스탈린, 카모 등 20여 명의 행동대원들을 조지아 예레반 광장(현 자유 광장)에 보낸다. 1907년 6월 26일 무장 경비원과 돈을 실은 마차가 러시아 제국은행을 떠나 광장에 진입했을 때 스탈린과 행동 대원들은 수류탄을 투척하고, 총기를 난사하며 마차를 탈취 그대로 광장을 벗어난다.

곧 출동한 러시아 군대와 마주쳤지만 기병대 군복으로 위장한 그들은 '돈은 안전하다. 시급히 광장으로 가라'고 외치며 러시아 군인들을 따돌린다. 이때 훔친 돈이 지금 돈으로 무려 350만 달러(약 40억 원)에 해당한다. 이 돈은 핀란드의 레닌에게 전달되어 그 중 일부가 혁명자금으로 사용된다.

이처럼 스탈린은 단지 권모술수가 능해 지도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부터 투쟁으로 단련된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스탈린을 우리는 결코 호의적인 눈으로 볼 수 없다. 바로 스탈린이 단행한 1937년의 고려인 강제이주 조치로 당시 고려인들 다수가 죽고, 극동 지역의 터전과 공동체가 송두리째 날아가고,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스탈린은 민족재배치 정책의 일환으로 각 개개인의 삶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중앙집권적 통치만을 강요함으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한을 심어 주었다.

여전히 대한민국의 많은 어르신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최고 대통령으로 손꼽고,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어쩌면 러시아 국민들이 스탈린을 향수하는 것과 같은 까닭일지 모른다.

하지만 효율성, 성장만을 강조하는 그 이면에 많은 민중들의 피와 눈물, 한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 딸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스탈린의 외동딸 스베틀라나는 "우리 아버지는 독재자였고, 딸로서 침묵한 나도 공범자다. 이제 아버지는 세상에 없으니 내가 그 잘못을 안고 가겠다"라고 말했다.

반면 박정희 대통령의 장녀이자, 그의 후광으로 대통령이 된 박근혜 전대 통령은 "5·16은 아버지의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라며 아버지 박정희를 두둔했다.

그러한 역사인식의 결과는 2019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현재 처한 상황을 통해서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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