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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자료사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자료사진)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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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과 외교부의 은밀한 접촉이 의아했던 판사는 소극적으로나마 '뭔가 잘못됐다'는 흔적을 남겼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의 '사법농단' 재판을 심리 중인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5부(부장판사 박남천)는 10일 박찬익 변호사를 시작으로 증인신문에 들어갔다.

박 변호사는 2012년 2월부터 2014년 2월까지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심의관으로 근무하며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 재판관련 보고서를 작성한 인물이다. 그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도 출석해 일제 강제징용재판 지연 시나리오 등을 검토했다고 밝혔다.

이날 법정에선 검찰 조사나 임 전 차장 재판에서 없던 증언이 나왔다. 박 변호사는 2013년 9월 30일자로 <강제동원자 판결 관련 - 외교부와의 관계>라는 대외비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검찰은 하루 전인 9월 29일 오후 9시 11분에 저장된 보고서를 제시하며 다른 부분이 있다고 물었다.

- '외교부를 배려하여 절차적 만족감을 줄 수 있는 방안' 중 '가. 법원행정처는 사법행정 기관으로 실체적 판단에는 관여할 수 없음에 대한 이해 구함'은 보고서를 거의 완성하는 단계에서 포함했나.
"시간상 그렇다면 그게 맞을 듯하다."

- 임종헌 전 처장 지시가 없었는데도 첫 번째 방안에 이 내용을 포함시킨 이유가 무엇인가.
"외교부가 혹시나 오해할 수 있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기재했다."

일제 강제징용재판은 양승태 대법원이 외교부의 협조를 얻어 법관 해외파견을 늘리기 위해 사건 진행을 늦췄다는 의심을 받는 부분이다. 사법농단 관여자들은 '거래'가 아니라 여러 사정을 감안해 외교부 의견을 듣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지시대로 움직였지만... "외교부가 이런 요구하는 게..."
 
사법행정권 남용, 재판 개입 등 '사법농단' 피고인 (왼쪽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대법관, 고영한 전 대법관이 29일 오전 첫 재판을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하고 있다.
▲ "사법농단" 첫 재판 출석하는 양승태, 박병대, 고영한 사법행정권 남용, 재판 개입 등 "사법농단" 피고인 (왼쪽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대법관, 고영한 전 대법관이 29일 오전 첫 재판을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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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검찰 수사로 양쪽에서 서류가 오가고, 차한성·박병대 법원행정처장과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윤병세 외교부 장관,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소인수 회의'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부터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법원이 소송 당사자도 아닌 행정부와 법정 밖에서 정보를 몰래 주고받았다는 것 자체가 '재판 흔들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변호사가 보고서에 추가한 내용은 당시 실무를 맡은 판사로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흔적인 셈이다.

박 변호사는 임 전 차장의 지시대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도 몇몇 문구를 더하거나 뺐다. 4월 24일 임종헌 전 차장 재판에서 보고서 중 '사법부는 재판의 독립이 절대적 가치'라는 항목도 자신이 추가했다고 밝혔다. 10일에는 같은 보고서 '마. 간접적 방법을 통한 사실상 의견 제출 협조 가능' 중 '외교부와 정보 공유 가능'이 어떤 의미냐는 검사의 물음에 "사실 이 무렵 외교부에서 이런 요구를 하는 게 맞는 건지 하는 생각이 있었다"고 답했다.

그는 또 '강제동원자 판결은 심리불속행 기간을 넘긴 후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박근혜 정부 의견을 반영,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으려는 듯한 표현도 삭제했다고 말했다. 임 전 차장은 이 내용을 포함한 보고서를 작성해 대법원 민사총괄재판연구관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박 변호사는 "사건 심리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고 삭제 경위를 설명했다.

이날 재판부는 박 변호사에 이어 송아무개 전 법원행정처 재판사무국 민사과장의 증인 신문을 진행했다. 송 전 과장은 2013년 10월 하순에서 11월 초순 사이, 최아무개 당시 국장으로부터 일제 강제징용재판 송달이 늦어지는 일로 질책을 받았다. 사건 자체를 몰랐던 그는 부랴부랴 경위를 파악해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 진행 과정에서 차한성 법원행정처장이 '아직도 (송달) 진행이 안 되고 있냐'고 나무랐다는 얘기를 들었다.

차 법원행정처장은 그해 12월 1일 김기춘 비서실장 공관에서 열린 '소인수 회의'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2013년 9월 4일 최종 접수했는데, 별다른 사정이 없으면 4개월 안에 심리불속행으로 기존 판결을 확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차 법원행정처장의 얘기는 일제 강제징용 재판 피고, 일본 기업들에게 소송 서류를 늦게 전달하면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재판 진행은 계속 미뤄졌고, 2018년 10월 30일에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결론이 나왔다.

태그:#양승태, #사법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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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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