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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대 트레일 중 가장 길고 험하다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이하 피시티) 4300km. 미국 LA 문화단체 '컬쳐앤소사이티(대표 줄리엔 정)' 기획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처한 한국 하이커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 기자말

- 1편에서 이어집니다.

1000km를 걸었을 때 살은 15kg 이상이 빠졌다. 그만큼 자신감은 가득 찼다. 캘리포니아 중부 시에라 네바다 산맥 입구인 케네디 메도우즈(Kennedy Meadows, 운행 49일째, 운행거리 1123km)에 입성했다. 사막 구간이 끝나고 산악 구간이 시작하는 지점이었다. 고도가 평균 3000~4000m였다.

하지만 불길한 소식이 들렸다. 백 년만의 폭설이 내려 시에라 길이 전부 눈으로 덮였다는 것이었다. 앞서 출발한 하이커의 실종 소식도 들렸다. 나는 설산 경험이 없었다. 대화도 잘 안 됐다. 휴대전화 GPS는 고장 난 상태였다. 고민 끝에 경로를 우회하기로 했다.

캐네디 메도우즈 옆 도로를 따라 마을까지 걸었다. 2000m 고지에서 이틀을 걸어 하이웨이 395번 론 파인(Lone Pine) 지점까지 내려와 북쪽으로 걸었다. 시에라 산맥을 바라보며 걸었다. 날씨가 좋아지면 다시 올라갈 작정이었다. 도로에는 많은 하이커들이 나와 있었다.
 
자연 속에서 일상이 이루어 질 수록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아스팔트에 누워 있으면 굉장히 따뜻하고 눈앞에는 멋진 하늘이 항상 연출된다.
▲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자연 속에서 일상이 이루어 질 수록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아스팔트에 누워 있으면 굉장히 따뜻하고 눈앞에는 멋진 하늘이 항상 연출된다.
ⓒ 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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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똥 밭에서 잠자다

마을을 지날 때 노숙을 많이 했다. 하루는 중부 캘리포니아 빅파인(Big Pine, 운행 53일째, 운행거리 1325km)이라는 마을이었다.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편의점에서 콜라 한 캔을 사먹으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땅거미가 질 때쯤 공원 화장실 뒤에 텐트 없이 침낭만 폈다. 19살 미국 남자 하이커도 곁에 와 누웠다.

그런데 새벽 물벼락이 떨어졌다. 비가 내린다는 소식이 없었는데! 허둥지둥 침낭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비가 아닌 잔디밭 스프링쿨러가 내뿜는 물이었다. 나도 장비도 생쥐꼴이 됐다. 미국 남자아이와 서로 쳐다 보며 한참을 웃었다.

새벽에 도착한 마을 비숍(Bishop)에서는 화장실 변기 칸에 들어가 매트만 피고 누웠다. 지붕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그런데 문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하더니 손전등으로 안을 확 비췄다.

"왜 여기서 잠을 자요? 감옥이라도 가고 싶은 거예요?"
"아...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경찰이었다. 결국 배회하다 시골 병원 뒤편 잔디밭에서 잠을 청했다. 꿀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은 없었지만, 그런데 뭔가, 께름칙한, 그것. 주변이 온통 말똥이었다. 이미 내 몸에도 냄새가 배였다. 저멀리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초보 하이커, 미 최고봉 오르다

6월 26일 오전 9시 미 최고봉인 휘트니산에 올랐다. 산은 온통 눈천지였다. 경사는 75도쯤 되는 것 같았다. 앞사람 뒤통수를 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발꿈치를 보고 걸어야 했다. 뒤를 돌아보면 배낭 무게 때문에 뒤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한 발씩 눈을 강하게 차면서 계단을 만들며 올라갔다.

드디어 정상. 48시간만에 산을 올랐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끝없는 산맥이 펼쳐졌고 저멀리 지평선이 보였다. 하늘은 거짓말 같이 새파란 색이었다. 카메라를 나에게로 돌려 셀카 영상을 찍었다. 신이 된 것 같았다. 눈을 끓여 90센트짜리 미국 라면을 끓여 먹었다. 나에게 주는 상이자 하나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원래의 길이 눈으로 덮여 곧장 올라가는 수 밖에 없었다. 마치 하늘 위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 휘트니산(Mt. Whitney) 올라가는 길 원래의 길이 눈으로 덮여 곧장 올라가는 수 밖에 없었다. 마치 하늘 위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 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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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처럼 밀려오는 산불 피해 해변길로

오리곤주 초입 애슐랜드(Ashland, 운행 116일, 운행거리 2763km)를 지날 때였다. 하이커들은 근처에 산불이 크게 나 트레일이 닫혔다고 말했다. 나는 무시하고 계속 걸어 크레이터 호수 국립공원(Crater Lake National Park, 운행 121일째, 운행거리 2934km)에 도착했다. 탄내가 났지만 견딜만 했다. 크레이터 파크 휴게소에서 캠핑을 했다.

