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민주노총은 세계 여성의 날인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3.8 세계여성의 날 전국여성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참가자가 '#Me Too'가 씌어진 피켓을 들고 있다. 2018.03.08
 민주노총은 세계 여성의 날인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3.8 세계여성의 날 전국여성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참가자가 "#Me Too"가 씌어진 피켓을 들고 있다. 2018.03.08
ⓒ 최윤석

관련사진보기


'정치인 관련 미투'로 토론을 벌였다. 책 <미투의 정치학>을 읽고 독서토론 모임 회원들이 모였는데, 다들 내심 한 번은 얘기해보고 싶었노라고 했다. 정치인 A의 성범죄는 규탄하지만, 피해자에 대해 뭔가 석연치 않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쟁점은 이랬다. 한 여성검사의 미투처럼 명징하지 않다는 것. 피해자의 언행이 가해자와 내연 관계라는 추측을 야기할 만하고, 이 부분이 미심쩍다는 주장이 나왔다. 처음엔 가해자의 성폭력에 분개했지만 점차 SNS를 통해 전해지는 피해자에 관한 정보는, 얼마 전 정치인 A의 부인이 자신과 가족이 가장 큰 피해자라 자처했듯이, 어쩌면 피해자가 진짜 피해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품게 한다는 것.

놀라운 발언들이었다. 발언자들이 모두 여성 인권에 눈뜬 이들이기에 더욱 충격이었다. <미투의 정치학>에서 여성학자 권김현영이 지적했듯이, "미투로 분열한 것은 여성들, 그중에서도 남성 중심 문화에 적응하면서 자신도 그 문화의 일부가 된 386세대 진보 여성들이었다".

정치인 성폭력 사건으로 분열된 건 남성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이라는 것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성 내부의 무엇이 어떻게 작동하기에, 여성 인권 옹호자들인 이들조차 피해자의 피해를 의심하게 된 걸까.

정치인 A의 재판이 진행되던 어느 날, 내가 속한 여성인권단체 카톡 방에 이런 글이 불쑥 올라왔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똑같은 '관종'. 똘기 충만..." 피해자를 '관종'이라 멸칭하는 이 글을 보는 순간, 복잡한 감정이 올라왔는데, 분노이기도 했고 당혹감이기도 했다. '여혐 방'이 아닌 여성인권 옹호단체 카톡 방에서 피해자를 가해자와 동급의 '관종'으로 취급하는 글을 만날 줄이야.

토론장에서 분열한 페미니스트들

"피해자와 가해자의 카톡 내용이 상사와 부하 직원이 나눈 대화로 여겨진다고요? 그게 어떻게 이해가 돼요?" 이들이 연인 관계라고 확신하고 있는 토론자 H는, 그렇기에 피해자의 미투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이 연인 관계인가 아닌가가 성폭력 사건의 핵심 질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나는 H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들이 연인 관계인지 아닌지 솔직히 관심도 없지만, 설사 연인이었다 치더라도, 자신을 좋아하는 부하직원의 마음을 이용하여 성을 착취하고 성폭력을 해도 된다는 말인가? 이들이 연인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여성의 내면에는 오래도록 학습된 무언가가 똬리 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폭력 사건이 일어났다고 치자. 이때 가해자의 부인은 자신의 잘못이 없음에도, 그 가해에 관해 사과로 대처하며 피해를 회복시키려고 적극 노력한다. 피해자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합의금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이 광경도 마땅치 않지만 어쨌든, 폭력 가해 사건의 경우, 그 가해 가족 여성 구성원의 대처 양태는 대체로 사과와 수습이다.

하지만 폭력 사건에 '성'이 붙는 순간, 여성들의 태도는 돌변한다. 가족 구성원이 저지른 '성'폭력 사건에, 그 구성원이 아내든, 어머니든, 성폭력 피해를 회복하고자 나서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성'폭력 사건이면, 그때부터 가해를 부정하며 피해자의 피해자성을 의심하고 흠집 내고자 혈안이 된다.

폭력 가해는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성'폭력 가해엔 피해자가 얼마나 피해자다운가를 따질 수 있게 되는 견강부회는 어떻게 성립하게 되는 걸까. 이 근저에, 여자는 '요물, 팜므파탈, 이빨 달린 질, 꽃뱀'이라는 뿌리 깊은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탓은 아닐까. '내 남편은 좋은 사람인데, 내 아들은 순진한 아인데', 요물 같은 불여우의 꼬임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는 이 유구한 신화 말이다. 여성들은 '나 빼면 다 요물'이라는 지긋지긋한 믿음, 즉 '미소지니'(여성혐오)를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모른다.

여성을 '꽃뱀' 혹은 '요물'로 만드는 방식 
   
 게이들이여, 여성혐오에 저항하라
ⓒ pixabay

군에 근무하는 조카가, 부대에서 성희롱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는데, 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댔다. 그러자 조카의 엄마인 내 언니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가시나들이 조심을 해야지. 가만 보면 꼬리치고 다니는 거 다 가시내들이야."

이 정도면 어떻게 얘기를 시작해서 풀어야 할지 참 난감하다. "누가 꼬리를 친다는 거야..."로 시작될 내 반격은 결국 언성을 높이고 얼굴을 붉히며 전개될 터이기 때문이다.

