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정의당 노회찬(왼쪽)원내대표가 지난 1월 6일 오후 창원시 성산구 S&T 중공업 야외 농성장을 방문해 노동자와 간담회를 하고 있다. 농성장에 있는 S&T 노동자들은 희망퇴직 중단과 임금피크제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
 정의당 노회찬(왼쪽)원내대표가 지난 1월 6일 오후 창원시 성산구 S&T 중공업 야외 농성장을 방문해 노동자와 간담회를 하고 있다. 농성장에 있는 S&T 노동자들은 희망퇴직 중단과 임금피크제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한국에서는 1989년 폴란드를 시작으로 헝가리 등 동유럽국가의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이어서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현실사회주의는 종막에 이른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이 발표되면서 사회주의는 패배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으로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고했다.

같은 시기에 노회찬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다가 구속되고, 풀려나서는 사회주의 이념의 진보정당운동을 전개한다. 현실사회주의 붕괴와 때를 같이하며 한국에서 사회주의를 동경하거나 추구했던 많은 사람이 사상적 전향(?)을 했다.

그들 중 일부는 보수(수구) 정당이나 중도 정당에 들어가 국회의원ㆍ지자체장 또는 입각하여 장관이 되었다. 진보정당운동에 참여하고 노회찬과 가까운 홍세화 씨와 대담했다.

홍세화 : 진보정당의 토대를 주로 자본주의의 발전과정과 수준, 특성을 근거로 말씀해 주셨는데, 여기에는 좀 더 엄밀하면서 객관적인 비교 분석이 따라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념 정당으로서 한국의 진보정당은 어떤 좌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노회찬 : 좌표 문제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라 생각되는데, 이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봅니다. 일단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를 구분할 수 있느냐. 지구상에 현재 교과서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가 존재하고 있는가. 이런 문제가 따라온다고 봅니다.(…)

저는 진보신당의 좌표, 공식적인 노선은 여전히 사회주의적 경향에 있다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기에 민주노동당을 만들 때, 민주주의는 곧 사회주의라고 했는데 그때 말하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원천적으로 극복해야 된다는 문제의식과 더불어 그 모델 혹은 방법론에 있어서 이제까지 실패한 사례와 경험들을 답습하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담고 싶었습니다.

예컨대 북한 모델과 소련 모델, 이런 것들은 물론이고 사민주의조차도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의 모델로서 자리매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언젠가는 우리가 만들어야겠지만 아직은 모델 없이 출발하는 사회주의로의 여정이다, 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저는 그런 지향과 열정을 가진 진보정당이었으면 하는 것이고, 그런 진보정당에서 활동하고 싶은 거죠.(주석 3)


노회찬과 그가 속한 진보정당은 한국사회의 민주화 이행과정에서 적어도 '국민의 복지' 분야에서는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무상급식ㆍ무상교육ㆍ무상의료ㆍ비정규직문제 등이다. 부유세 신설 등은 아직 멀어보이지만.
 
 7.30재보선 서울 동작을 정의당 노회찬 후보.
 7.30재보선 서울 동작을 정의당 노회찬 후보.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와 2014년의 대담을 다시 들어보자.

구영식 : 게다가 최근 복지국가 담론이 제기되면서 당시 그런 전략이 많이 대중화됐다.

노회찬 :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대중화되었다. 나는 이 느낌을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거의 비슷하게 보고 있다. 전두환 체제하에서는 노동자라는 말만 해도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다시 쳐다봤다.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이 비밀결사체를 만드는 것만 같았다. 그랬던 사람들이 6월항쟁 이후 석 달 만에 수천 건의 파업을 일으키면서 스스로 일어섰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얘기하면 빨갱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정치권보다 대중이 그것을 더 빠르게 소화하고, 흡수하고, 요구할 정도로 변했다. 내가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 나갔을 때 가장 센 무상보육 공약을 내세웠다. 만 4세까지 완전 무상보육을 하겠다는 것이다.

한명숙 민주당 후보하고도 달랐고,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는 우리 공약이 황당무계하다며 텔레비전 토론에서 나와 설전을 벌였다. 그것이 2010년인데, 불과 2년 후인 2012년 박근혜 후보의 무상보육 공약은 당시 내가 내세운 것보다 더 셌다. 만 5세 완전 무상보육을 내놓은 것이다.(주석 4)


노회찬의 주위에는 이념과 색깔을 넘어 여러 직종,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다. 특별한 발광체(發光體)가 아닌데도 개성 있는 인물들이 그와 가까이 한 것은 자신들은 하지 못한 일을 그가 하고 있다는 대리보상심리거나, 그의 다양한 취미, 포근한 인품 때문일 것이다.
  
