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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더운 여름날, 당시 전공의였던 나는 보건관리 업무를 위해 한 휴게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건강 상담이 끝난 뒤 현장 순회를 위해 휴게소 내의 여러 시설을 둘러보던 중, 손님이 아무도 없는데도 서서 대기하고 있는 편의점 여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상담을 할 때 허리 통증을 호소했던 분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계속 서 있으시면 허리가 더 아프지 않으세요? 손님이 없으실 때만이라도 좀 앉아 있으시지요." 그러자 그 여직원이 쓴웃음을 지으며 "여기는 의자가 없어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계산대 뒤쪽으로 건너가 보니 휴지통과 몇 가지 개인 짐만 놓여있을 뿐 정말로 의자는 없었다.

비록 아무런 동작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몸을 똑바로 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신체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따라서 장시간 서서 근무할 경우, 하지 근육의 피로도를 증가시키며 하지 정맥류, 족저근막염, 요통의 발생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 직업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근무 중 틈틈이 의자에 앉아있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위에서 가끔 감사가 내려오기 때문에 앉아 있으면 안 된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좀 더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 담당자를 찾았다. 마침 담당자는 편의점 옆 중앙계산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그분 또한 계속 서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담당자의 말로는 자신이 속한 사업장은 한국도로공사로부터 용역을 받아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상황인데 가끔 도로공사에서 운영서비스평가를 하러 내려올 때가 있기 때문에 근무 태도 등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판매 직원이 앉아 있으면 평가 점수가 깎이는 거냐고 되묻자, 자신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노동자의 앉을 권리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80조에는 '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때때로 앉을 기회가 있으면 해당 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갖추어 두어야 한다.'라고 노동자의 앉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또한 2년 전에 우리 기관에서 이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시한 근골격계유해요인조사에서도 조리, 판매, 가판 등의 부서에서 근로자들이 장시간 서서 일하고 있어 허리 및 다리의 부하를 감소시키려는 조치가 필요함을 제기한 바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용역을 받는 입장에서 이 권리를 보장해 주었을 때 불이익을 받을 위험이 있는 한, 내가 아무리 작업 환경 개선을 요구하더라도 반영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휴게시설 운영서비스 평가 시 고려 사항이 아님

우선은 정말로 도로공사 평가 시에 직원들의 앉아있는 자세가 점수에 반영되는지를 명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로 보였다. 나는 한국도로공사에서 실시하는 '휴게시설 운영서비스평가'의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하여 해당 평가 시 직원이 앉아있다면 평가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았다. 담당자는 비록 평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원이 고객을 응대할 때의 언행을 반영하기는 하나 직원이 서거나 앉아있는 자세는 평가 항목에 없다고 했고, 내가 여러 차례 되물었지만 앉은 자세가 점수에 반영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답변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해당 사업주는 아마 정확한 확인 없이 막연하게 직원은 항상 서서 근무하는 것이 더 친절하고 공손해 보일 것으로 생각하여 그렇게 지시한 것이 아닐까? 나는 법적 근거, 의학적 소견, 한국도로공사로부터 받은 답변 등을 첨부하며 이들에게 잠시 앉거나 기댈 수 있는 입좌식 의자의 지급을 권고함과 동시에 이들이 고객을 응대하지않을 때에는 틈틈이 앉을 수 있도록 지도해 주기 바란다는 소견서를 작성하여 담당자를 통해 사업주에게 전달했다.

 
노동자 뒤쪽에 의자가 놓여 있을 경우, 보통 엉덩이와 의자 간의 거리는 50cm가 채 되지 않는다. 앉을 권리를 집단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짧은 간극을 메우는 일 조차 아직도 요원한 듯 보인다.
 노동자 뒤쪽에 의자가 놓여 있을 경우, 보통 엉덩이와 의자 간의 거리는 50cm가 채 되지 않는다. 앉을 권리를 집단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짧은 간극을 메우는 일 조차 아직도 요원한 듯 보인다.
ⓒ 이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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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노동자에게 여전히 먼 50cm

노동자 뒤쪽에 의자가 놓여 있을 경우, 보통 엉덩이와 의자 간의 거리는 50cm가 채 되지 않는다. 앉을 권리를 집단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짧은 간극을 메우는 일은 아직도 달성하지는 못한 듯 보인다. 판매직 노동자의 의자에 앉을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은 지난 2008년 전국적인 캠페인을 통해 사업주의 법적 의무에 의자 비치가 추가되는 등 소기의 성과가 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2018년 김승섭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판매노동자의 27.5%가 일하는 곳에 직원용 의자가 없다고 응답했으며 의자가 있어도 사용할 수 없다는 답변 또한 37.4%나 되어 판매노동자의 3분의 2는 온종일 서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판매노동자에서는 일반 여성에 비해 무려 하지정맥류가 25.5배, 족저근막염이 15.8배, 엄지발가락이 휘는 무지외 반증이 67.0배나 더 발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병을 예방하기 위한 다양한 개선방안은 큰 비용이라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현장에 반영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수록 앉을 권리 보장과 같이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면서도 장기적인 효과가 있는 개선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권리요구 및 고용노동부의 철저한 관리 감독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후원회원이신 직업환경의학전문의 이정엽님이 작성하셨습니다. 또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7월호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태그:#쉴권리, #앉을권리, #판매노동자, #고객응대노동자, #휴게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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