여성 몸 어디에 꼬리를 붙였다 떼었다 하는 장치가 숨겨져 있던가. 꼬리 운운하는 언니 자신은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 '나빼X'의 전형이다. 반격을 포기하고 물러선 나는, 이후 조카에게 여성주의 입문서 몇 권을 배송시켰다.

다음은 한 지인이 자신의 아들의 친구의 일화를 전한 말이다. 지인의 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성적으로 개방된(?) 여학생 B가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나는 이 설정의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이것도 어디까지나 지인의 판단이다) 아들 친구 C가 B와 사귀게 되고 성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얼마 후 둘은 헤어지게 되는데, 여기서 지인의 만평이 점입가경이다. "내가 아들 가진 엄마라 그런지 C가 너무 불쌍해요. 상처받지 않았을까요. xx 같은 B에게 걸려들어 단물만 빨린 거잖아요."

아, 지긋지긋한 여성혐오여...

이 경우, B는 어떻게 '꽃뱀'이 되었을까? 나는 B가 꽃뱀이라는 멸칭을 얻게 된 경위를 파헤치는 일이야말로, 여성혐오를 발본하는 과정이라 믿는다.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이 정말 유효하다면, B는 꽃뱀이 될 수 없다. 성관계는 두 타자의 결합이다. 두 타자의 동의로 이루어진 성행위에, 어떻게 어느 한 쪽은 처음부터 꽃뱀으로 등장하게 되는가? B가 꽃뱀이 되려면, C의 피해가 있어야 하는데, C가 과연 어떤 피해를 입었다는 것일까?

'순진하다'고 규정된 C를 보자. 남성인 C의 '순진성'은 왜 의심받지 않는가. C는 지극히 사적인 성관계를 셀프 폭로하고 비련의 남주인공 코스프레를 자처했다. C가 자신의 성관계를 폭로해 잃을 것이 있다면, 셀프 폭로를 감행했을까? 남성은 성에 의해 비난받지 않는다. 남성은 성에 의해 더러워지지도 않는다.

남자는 아무리 성관계를 많이 가져도 '요물, 꽃뱀, 걸레' 따위로 전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B는 몇 차례의 성관계로, 그리고 그 관계를 함께 가졌을 남자들로부터 사생활이 폭로되어, '꽃뱀'이 되었다. 물론 C를 위시해 B와 관계한 남자들은, 그 어떤 비난도 책임도 지지 않았다. 여성을 '요물'로 만드는 이 기괴한 방식이, 여자 청소년에게도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일화를 전한 지인은 본인이 인정한 대로 아들을 가진 엄마다. 본인은 정숙한 여자라 생각하기에, 혹은 '꽃뱀' 따위와는 전혀 급이 다르다고 생각하기에, 쉽게 B를 비난하고 혐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들을 키우면 아들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불공정한 잣대를 어린 여성에게만 들이대는 일이 내세울 일도 아니지 않은가.

공기처럼 스며 있는 여성혐오
   
 책 <미투의 정치학> 겉표지
 책 <미투의 정치학> 겉표지
ⓒ 교양인

관련사진보기

 
다시 <미투의 정치학> 토론장으로 돌아가 보자. 처음엔 피해자의 미투를 지지하다, 개인적 SNS를 통해 공급되는 정보를 보며 그녀의 미투에 신빙성이 떨어졌다는 K의 발언을 되새겨 보겠다. <미투의 정치학>에서 권김현영이 '유포의 메카니즘'을 지적한 것처럼, 정치인 A에 유리하게 만들어진 정보는 SNS를 통해 삽시간에 유통되며, 피해자의 미투를 의심하는 기폭제가 되지 않았던가.

그렇게 유포된 SNS 정보를 K도 접촉했을 테고,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하며 전달된 정보는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이 왜곡된 정보로 피해자를 의심하게 된 K 또한, 자신의 의심을 의심하지 않은 채, 자신이 접한 불량 정보를 대거 생산 유통시키는 '유포의 메카니즘'에 일조했을지 모른다.

<미투의 정치학>에 대해 토론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여성 무의식에 내면화된 여성혐오가 얼마나 공고한 것인지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미투를 목도하며 여성들도 미투 피해자들을 구분하고 있었다. 피해자답지 못하다고 간주될 때, 가차 없이 의심하고 혐오했다. 유사 이래 여성의 피해자다움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었는지를 틈틈이 망각하면서 말이다.

어떤 피해도 완벽할 수 없다. 어떤 피해자도 순백할 수 없다. 인간이 본디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존재이던가? 완벽한 인간이 없듯이 완벽한 피해자도 없다. 정희진의 말처럼,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다른 목소리'지, '가장 올바른 목소리'가 아니다. '정치인 성폭력 사건'의 질문의 핵심은 정치인 A가 위력으로 성폭력을 저질렀는가여야지,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떤 관계였는지, 피해자가 흠결 없는 피해자인지에 있어서는 안 된다. 누구의 말에 귀 기울이는가는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강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투' 토론을 계기로 나도 내 안의 '여성혐오'를 점검해 보게 되었다. 무수한 소설, 영화, 드라마, 노랫말에까지 등장하던 '나쁜 여자'들을 나는 어떻게 학습해 왔을까. 페미니즘을 탑재하고 젠더감수성 렌즈를 장착해도, 50년 넘게 깊이 내면화된 '여성혐오'를 외투를 벗듯이 단박에 걷어내기란 힘들 것이다. 더 공부하고 더 의심하고 더 다투어봐야 할 이유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 게시 예정


댓글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