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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일반 비자는 체류 기한이 한 달인데, 마침 내가 도착한 뒤 한 달 내내 이슬람교의 금식 기간인 라마단이 이어졌다. 라마단 기간은 이슬람 태음력에 따라 정해지므로 해마다 그레고리 태양력 날짜는 바뀐다. 아랍어로 '더운 달'을 뜻하는 라마단은 천사 가브리엘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코란>을 전한 달로,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음식을 먹지 않고 평소보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신성한 기간이다.

1억 이집트 사람들 중 90퍼센트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대낮에 문을 여는 식당은 맥도날드나 KFC 같은 외국계 프랜차이즈뿐이었다. 식당뿐 아니라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아서, 가뜩이나 사하라의 모래 먼지가 날리는 이집트의 도시들이 조금 더 낡아 보였다.

사람 많은 공공장소에서는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라마단은 이곳의 종교 규칙이자 문화이기도 하다. 음식을 구하기 어려우니 자연스레 나도 낮에는 음식을 줄이게 되었다. 라마단에는 배고픔 때문에 사람들의 스트레스가 높아지므로 조심히 여행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그래서일까, 이집트의 수도이자 아랍 연합의 수도, 2000만 인구의 대도시 카이로 도로는 시끄러운 경적 소리가 너무 심했다. 신호등과 횡단보도가 드물고 보행자를 배려하는 운전자 또한 드물어서, 길을 건널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곡예하듯 차들 사이를 가로질러야 했다.

보행자가 가는 길도 길이고, 차가 오는 길도 길이니 목숨과 안전은 각자가 눈치껏 지켜야 하는 혼란의 거리. 빵빵빵, 경적을 울리다가 차에서 뛰쳐나와 고함을 지르며 멱살잡이를 하는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런 혼잡도 며칠 살다 보니 익숙해져서, 신호를 기다리지 않고 언제든 길을 건널 수 있다는 게 오히려 편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카이로 도심 타흐리르 광장
 카이로 도심 타흐리르 광장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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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계층, 학벌, 불평등, 약육강식의 사회 현상을 상징하는 단어로 '피라미드'라는 말을 흔히 쓴다. 여행 중인 나에게도 입소문이 전해진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홍보 영상에서도 '피라미드 꼭대기'라는 대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은유의 기원이자, 은유 없는 실제 피라미드, 4580년 전에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무덤을 드디어 직접 보았다. 멕시코의 치첸잇사,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도 비슷한 돌 건축물이 있지만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훨씬 오래 되고 거대했다.

5600만 톤의 돌들로 만들어진 147미터 높이의 돌산.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에 덩그러니 솟은 모습이 시선을 압도했다. 온 세계의 관광객들은 피라미드 옆에서의 점프샷, 스핑크스와의 입맞춤 사진 따위의 기발하고 멋진 사진을 추억으로 남기느라 분주했다. 해가 기울자 서서히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겼고 허기진 들개들과 지친 새들이 피라미드가 만드는 그늘 아래에서 더위를 식혔다.
 
이집트 기자 지역에 자리한 피라미드
 이집트 기자 지역에 자리한 피라미드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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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도와 계급 사회가 얼마나 사람을 혹사시킬 수 있는지, '피라미드 꼭대기'의 인간들이 '피라미드 바닥'의 인간들에게 어떤 차별을 할 수 있는지 증명하는 건축물.

그래서 피라미드는 나에게 경이로움보다는 끔찍함을 더 많이 느끼게 했다. 피라미드 같은 사회는 이제 그만 산산히 부서져서, 피라미드 옆의 고요한 사막처럼 공정하고 평평해졌으면 좋겠다고 조용히 기도하며 피라미드를 떠났다.

라마단 카림! 축복의 라마단

피라미드에서 기자(Giza) 전철역으로 가는 마이크로 버스를 탔다. 카이로의 전철 티켓은 3파운드(한화 210원), 시내버스 역할을 하는 승합차 '마이크로 버스'는 1파운드(70원)부터 거리에 따라 가격이 늘어난다.

퇴근시간 도로는 차와 사람들로 넘쳐났다. 버스 기사는 뭐가 그리 바쁜지 아슬아슬 추월 운전을 했고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렸다. 마이크로 버스는 정해진 정거장 없이 아무 곳에서나 손을 드는 사람을 태우고 내린다. 기사들은 운전을 하는 와중에 차비도 받고 거스름돈도 돌려준다.

