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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으로 청산해야 할 적폐가 있지만, 국민의 약 70%가 거주하는 아파트의 적폐도 만만치 않습니다. 경험해보니 국가 적폐보다 마을(아파트) 적폐의 청산이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4년간 아파트 회장을 하면서 겪었던 파란만장한 경험과 성취한 작은 성공의 이야기들을 시민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 기자말

2015년 9월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지인이 할 말이 있다며 나를 찾아왔다. 뭔 일인가 했더니, 내게 동대표 선거에 출마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동대표? 관리사무소가 어딨는지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동대표를 할 수 있겠느냐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하면서 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는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회의에 와서 상식적 판단만 하면 되니 걱정할 게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내가 주저하니까 '정의를 입에 달고 살면서 자기가 사는 동네일에는 왜 이렇게 관심이 없느냐, 나라의 변화도 가장 작은 단위인 마을이 바뀌어야 가능한 거 아니냐?'라며 훈계(?)하는 게 아닌가.

고민스러웠다. 특히 정의를 입에 달고 다닌다는 말엔 부끄러웠고, 작은 단위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말은 도전으로 다가왔다.

선거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가장 나를 고민스럽게 한 건 아파트에 심각한 갈등이 있다는 점이었다. 선거는 당시 동대표들과 전임 동대표들 간의 일종의 전쟁(?)의 성격이 짙었다. 그 당시 동대표들은 전임 동대표들이 임기를 마친 상태에서 동대표가 된 게 아니라, 임기가 한참 남은 전임 동대표들을 해임하고 입주자대표회의를 접수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동대표들은, 전임 동대표들이 진행한 페인트 공사에서 업체 선정에 비리가 있다며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해서 입주민들에게 유인물을 뿌리고 동대표 해임을 밀어붙인 후 동대표가 되자마자 형사 고발까지 했다. 그런데 검찰수사 결과 혐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공사 업체 선정 절차엔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 게 아닌가. 억울할 수밖에 없었던 전임 동대표들이 다시 동대표가 되어 합법적으로 복수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에게 동대표를 권한 지인이 바로 전임 동대표 중 한 사람이었으므로, 만약 출마해서 당선되면 원치 않은 갈등 속으로 빠져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겁이 났다. 염려하는 나에게 지인은 합법적이고 상식적으로 처리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고민은 되었지만, 평소에 신뢰할 수 있었던 지인이기에 결국 출마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작은 단위의 변화가 갖는 중요성도 출마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동대표 선거 결과는 참패였다. 지인 그룹은 모두 낙선했고, 나만 겨우 당선되었다. 회장이 되겠다던 지인은 동대표도 되지 못한 것이다.

내친김에 회장 선거에도 출마하다

난감한 일이었다. 당선의 기쁨도 잠시, 나는 동대표 활동을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우선 지인이 떨어졌고, 지인과 대결하고 있는 당시 동대표들이 대거 당선되었으니 그들과 함께 동대표 활동을 할 자신이 없었다. 당선은 되었지만, 동대표를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지인은 한술 더 떠서 회장에 출마해보라고 권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는 '당신은 이런저런 활동을 하면서 토론도 많이 하고 회의 주재도 많이 해봤으니 잘 할 것이다, 아파트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 또 회장 역할에 그렇게 큰 에너지가 들지도 않는다, 한 달에 1~2번 회의를 주재하고 결재를 2번만 하면 된다'라며 나를 북돋우며 설득했다.

이 지점에서 귀가 얇은 나의 '단점'과 무슨 일이든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특유의 '장점'이 결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회장 출마를 결심한 것이다. 이왕 아파트 활동을 할 거면 동대표보다 회장이 되어서 제대로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내가 성격이 괜찮으니 아파트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겨났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작은 단위에서의 성공의 경험을 맛보고 싶은 욕구도 더 커져만 갔다. 이렇게 생각을 굳힌 후 최종적으로 내가 일하는 연구소 사람들과 의논했다. 아파트 회장 활동이 연구소 활동에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시 낙관적(?)인 연구소 사람들도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좋은 사례를 만들면 좋겠다는 덕담까지 하면서.

회장 선거는 초등학생과 대학생의 싸움

그런데 회장 선거에서 맞붙은 사람은 당시 회장이었고 우리 아파트에서 회장만 무려 4번이나 했던,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아파트의 '거물'이었다. 아파트 운영과 관련한 지식 면에서 비교해보자면 그는 대학생이었고 나는 초등학생이나 다름 없었다. 직업이 '아파트 회장'으로 알려진 그는 거의 매일 관리사무소에 출근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나이도 나보다 10살 정도 많았다.

선거에 나섰으니 반드시 이겨야 하는데, 투표 날이 다가오자 떨어질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질 거 같지 않아서였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들을 포함한 30명 가까이 되는 유급직원들 모두가 당시 회장이었던 상대 후보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고, 무엇보다 상대 후보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소문도 무성했기 때문이다.  
 
ⓒ 남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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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표 차로 회장에 당선되다!

아파트 선거는 게시판에 공고문을 붙이는 거 이외에는 선거운동이랄 것이 따로 없었다. 유인물을 돌리거나 현수막을 걸 수는 있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회장 출마 시 공약을 5가지나 내걸었지만, 핵심은 투명한 아파트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투명성을 높이면 비리를 예방하고 갈등도 줄어들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나온 공약이다. 그 이상의 공약을 낼 수도 없었다. 왜냐면 아파트에 관해 아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개표 결과는 당선이었다. 38표 차가 났는데 놀라운 건 투표율이 25%에 육박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투표율이 높은 건 우리 아파트 25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역대 회장 투표율은 15% 안팎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특이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느 아파트나 아파트 일에 관심 있는 입주민은 대략 20% 정도 된다. 나머지 80%는 아파트에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은 소수가 담합해서 엄청난 비리를 저지른 것이 명백히 드러나도, 그 비리가 초래한 갈등으로 인해 심지어 폭력사태가 벌어져도 관심을 두지 않고 가끔 혀를 끌끌 찰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투표율이 이렇게 높아진 것일까?

내 생각엔 아파트 입주민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 주된 원인이 아닐까 싶다. 회장을 4번씩이나 했던 사람이 과거 갈등을 풀 수 없고, 그가 회장으로 재임 시 추진했던 각종 공사에 대해서 상당수 입주민들이 의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였다. 그리고 한편으론 약간 신선하게 보일 수 있는 나의 독특한 이력도 당선의 원인이 되었을 거 같았다.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된 건 난생처음이어서인지 당선으로 인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은 기분이었다. 회장 당선이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실제 공직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선 후 관리사무소에 가니 직원들이 거의 90도로 인사를 했다. 거만하기 짝이 없다고 소문난 관리소장도 깍듯했다. 전임 회장, 그러니까 나와 회장 선거에서 겨루었던 사람과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만났는데, 인상은 별로였지만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당선을 축하한다며 웃으면서 악수까지 건네는 여유를 보였다.

회장 업무 인수인계를 마친 후 관리소장이 나를 데리고 아파트 구석구석을 다니며 설명해주었다. 갑자기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 된 거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의 태도는 극진했다. 회장을 잘할 수 있을 거 같은 자신감이 마구 커져갔다. 적어도 두 번째 회의 전까지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아파트 회장 분투기'는 앞으로 약 30회 정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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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자유연구소(landliberty.or.kr) 소장. 토지정의와 기본소득, 그리고 통일을 염두에 둔 대안 국가모델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운동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