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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춘천 성수고(교장 주국영) 교정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진로부장 심옥섭 교사를 중심으로 성수고 일부 교사들과 2, 3학년 학생들 50여 명이 '학교에서 하룻밤, 1박2일 독서캠프'를 진행한 것이다. 나는 이번 캠프에서 진로강사로 특강을 요청 받아 함께 참여하게 됐다.

캠프 준비를 위해 총 7명의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기획과 활동에 동참하였으며 성수고 졸업생 10명도 모교를 찾아 모둠활동 도우미로 함께 했다. 재학생, 졸업생, 교사들의 자발적 참여와 학부모의 동의로 이루어졌다. 

최초 기획자 심옥섭 교사(진로, 세계지리)는 "학생들이 14시간 동안 스마트폰 없이 책과 사람만으로 재미있게 보내자는 거예요"라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평소 토론에 관심이 많아 활동을 지도해 왔지만 논리를 입혀 상대를 승복시키는 것보다 같은 책을 읽고도 각자 생각이 다를 수 있고 그 다름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기회와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책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자고 의견을 냈더니 취지에 동참하는 선생님들과 아이디어가 모였어요. 30여 명 예상했던 규모도 신청자가 폭주해 47명의 학생들이 출석을 했네요. 방학인데 개인의 시간을 기껍게 투자해준 동료 교사들의 지원 없이 할 수 없는 행사죠. 저는 우리 아이들이, 누가 인정해주는 명문 보다 학생들 스스로 어느 자리에서도 당당히 자신들을 표현할 수 있는 성수인이 되기를 바라요."

14시간이지만 하룻밤을 지새는 활동이라 심 교사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재미'였다. 청소년 눈높이에서 재미와 소통을 위해 졸업생 참여를 결정했고 많은 졸업생들이 흔쾌히 동참했다.   
 
독서캠프 독서활동후 자유시간에 교사와 학생이 모드게임을 하고 있다.
▲ 보드게임삼매경,  독서캠프 독서활동후 자유시간에 교사와 학생이 모드게임을 하고 있다.
ⓒ 임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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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기본 도서를 사전 제공했고 프로그램과 활동 중간중간 자유소통시간, 간식시간, 취침자를 위한 텐트 설치방을 두어 자율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기본프로그램은 독후 활동으로 모둠별 비경쟁독서토론, 독서경험나누기, 외부강사 진로특강, 빛그림 동화 읽기였고 심야 만화방, 진로영화 감상, 선배와 진로경험나누기, 보드게임, 등 선택 활동으로 구성됐다.

크게 6개 도서 군으로 모둠을 나누었고 모둠마다 졸업생이 활동을 도왔다. 선택한 활동 후 미션완료스티커를 붙여 개인 활동내역을 관리하도록 했다.

비경쟁독서토론활동을 지도한 오세민 교사(지리)는 활동의 내용과 참여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평소 수업에 토론 활동을 자주 해요. 수업 중에는 시간적 제약이 있죠. 아이들이 책을 읽고 생각을 확산시켜 질문을 만들고 그 질문의 의도를 친구들에게 설명하면서 경쟁이 아닌 소통과 협력의 방법을 배우기 바라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토론의 기회를 주고 싶었고요. 이런 활동들을 통해 다른 해석, 생각, 관점에 접근해 보고 공동의 문제를 정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면서 사고의 폭이 넓혀지는 것 같습니다. 또 비경쟁이다 보니 상대를 설득할 필요 없이 다른 친구의 생각을 다름으로 접근하게 되구요."

비경쟁독서토론이란 낱말이 다소 낯설었지만 의미 전달은 충분했다. 선배의 리드로 토론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모둠마다 다른 주제로 진지했다. 대학 캠퍼스처럼 새벽까지 환한 고등학교 교정이 한여름 밤 청소년들의 소근 거림으로 가득찼다.

학생들은 공통되게 친구들과 생각을 나누며 친구라는 끈끈한 친근함이 많이 느껴졌다고 말한다. 활동을 마치고 간식을 먹으러 이동하는 학생들의 표정에는 시간이 멈춘 듯 일상의 낮보다 더 활력이 묻어났다.
 
성수고 독서캠프 비경쟁독서토론 활동에 각자의 질문을 적고 있는 학생과 교사.
 성수고 독서캠프 비경쟁독서토론 활동에 각자의 질문을 적고 있는 학생과 교사.
ⓒ 임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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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는 게 조금 힘들었다는 김시온(3학년) 학생은 독후활동 소감을 묻자 "저희 모둠은 식용목적으로 사육되는 가축들에 대한 토론을 했거든요.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나 보니 인간은 고기를 먹어야만 사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생각까지 하게 됐어요. 점수가 매겨지지 않고 자유롭게 친구들의 의견을 듣고 제 의견을 얘기하니까 다른 생각도 알게 되고 또 친구가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문제를 해결해가는 동반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작정하고 책 읽는 시간도 갖고 친구들과 오랜 시간 이야기 나눈 시간이 좋았다는 김병현(3학년) 학생은 내내 웃는 얼굴이다.

"평소 친구들과 잡담도 좋지만 책 속 주제인 낙태의 허용 범위 같은 이야기로 말도 많이 했고요. 제가 못한 생각도 들어서 재밌었어요. 고3이라 시험 준비는 하지만 오늘은 나 혼자 가진 생각을 여러 친구들과 나누어서 더 재밌고 추가적인 생각도 해보게 되어서 다른 자료도 찾아보고 싶어졌어요. 저는 내년에 행사를 하면 선배로 꼭 참여하고 싶어요."

활동 내내 학생들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학생처럼 참여하는 이소운 교사(국어)는 집에서 엄마를 기다릴 어린 딸은 잠시 잊은 듯 신난 표정이다.