교차로 신호가 걸린 순간, 기사가 갑자기 운전석에서 뛰어내리더니 차를 도로 가운데 버려두고 뒤쪽으로 뛰어갔다. 승객 모두 어리둥절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는 중앙선 주변을 헤매는 손바닥만한 새끼 고양이를 안아 들고 마치 액션 영화 추격 장면처럼 수십 대의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달렸다. 멀리서도 작은 고양이의 놀란 눈빛이 보였다. 안전한 길가에 고양이를 데려다준 그는 신호가 채 바뀌기 직전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20초 남짓 사이에 벌어진 구출 작전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화난 듯이 경적을 울리더니, 어떻게 그 혼란한 도로에서 조그만 고양이를 발견하고 구할 마음을 먹었을까. 그는 마치 현실의 슈퍼 히어로처럼 보였다. 카이로의 거리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불현듯 환하게 씻겨져 나갔다.

시끄러운 소리에 내가 짜증이 나니, 버스 기사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짜증이 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카이로 버스 기사들의 일이 분초를 다툴 만큼 바쁜 것이고, 정류장이 없는 도로에서 승객을 태우려고 경적을 울린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고달프고, 힘들고, 귀찮고, 짜증나는 여행길이겠지만, 때론 아이의 미소 하나만으로 모든 게 괜찮아지기도 하지요."

아프리카를 먼저 종단한 여행자 김경진씨가 고양이 구출 이야기를 듣고는 공감의 맞장구를 쳐주었다.

"라마단 카림"은 라마단의 인사말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 '메리 크리스마스' 와 비슷한 뜻이다. 이슬람 문화 바깥에서는 라마단을 금식하는 힘든 기간이라고만 짐작하지만, 실제 라마단은 욕망을 절제하고 이웃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호혜와 축제의 기간이라고 한다.
 
후르가다 거리. 해가 지고 음료와 대추야자를 나눠주는 사람들.
 후르가다 거리. 해가 지고 음료와 대추야자를 나눠주는 사람들.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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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모스크에서 기도 '아잔'이 울려퍼지면, 사람들은 거리에 나와 배고픈 행인들에게 히비스쿠스 음료와 대추야자 세 개씩을 나누어 주었다. 길가에 식탁과 의자를 놓고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저녁식사 '이프타르'를 대접하는 곳도 많았다.

이슬람 신자가 아닌 여행자에게도 모든 사람들이 친절히 음식을 나누고 축복을 해주었다. 밤이 오면 골목이며 집집마다 장식해 둔 색색의 전등에 불이 켜졌고 거리는 대낮에 없던 활기가 넘쳤다.

"라마단 카림! 슈크란, 고마워요!" 이집트에서 내가 겪은 라마단은, 덥고 배고파서 힘들기도 했지만, 가는 도시마다 음식을 얻어먹고 친절을 받았던 감사하고 특별한 한 달이었다.
 
카이로. 라마단 기간의 저녁식사 '이프타르' 를 무료로 대접하는 장소. 수백 명의 사람이 함께 축복의 기도를 하고 밥을 나눠먹는다. 대추야자 세 개와 라마단 저녁식사.
 카이로. 라마단 기간의 저녁식사 "이프타르" 를 무료로 대접하는 장소. 수백 명의 사람이 함께 축복의 기도를 하고 밥을 나눠먹는다. 대추야자 세 개와 라마단 저녁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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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의 다정한 사기꾼들

"차이나? 코리아? 컴 온, 컴 온! 굿 프라이스! 스페셜 프라이스 포 유! 와이 낫? 왜 안 사? 왓 두 유 원트?(얼마를 원해?)"
"아니, 나는 아무 것도 안 살 거고, 그냥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 둬요!"


라마단의 축복을 감사히 받은 한편, 후르가다, 카이로, 아스완, 다합, 이집트 어디서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바가지와 사기를 꽤 당했다. 그 중 두어 시간 만에 세 번의 사기를 당하고 눈물이 핑 돌았던 룩소르의 사기꾼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집트 남부 오뉴월 평균 최고 기온은 45도를 넘나든다. 그 더위에, 낮에는 요리된 음식을 찾기 어려웠고, 해 질 무렵 시장에서 작은 빵 한 봉지를 샀다. 50파운드(3500원)를 부르기에 첫날에는 그냥 사 먹고, 다음 날엔 비싸다고 느껴져 '로컬 프라이스, 현지 가격'으로 달라고 말하니 30파운드로 깎아주었다.

