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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액션영화를 보다가 종종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도대체 경찰은 언제 와?" 주인공이 치열한(그리고 기나긴) 전투 끝에 악당의 음모를 저지하고 건물 밖을 나서면 그때서야 하나둘 경찰차들이 모여들면서 현장을 정리한다. 이 같은 '경찰의 지각 등장'은 일종의 클리셰(틀에 박힌 공식, 장면 등)가 된 지 오래라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할 지경이다. 그런데 경찰들은 대체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나는 걸까?

물론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활약할 시간을주기 위해서다. 주인공이 단독으로 영웅적인 행동을 하는 걸 즐기는 성격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현실에서는? 신고 내용의 진의를 의심하거나, 시급성을 오판하거나, 심지어 최근에는 제때 출동해놓고는 가해자가 '우리끼리 일'이라 하니 물러나 방관한 사례도 있다(인천 서구 폭행사건). 경찰의 자질에 대해 의문부호를 찍게 만드는 경우들이다.
 
다큐 <플린트 타운(Flint Town)>의 한 장면
 다큐 <플린트 타운(Flint Town)>의 한 장면
ⓒ 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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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 떠난 도시엔 범죄가 싹텄다

하지만 지금 소개할 다큐멘터리의 경찰들은 다소 억울할 법도 하다. 미국 플린트 시(미시간 주)에서 근무하는 경찰들의 1년간을 관찰한 넷플릭스 8부작 다큐멘터리 <플린트 타운(Flint Town)> 얘기다. 이곳 경찰들은 자꾸 늦는다. 당장 전화기 너머에서 총소리가 들릴 만큼 심각한 상황임에도, 경찰들이 도착할 즈음이면 용의자는 이미 도망가고 없다. 경찰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서다. 인력이 부족하니 연장노동으로 공백을 채워야 한다. 시는 연장노동에 따른 수당을 제대로 지급해주지도 않는다. 애초에 예산이 부족해 인력이 부족한 것이니, 수당을 제대로 주기 어려울 수밖에.

돈 많다고 소문이 자자한 미국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는데, 일단은 다큐멘터리의 배경이 된 플린트 시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자동차 산업의 성지였던 디트로이트 시 인근에 있는 도시로, 제너럴모터스(GM)가 창업해 성장한 곳이라 한때 중산층 비율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주요 공장들이 인건비가 싼 해외로 이전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 중 하나가 됐다. 도시가 황폐화되고 가난해지면 범죄 싹트는 법이다. 얼마나 많이 싹텄는지, 2000년대 이후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를 꼽으라면 몇 손가락 안에 들 지경이 됐다.

300명이었던 경찰이 98명으로

경찰 인력은 고정돼 있는데 범죄율이 높아지면 당연히 성과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범죄가 발생하는 조건(빈곤, 도시환경 등)을 손보거나 경찰을 더 뽑아야 할 터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다른 경로를 간다. 성과가 안 좋으니 경찰에 대한 투자를 줄이는 것이다!

<플린트 타운>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한다. "플린트의 경찰 예산은 지난 10년간 삭감되어 300명에서 줄어든 98명(의 경찰)이 시민 10만 명을 지킨다. 플린트는 미국에서 경찰의 수가 가장 적은 지역이다." 300명이 지켜야 할 곳을 98명이 지킨다는 것은 다시 말해 약 300명을 커버해오던 경찰 한 사람이 이제는 약 1000명을 커버해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 계산을 해보면 업무량이 3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임금인상률과 연장수당은 줄어들고 교대자가 부족하니 노동시간은 늘어날 것을 고려하면 업무의 강도는 그 이상으로 늘어났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겠다. 그래서 플린트 시의 경찰들은 자꾸 늦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태로워진 치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건을 개선하기보다 자본주의 논리로 경찰의 노동을 쥐어짜는 방식을 택한 결과다. 그 결과는? 경찰의 의욕 저하와 역량 부족, 피로도 상승으로 치안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게 되고, 그 틈에 다시 범죄가 싹튼다. 범죄율이 높아져 경찰 예산이 줄어들고 그 결과로 다시 범죄율이 높아지는, 치명적인 악순환. 불러도 오지 않고 상황이 종료된 뒤에야 나타나는 경찰을 플린트 시민들이 신뢰할 리가 없다. 불신이 커지고 지역사회는 원자화된다. 이 와중에 몇 가지 정세들(납 수돗물 사태, 퍼거슨 시위)이 겹치면서 플린트는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지난 7월 6일 토요일 "더 이상 죽음은 안된다"고 외치며, 공공운수노조 전국집배노동조합 우편노동자들이 집회를 열었다. 집배원 과로사를 막기 위해 정규인력증원과 토요택배완전폐지를 요구하며, 101명이 삭발을 하고 집배원을 살리 위한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지난 7월 6일 토요일 "더 이상 죽음은 안된다"고 외치며, 공공운수노조 전국집배노동조합 우편노동자들이 집회를 열었다. 집배원 과로사를 막기 위해 정규인력증원과 토요택배완전폐지를 요구하며, 101명이 삭발을 하고 집배원을 살리 위한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 공공운수노조(늘푸른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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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린트의 경찰과 한국의 집배원

<플린트 타운>은 건강하게 노동할 권리를 자본의 논리가 찍어누를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바꿔 말하면,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단지 특정 개인의 '워라밸' 문제에 그치지 않고 그 노동을 제공받는 사람들의 삶의 질까지 오르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서비스나 안전과 관련한 노동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종종 건강하게 노동할 권리를 특정 개인의 문제로만 이해한 채 '밥그릇 싸움' 정도로 치부하는데, 그것이 나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두컴컴한 플린트 시의 골목 귀퉁이에서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태평양 너머 한국에서도 플린트 시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막 상반기를 지나고 있을 뿐인데 올해만 벌써 9명의 집배노동자가 사망했다. 6월 19일에도 49세 집배노동자 한 사람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뇌출혈은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는 질환이라고 한다. 전국우정노동조합은 그의 빈소에서 "집배원의 죽음의 행렬을 멈추려면 인력 증원과 완전한 주 5일제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성명을 냈다.

작년 10월 우정산업본부 노사와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발표한 보고서(「집배원 노동조건 실태 및 개선 방안」)에 따르면 집배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연 평균 2745시간에 달한다고 한다. 1일 노동시간으로 환산하면 11시간 6분이다. 그나마도 지역 평균이고, 인구가 집중된 수도권을 개별적으로 들여다보면 최대 3113시간까지 일하는 지역(남양주시)도 있을 정도다.

물론 치안을 관리하는 경찰의 업무와 비교하면 시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은 상대적으로 적을지 몰라도, 여전히 우리의 일상이 우편·등기·택배로 꾸려져 있음을 생각하면 집배노동자의 과로사는 단지 그들의 문제로 그칠 수 없다. 집배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을 여기서 멈춰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문화사회연구소 강남규 연구원님이 작성하셨습니다. 또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7월호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태그:#플린트타운, #집배원, #과로사,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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