 7.30재보선 서울 동작을 정의당 노회찬 후보.
 7.30재보선 서울 동작을 정의당 노회찬 후보.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베스트셀러 작가 공지영 씨의 소견이다.

수배와 투옥으로 인해 2세를 가질 수도 없었던 것, 최고 학부를 나오고도 줄곧 없는 이들 편에서 제 곁의 수많은 동지들이 보수정당으로 가버릴 때도 그 자리를 지키며 '고생을 사서' 했다는 것. 한마디로 한국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배신'을 하지 않았다는 것….

그는 아마도 한국의 좌파를 일약 역사의 무대에 정식 직원으로 데뷔시킨 장본인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피로 얼룩진 이데올로기의 분쟁사가 난무하는 이 땅에서 머리에 중뿔난 빨갱이를 그 이름도 점잖은 좌파로 태어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주석 5)


노회찬과 같은 당의 평당원이면서 '아흐리만'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인터넷 논객 한윤형씨가 노회찬과 대담하고 덧붙인 글이다.

여운형, 그리고 조봉암 사후 수십 년 만에 진보정당은 간신히 노회찬 같은 인물을 만들어 내었는데, 그 종착지가 어디일지 자못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평화와 지존, 인간적 권리를 향한 그의 긴 투쟁이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조건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내는 결실을 목격할 수 있기를.

긴 대담이 끝나고, 나는 기쁘게도 그가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덧붙이자면 그는 대담을 시작하기 전 아이폰으로 오카리나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나는 그가 연주하는 내내 활을 쥔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저 손은 1980년대 긴 시간 동안 용접공의 손이었다. 그리고 저 손으로 그는 척박한 현실에서 진보정당운동의 앞길을 개척해 왔다.(주석 6)


노회찬의 후년은 정치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국회에서 한국사회를 바꾸기 위해 진보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숱한 법률(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보수로 포장된 수구집단의 힘이 너무 강했다. 국회ㆍ검찰ㆍ법원ㆍ언론ㆍ대학ㆍ대형교회 등 '힘 있고' '기름진 곳'은 대부분 그들이 차지하여 연대하고 세습한다. 21세기 한국은 신신분사회가 되고 말았다.

노회찬은 정운영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의 자질'에 대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대로 세상을 바꾸기 위한 힘을 기르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념대로 세상을 바꾸고자 노력하고 싸웠다.

대단히 유능하고 리버럴한 언론인이고 학자였던 정운영은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면서 극우논객들의 파시즘에 저항하다가 2005년 홀연히 세상을 떴다.

소싯적부터 그는 부단히 '탈출'을 감행했다. 부산의 학교가 지루해서 서울로 도주했고, '범생' 고교 생활을 뒤로하여 운동권 학습에 몰두했다. 인텔리 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나머지 노동 현장에 투신했으며, 노동운동은 그 최고 형태로서 정치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진보정치의 선거판 투쟁에 점화했다. 때마다 숱한 간난신고(艱難辛苦)가 뒤따랐지만 그 탈출은-변신의 도박은-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그는 성사 가능성이 30% 정도면 된다고 했다. 그 30% 여부를 어떻게 아느냐는 물음에는 '관습 헌법'처럼 척 보면 알 수 있다고 둘러댔다.

그러면 나머지 70%의 비결은 무엇인가? 인터뷰를 준비하며 두 가지는 짐작했다. 그 하나는 생활과 운동이 다르지 않더라는 점이다. 운동이 영화(榮華)를 겨냥한 수단이 아니고, 생활이 운동을 방해하지 않아서 오늘이 가능했으리라. 다른 하나는 그가 엄청난 '집념의 사나이'라는 점이다. 기라성 같던 숱한 선배ㆍ동료ㆍ후배들이 양지와 음지로 갈지자걸음을 하는 동안 그는 의연히' 외길 30년'을 버텨왔다.

그러니까 180만 원 수입의 선량(選良)을 언제든지 반납하고 아내가 버는 60만 원짜리 생활로 돌아갈 용기와, 그리고 진보 정치가 유치(幼稚) 업종일 때든 사양 산업일 때든 질기게 매달린 집념이 그 70%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아닐는지.(주석 7)


주석
3> 『진보의 재발견』, 394~395쪽, 발췌.
4>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134~135쪽. 
5> 공지영, 「진정한 좌파의 품위를 보여주도록」, '정운영의 책', 203쪽.
6> 한윤형, 「한윤형, 노회찬에게 묻다」,『진보의 재탄생』, 367~368쪽.
7> 정운영, 「세월이 그대를 희롱할지라도」, '정운영의 책', 머리말.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