그런데 다음날 사위가 누렇게 보였다. 재와 연기로 주변이 꽉 막혔다. 모래 폭풍에 갇힌 느낌이었다. 국립공원 직원들이 나와 대피하라는 공고문을 여기저기 벽보에 붙이고 있었다.

나는 결국 히치하이크를 한 뒤 우회로인 오리건 코스트 트레일(Oregon Coast Trail∙이하 오시티)로 갔다. 오시티는 전장 800km인 오리곤주 해변 트레일로 피시티 트레일 구간과 길이가 같았다.

오시티는 바다의 사막이었다. 끝도 없는 모래 사장이 발걸음을 부여잡았다. 강한 소금 바람은 무거운 장비 맨 하이커들을 계속 밀어댔다. 파도 소리는 주변 모든 소리를 삼켰다. 밤이 돼서야 동행한 하이커들과 모닥불 앞에서 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오시티를 3주간 걷고 마지막 구간인 워싱턴주에 입성을 했다.
 
거친 바다의 모래바람과 끈적한 염분이 끝없이 나를 건드렸지만 그 것을 잊게 해주는 공간,파도 소리만 들리는  넓은 지구에 나 혼자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해줄만큼 웅장하고 광활했다.
▲ OCT(Oregon Coast Trail)의 색다른 매력 거친 바다의 모래바람과 끈적한 염분이 끝없이 나를 건드렸지만 그 것을 잊게 해주는 공간,파도 소리만 들리는 넓은 지구에 나 혼자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해줄만큼 웅장하고 광활했다.
ⓒ 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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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주는 힘들었지만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었다. 하루 평균 고도 1000m를 오르고 내렸다. 산세가 가팔랐고 불규칙적이었다. 욕을 하며 아니, 산을 '경멸'하며 올랐다. 하지만 뒤돌아서 본 풍경은 숨이 멎을 듯한 절경이었다. 고즈넉하면서 웅장한 기운이 바람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길은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는 정도로 좁았다. 하루는 마부와 마주했다. 길을 비켜 주기 위해 좁은 길 비탈길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다 말 대열의 마지막 말에 내 가방이 걸렸다. 몸이 그대로 말에 끌려갔다. 좁은 길 옆은 낭떠러지였다. 순간 죽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말들도 놀라 날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말이 뛰면서 배낭 끝부분이 찢어져 풀려났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목적지에 다가올수록 쌓이는 공허함
  
캐나다 국경이 가까이 다가오자 마음은 침울했다. 10km를 남겨둔 마지막 밤.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차분하고 덤덤했다. 굵직한 한숨이 가슴에서 뿜어져 나왔다. 목적지 2km 앞 캐나다 국경지대가 멀리서 얼핏 보였다. 지난 6개월 동안 이날만 상상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무거웠다.

멀리 나무 틈 사이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 먼저 도착한 하이커 20여 명이 소리를 질렀다. 박수를 쳤다. 난 기념비인 매닝파크 모뉴먼트를 만지고 뽀뽀를 했다. 한편으론 공허함이 몰려왔다. 내가 이걸 보려고 생고생을 했나. 이제는 어딜 걸어가야 하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포인트다. 앞에 보이는 레이니어산(Mt.Rainier) 을 둘러싸고있는 구름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신선이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 워싱턴주의 Knife Edge 내가 가장 좋아하는 포인트다. 앞에 보이는 레이니어산(Mt.Rainier) 을 둘러싸고있는 구름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신선이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 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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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티는 지독하게 힘들었다. 하지만 6개월 동안 모인 발자국들이 4300km라는 거리를 만들었다. 완주 뒤 나는 변했다. 노을을 즐길 줄 알게 됐고 나뭇가지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의 아름다움의 크기를 깨닫게 됐다. 생이 끝날 때 언제가 제일 행복했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지독하게 힘들었던 그때 그 순간!"

태그:#박승규, #피시티, #PCT, #PACIFIC CREST TR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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