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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플라토닉 사랑을 나누는 편이다. 독서가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부류도 있고 플라토닉 사랑을 나누는 독서가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마구 접고, 속지에 메모를 휘갈기며 필요하면 찢어서 메모지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책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다. 나처럼 플라토닉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오늘 읽고 있는 책을 내일 재활용 통에 버릴지라도 내지를 접지 않고, 메모하지 않으며 심지어 띠지도 고스란히 제자리에 둔다.

김경집 선생의 신간 <언어 사춘기>도 당연히 조신하게 읽기 시작했다. 인문학자가 쓴 책이니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깨우침을 주는 책으로 생각했다. 나의 플라토닉 사랑은 금방 격렬한 육체적인 사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참신하고 신선한 통찰력이 넘치는 구절이 많아서 차분하게 수첩에 메모할 여유가 없었다. 

연필로 마구 밑줄을 긋고 내지를 접어가며 꼭 실천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어떤 구절에서는 내 자식이 청소년기였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탄을 했다. 하다 못해 내 자식이 10대 전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탄을 했다.

<언어사춘기>는 사변적인 책이 아니다. 다분히 통찰력이 번득이고 실천을 하게 하는 책이다. 대학 시절 '나의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다'라는 말을 좋아했다. 언어와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막연히 좋아한 말인데 <언어사춘기>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왜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인지 알게 되었다. 아울러 언어의 한계를 넓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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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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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사춘기'라는 말에 대한 설명이 먼저 필요하겠다. 신체의 발달단계뿐만 아니라 사람의 언어 발달 단계에도 아동과 성인 사이에 사춘기가 존재하는데 이를 '언어사춘기'라고 한다. 아동의 말은 길이가 짧고,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이 빈도가 낮으며 욕설도 많이 섞여 있다. 어른의 언어는 그 반대다. 감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짧은 언어가 아니고 관념과 개념의 언어다.

아이의 언어보다는 어른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성공적인 삶을 살 가능성이 당연히 높다. 논리적이고 현명을 판단을 할 확률도 높다. 대략 10세 전후에 형성되는 언어 사춘기는 당연히 어른의 언어를 습득하는 최적의 시기인데 이시기를 놓치면 어른의 언어를 습득할 확률이 낮아지고, 어른의 언어가 지닌 의미 있는 생활과 인생을 누릴 수 없는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사춘기>는 당신의 자녀가 어른의 언어를 습득할 수 있도록 도울 방법을 제시한다. '언어 사춘기'라는 용어가 참신하듯이 이 책의 저자 김경집 선생이 제시하는 방법은 독특하고 신선하며 창의적이다. 김경집 선생이 말하는 어른의 언어를 습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다. 그러나 부모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인데 아무리 독서의 중요성을 노래 불러봐야 자녀가 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책 말고도 재미있는 매체가 너무 많다. 영상이나 시각 매체에 대한 과도한 몰입 때문에 어른의 언어로 도약하기 힘든 요즘 아이들을 위한 김경집 선생이 알려주는 꿀 팁 하나를 소개한다. 자식들이 사용할 교과서를 2권 구매한 다음 진도에 맞춰서 미리 읽는다.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그 당시 중요했던 개념이나 어휘를 생각해내고 노트에 옮겨 적은 다음 아이들과 대화를 할 때 의식적으로 그 개념이나 어휘를 사용한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생소한 개념이나 어휘를 부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노출하는 것이다. 아이는 학교에서 부모가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알려준 어휘나 개념을 떠올리고 수업 내용을 친근하게 느낄 것이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것은 각 교과에 사용되는 어휘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학업 성취도가 낮은 학생일수록 사전적인 의미 자체를 모른 경우가 많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교과서에는 어른의 언어가 주로 사용된다. 독서를 통해서 어른의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면 학업에 흥미를 잃는 경우가 많은 것은 자명하다. 아이들에게 낱말을 만져보게 하면 이해력과 공감 능력 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크게 향상된다는 김경집 선생의 주장도 소중하다. 

나만 해도 그렇다. 어린 시절 재미나게 읽었던 서양동화에 등장하는 많은 서양 물건이나 지명을 만져 보지 못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1970년대 산골에 사는 소년이 읽는 동화 속 명사 중에서 실제로 보고 듣고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실물을 보고 구경하지 못하더라도 도감이나 지도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 단어를 만지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도감이나 지도가 중요하다. 나는 아이들의 교과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사회과 부도'라고 생각한다. 

내킨 김에 '도감'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서점에 '도감'을 검색했다. 실제로 다양한 분야의 도감이 검색되었다. 정신없이 장바구니에 담다 보니 서글픈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탐나고 진귀한 도감은 대부분 일본에서 출간되었더라. 생물이나 지리 역사 같은 보편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아저씨 도감>, <남편 도감>, <일자리 도감>, <세계의 샌드위치 도감>, <소련 전차 군단 도감>, <맥주 도감>도 모두 일본 작가의 책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나온 좋은 도감도 많았지만 주로 소재가 우리나라의 것으로 국한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김경집 선생의 독서론은 뻔하지 않아서 좋다. 휴가 때 책을 한 권 들고 가서 반만 읽고 그다음 내용을 궁금해 하면서 복귀하고 나머지를 읽기를 권한다거나, 자신만의 공간이 아닌 남들이 보라는 식으로 많은 사람이 있는 공간에서 읽으라는 등. 

지난주에 이제 막 한참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를 둔 학부모에게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내가 추천한 책이 당사자에게는 재미가 없는 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생각이 바꿨다. <언어 사춘기>를 권하기로 했다. 이 책으로 아이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나처럼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태그:#김경집, #언어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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