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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풍경
▲ Camino de Santiago 순례길 풍경
ⓒ 이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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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심플하게, 목표는 거창하게

38L 배낭을 가득 채워 어깨에 메고, 몸에 딱 붙는 탄탄한 기능성 옷에 등산화를 신었다. 40일간 특별한 여행을 위해 필요한 차림새다. 프랑스 남부 국경 마을인 '생장 피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시작해 스페인의 땅끝마을 '피스테라(Fisterra)'까지 이어지는 900km 여정이 시작됐다.

이 길의 이름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스페인 북서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향한 길이다. 이 순례길은 중세시대부터 이어져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시작한 여행은 아니지만, 왠지 마음이 경건해졌다.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의 버킷리스트이기도 한 이 길을 나는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 걸었다.

​순례길을 걷는 코스는 한 가지뿐만이 아니다. 대서양 해안을 따라 걷는 포르투갈 길, 마드리드 길, 북쪽 길 등 다양한 곳에서 순례를 시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순례자가 생장에서 출발하는 '까미노 프란세스' 길을 택하며, 그 외의 지역에서 출발하더라도 그 길의 끝에서는 모두가 '산티아고'로 모인다.

순례를 시작하기 전 해야 할 일은 생장에 있는 '순례자 사무소'에 방문하는 것이다. 마을에 도착한 후 샛노란 페인트로 길 곳곳에 그려져 있는 화살표들을 따라 걷다 보면 큼직한 벽돌로 지어진 순례자 사무소가 나타난다.

순례자임을 증명해줄 크레덴시알(순례자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이삼십 명의 순례자들이 줄 지어 서 있다. 하얗고 두툼한 종이로 만들어진 크레덴시알은 순례길을 걸으며 항상 지녀야 할 신분증이다. 길을 걷는 중에 만나는 식당이나 성당, 숙소 등에서 '세요(Sello)'라고 불리는 스탬프를 하루 두 개 이상 찍어야 순례를 마친 후 순례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산티아고에 다다를 즈음엔 각종 개성 있는 스탬프가 잔뜩 찍혀 있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사무실 벽에 붙은 종이를 보니 순례길을 찾는 전 세계 사람 중 한국인이 차지하는 순위가 6위라고 적혀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 때문인가.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한 스페인과 가까운 유럽 국가들을 제외하고 보면 거의 1위인 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사무소에서 받은 가이드와 크레덴시알을 들고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운해
▲ Camino de Santiago 운해
ⓒ 이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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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새벽 6시. 시작하기도 전부터 몸이 무겁다. 짧지 않은 여행이기에 꾹꾹 눌러 담은 배낭 때문일까. 족히 10kg은 될 듯한 무게를 어깨에 얹었다. 문득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읽은 순례길에 관한 글에서 배낭의 무게를 '삶의 무게'라고 빗대었던 것이 떠올랐다. 삶의 무게라기보단 욕심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이 길을 다 걷고 나면 짊어졌던 욕심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하기를 고대하며 산티아고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처음으로 만나는 곳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산맥'이다. 순례길 전체 코스 중에서도 난도가 높은 축에 속하는 피레네산맥 코스는 고도 1400m 정도로 험준한 오르막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산맥으로 올라가는 포장도로를 걷고 있을 때 자동차 한 대가 서서히 옆에 멈추었다. "꼬레아? 꼬레아?" 스페인 사람인지 프랑스 사람인지 모를 백발의 할아버지가 한국 사람이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조롱박 하나를 선물로 준다. 피레네산맥에서 조롱박을 선물로 받을 줄이야.

호리병 모양의 박을 허리춤에 매고 다시 걸었다. 한참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첫날 걸어야 하는 코스는 26km로 14km가 오르막길 코스, 나머지는 내리막길이다. 순례에 나서기 전 체력단련을 했거나 등산을 즐겼던 사람들은 괜찮았지만 걷는 것에 적응이 안 된 순례자들이 가파른 내리막으로 인해 무릎을 다치기도 했다. 등산용 스틱을 준비하면 가파른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 코스에서 큰 도움이 된다.
 
하루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순례자들
▲ Camino de Santiago 하루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순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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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하루

하루 치 코스를 다 걷고 나면 도착한 마을에서 하루를 묵게 된다. 순례자들이 묵는 숙소를 '알베르게(Albergue)'라고 부르는데, 공립 알베르게와 사립 알베르게가 있다.

공립은 대부분의 순례자가 찾는 숙소로 도미토리 형식으로 되어 있고 값이 저렴하지만 마을에 늦게 도착하면 자리가 꽉 차 묵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사립 알베르게는 공립보다 값이 비싼 대신 조금 더 깔끔하고, 조식을 제공해주는 곳도 있어 취향에 맞는 숙소를 고를 수 있다. 보통, 새벽 6시에 길을 나서 오후 3시쯤 마을에 도착하면 공립 알베르게에는 자리가 넉넉했다.

순례자들 하루는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마트에 가서 저녁거리를 사거나, 하루 동안 묵게 될 마을을 둘러보기도 한다. 스페인의 여름 오후는 거의 4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가 이어져 '시에스타(Siesta)'라는 브레이크 타임이 있다. 오후 1시부터 4시 사이에는 마트나 식당이 문을 닫으니 여름철에는 그 시간대를 피해 방문하는 것이 좋다.

마트가 문을 열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많은 사람이 성당을 찾는다. 모든 마을마다 성당이 하나씩은 꼭 있는데, 개중에는 100여 년이 넘은 유서 깊은 성당도 있다. 길 위를 온종일 걷고 나서 고요한 성당에 앉아 있자니 없던 독실함까지 생기는 듯하다.
   
스페인 대표음식 빠에야
▲ Camino de Santiago 스페인 대표음식 빠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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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둘러보고 성당을 방문해 스탬프까지 찍고 나면 마트에 가서 저녁을 위한 장을 본다. 알베르게에는 공용 부엌이 준비되어 있어 순례길을 걷는 전 세계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음식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며 서로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기도 한다. 말은 잘 안 통해도 마음은 통한다.

걷는 동안 한국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났다.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 직장을 그만두고 길에 나선 사람, 정년퇴직 후에 함께 순례길을 찾은 부부, 휴가를 내고 여행에 나선 직장인. 모두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이 길을 찾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했다. 떠나온 이유가 대단하지 않아도, 순례에 큰 뜻이 없어도 괜찮았다. 이 길 위에서 모두가 행복하다고 말했다.

[여행 팁] "Buen Camino(부엔 카미노)!" 길을 걷는동안 순례자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인사다. 스페인어로 '좋은 길'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당신이 앞으로 걷는 길이 좋은 길이 되기를 바란다"는 인사말이다. 여행 중 길을 걷다 마주치는 이에게 외쳐보자.

태그:#여행, #스페인, #순례길, #까미노데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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