영어가 통하는 동네 청년들에게 물었더니 5나 10파운드 정도면 사는 빵이라고 했다. 열 배든 세 배든, 금액을 떠나 두 번이나 바가지를 쓴 게 화가 나서 다시 찾아가 따졌다. 아랍어를 모르니 손짓과 표정으로 따질 뿐이었다.

"너네 이거 다른 이집트인들이 5파운드라던데, 나한테 두 번이나 사기친 거니?!"

배고프고 지치고 억울한 내 표정을 이해한 듯, 빵집 청년들은 화내지 말라고 웃으며 나를 껴안아 다독이더니 10파운드만 돌려주었다. 그 빵의 현지 가격을 나는 영영 알 수 없었다.

카이로에서 일하는 지인의 프로젝트를 돕기로 해서, 이집트 전화번호가 필요해졌다. 여행 중 처음으로 현지 핸드폰 유심(USIM)을 사기로 했다. 문을 닫은 통신사 앞을 서성이는데 두 청년이 다가와 유심을 팔았다.

인터뷰 영상들을 업로드할 겸 20기가(20000메가) 데이터를 샀는데 숙소에서 확인해보니 150메가만 사용할 수 있는 유심이었다. 정말 20기가 맞냐고, 눈을 보며 몇 번이나 물었고 그들은 대답했는데, 완전한 거짓말이었다.

그들을 만난 곳에 달려가니 아무도 없었다. 주변 상인들에게 경찰을 불러 달라고 말하자 사기꾼들에게 전화를 했고 곧 그들이 왔다. 배신감에 눈물이 났다. 빵집 청년들처럼, 유심 청년들도 온갖 착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다독였다.

"진정하고 앉아. 차 마실래? 데이터가 적어? 돈 다시 줄게. 됐지? 아 유 해피 나우? (이제 행복해?) 네가 이집트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150파운드를 줬는데 그들은 120을 돌려주었다. 욕이 튀어나왔다.

"아니. 30 모자르잖아. 이집트에서 행복하냐고? 장난치냐? 이 삐리리들아!"
"근데 이게 다야. 어쩌지, 우리 방금 그 돈으로 밥 먹었거든. 미안."


터덜터덜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숙소로 돌아가는 길, 이번에는 옷 수선소의 중년 남성이 말을 걸어 왔다.

"너 해피랜드 호스텔에 있어? 거기 주인이 내 형제야. 여기 앉아서 차 마시고 가. 오늘 밤은 라마단 축제날인데 사람들이 같이 밥을 먹고 새옷을 사는 날이야. 너 겔라비아(이집트 전통의상)에 관심 있으면 내가 저렴한 현지인 가게에 데려다 줄게."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데려간 가게는 현지인 가게가 아닌 관광객용 선물가게였다. 나는 끝까지 그가 사기꾼인 줄은 모르고, 그의 발품이 미안해서 맘에 들지 않는 옷을 기어이 사고 말았다.

가게에서 나오는 순간 그는 나에게 20파운드를 요구했고, 내가 돈을 주지 않자 헤어지기 직전에는 5파운드를 요구했다. 5파운드는 350원이다. 풍채 좋고 점잖던 그는 정녕 나에게서 350원을 받으려고 30분이 넘게 이야기를 나누고 거리를 걸은 것일까. 그의 진심을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

다합에서 만난 여행자 김진수씨의 느긋한 통찰력이 나의 뒤통수를 쳤다. "한국에 살던 우리가 정찰제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렇지, 원래 물건 가격은 파는 사람 마음 아닐까요?"

다시 한 번 "알라 알라 이집트!",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이집트는 그런 곳이다. 온갖 바가지도 갖가지 사기도, 모두 다 여행과 삶의 경험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넓은 마음을 먹어야겠다.
 
룩소르 사원. 입장료가 비싸 내부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담장 밖에서도 유적의 분위기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룩소르 사원. 입장료가 비싸 내부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담장 밖에서도 유적의 분위기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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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매 당한 전통의상 겔라비아는 강한 햇빛을 조금은 가려주었다.
 강매 당한 전통의상 겔라비아는 강한 햇빛을 조금은 가려주었다.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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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모이, #세계일주, #이집트여행, #아프리카여행, #라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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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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