"진로선생님께서 워낙 좋은 프로그램을 잘 기획하셔서 적극 참여해요. 제가 3학년 담임인데 반 아이들이 많이 신청했어요. 아이들과 책을 읽으면서 밤도 새우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문제집만 많이 풀고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을 기회가 많지 않거든요. 한 권의 책을 완독했다는 성취감도 주고 싶었어요. 저도 책을 읽으며 행복했거든요. 왔다갔다 열심히 지원해주시는 선생님들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세상은 따뜻하다는 걸 느끼고 좋은 에너지도 생겼으면 해요. 무엇보다 제가 너무 재밌어요."

교실에서 밝아 오는 아침을 맞는 경험에 아이들도 교사들도 낯설지만 기분 좋은 감동을 공유하는 모습이었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학생들조차 함께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오랜 시간 생각을 나누어 본 기회가 없었다고 말한다.
 
자유시간에 진로활동실에 마련된 심야 만화방에서 만화를 읽고 있는 성수고 학샐들
▲ 딩굴딩굴 만화방 자유시간에 진로활동실에 마련된 심야 만화방에서 만화를 읽고 있는 성수고 학샐들
ⓒ 임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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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영화를 관람하고 또 이야기를 나누고, 바닥에 뒹굴며 만화책도 본다. 교사와 학생의 구분 없이 삼삼오오 테이블에 둘러 앉아 보드게임도 한다. 대한민국 고2, 고3들의 활동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걱정을 내비친 부모님들도 있었다고 학생들이 털어 놓는다. 전체 프로그램 마무리에 학생들의 소감을 들었다.

조남윤(2학년) 학생은 밤을 새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벌써 아침이라며 성공비결을 말한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어요. 공부 얘기도 했고요. 요즘 제가 헬스를 다니는데 체대를 준비하는 친구에게 운동법도 들었고요. 그 친구랑 근육키우는 방법이나 전문적인 얘기도 나누면서 많이 친해졌어요. 자기가 가려는 분야에 전문 지식이 많아 멋지더라고요. 게임을 하면서 가까워진 친구도 있어요. 스마트폰도 자료 찾을 때 말고 거의 안 한 거 같아요."

활동 내내 조용해 보이던 김민혁 학생은 의미심장한 답을 내놓는다.

"친구들과 밤을 새워 보는 경험이 처음이에요. 활동하면서 친구들이 할 말이 참 많았구나 알았어요. 그래서 저는 친구들 말을 잘 들어주며 소통하면 되겠다고 생각했고 그게 제 역할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짧지만 어떤 수업을 통해 이런 경험과 깨달음을 얻을까 싶은 뭉클한 소감들이었다. 토론의 진지함 못지않게 학생들은 서로 이기지 않아도 되기에 편안히 친구의 말을 경청했고 자기가 못한 생각을 공유해서 좋았다고 입을 모은다.

아이들 먹거리를 챙기고, 결과물을 바로 전시하고, 활동지를 확인하고, 활동사진을 즉시 출력하여 벽에 붙이고... 잠시 엉덩이 붙일 시간도 없는 교사들의 노고가 보람으로 확인되는 시간이었다.

후배들과 2시간을 넘게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운 진우엽(정치외교학과 2학년) 졸업생에게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는지 물었다.

"고3학생들이라 학업 문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묻더라고요. 수능 마치고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은지도 많이 묻고요. 저는 이런 프로그램 못해 봐서 아쉽고 후배들이 부럽기도 해요. 이런 저런 경험을 많이 하라고 말해주고 제가 경험한 여행이나 도전했던 일들을 말해줬어요. 모둠에서 못한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하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참 좋은 기획이에요."

 본인의 이야기 보다 후배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 주던 강민준(도시계획과 2학년) 졸업생은 자신에게 더 좋은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대학 친구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에 못지않게 패션, 문학, 미술사 등 각자의 관심사에 깊고 전문적으로 아는 것 같아요. 후배들이 멋지더라고요. 저는 고등학교 내내 무엇을 할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하고 찾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오늘 만난 후배들은 이미 본인들 진로를 정하고 상당히 전문적으로 알고 있어서 놀랐고 제가 배웠어요. 자소서 잘 쓰는 방법도 묻고 자기 것을 봐달라고 하기도 했어요. 이런 기회가 꾸준히 있으면 좋을 거 같아요."

누군가가 시켰더라면, 순위를 매기고 경쟁을 해야 했다면, 모두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소감들이었다. 교사들까지 60여 명이 후덥지근한 여름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즐겁다고, 재밌다고, 마주 웃었다.

교권과 학생 인권의 실태, 자사고 지정취소, 교육이슈 앞에 교육 현실이 암울하다고들 한다. 진로특강으로 초대되어 이곳 교실은 '여기가 바로 사제가 주인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현장'이었다. 서로에게 배우고 익히는 교육의 자리에 초대되어 영광이었고 성수고의 이례적이고 성공적인 1박2일 독서캠프가 좋은 교육활동 사례로 확산되기를 바란다.
 
27일(토) 아침, 춘천 성수고 1박2일 독서캠프를 마치며 단체촬영을 했다.
▲ 우리는 아서왕! 독서캠프 끝. 27일(토) 아침, 춘천 성수고 1박2일 독서캠프를 마치며 단체촬영을 했다.
ⓒ 성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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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춘천성수고등학교, #1박2일독서캠프, #아서왕, #스마트폰안쓰기, #책이랑 친구랑 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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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강원도 춘천에 거주하고 있으며 지역주간 신문 '춘천사람들'에서 시민기자로 3년활동했습니다. 춘천의 진솔한 소식 전해드리고자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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