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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통일문화재단은 지난 1999년부터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에 기여한 공로가 큰 (역사 속의 인물 포함) 개인이나 단체'에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수여한다. 1999년 제1회 수상자는 고 윤이상 선생, 2002년 제4회 수상자는 고 정주영 현대회장, 2007년 제9회 수상자는 고 리영희 한양대 교수였다. 그리고 생존한 수상자로는 2011년 제13회 재미통일운동가 이행우 선생과 2015년 제17회 재미통일운동가 신은미 선생 등이 있다.

아마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통일운동이 위축되거나 불온시 되는 풍토라서 그런지 2년 전인 2017년에는 아예 수상자가 없었다. 올해의 수상자로는 이재봉 원광대 교수 등이 선정되었는데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은 "남북 당국간 대화가 막혔을 때 수상자들이 펼친 민간 교류협력과 통일평화운동이 꺼져가는 대화의 불씨를 살리고 평화의 안전판 구실을 했다"며 그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재봉 교수는 1950년대 평화통일을 주장하다 옥고를 치룬 평화운동가 고 함석헌 선생(1901-1989)의 사상을 기리는 함석헌학회 회장을 최근까지 맡기도 했다. 그래서 <함석헌평전>의 저자인 기자는 반가운 마음으로 이재봉 교수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그리고 다음은 지난 6월 28일부터 7월 6일까지 이재봉 교수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한반도 평화통일 걸림돌은 미국의 패권주의 대외정책"
 
 이재봉 교수
 이재봉 교수
ⓒ 이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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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수상을 축하드린다. 2년 전인 2017년에는 수상자가 아예 없었는데 어떻게 해서 본인이 올해 이 상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나?
"글쎄. 누가 무슨 이유로 추천했는지 모르겠다. 7월 9일 시상식에서 심사위원장이 심사경과와 선정사유를 보고할 것이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서 보낸 통일문화상 시상식 초대장엔 내가 '1990년대 북한 식량난을 계기로 통일운동을 시작한 후 전북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풀뿌리 통일평화운동을 지속하며 평화적 수단에 의한 통일을 주창해왔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지난 7월 4일 <한겨레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이재봉 교수는 통일 평화 연구에만 머물지 않고 남과 북이 더불어 살기 위한 풀뿌리 통일운동을 전북 지역 등에서 꾸준히 펼쳐왔다. 재단은 이 교수가 수도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전북 지역에서 헌신적으로 통일운동을 꾸준히 전개한 노력을 높게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현대 평화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요한 갈퉁 교수의 제자인 이 교수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란 스승의 가르침을 국내에 전파했다.'"

- 이력을 보니 상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그 후 직장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에 뒤늦게 대학에 갔다고 했다. 당시 인문고를 안가고 상고를 간 이유는? 그리고 직장생활은 왜 만족하지 못했나? 또 뒤늦게 대학에 간 사연이 궁금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주산을 시작해 6학년 때 유단자가 됐다. 주산선수로 활동하기 위해 1960~1970년대 주산부로 이름난 동대문중·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해 돈 버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직장에서 고졸 출신과 대졸 출신의 봉급차이가 너무 크다는 걸 깨닫고 불만이 생겼다. 집안이 가난했지만 내가 돈 벌지 않는다고 굶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직장 그만두고 군대에 다녀와 대학에 간 거다."

- 미국에서 대학원 10년 다니는 동안 북한이나 통일문제에 대해 관심도 적었고 공부도 하지 않았지만, 1994년 여름 귀국하자마자 <북한사회의 이해>를 강의하면서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북한이나 통일문제에 관심이 적은" 학자가 '북한'에 대해 가르치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
"1994년 7월 귀국해 9월 한 대학의 시간강사로 취직했다.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라 북한이 곧 무너지고 통일될 거라며 <북한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에 수강생이 넘치는 바람에 분반된 과목을 떠맡게 됐다. 학과장에게 북한에 관해 공부한 게 없는데 어떻게 강의하겠느냐며 다른 과목을 맡을 수 없는지 조심스레 물었더니 그분의 대꾸가 재미있었다. 한국 사람이 정치학을 전공하면 북한에 관한 공부는 기본이라는 것이었다.

시간강사로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한국인 정치학자로서의 기본을 갖추기 위해 북한에 관한 공부를 해야 했다. 첫 수업 때 수강생들에게 북한에 관한 나의 무식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나는 여러분을 통해 배우고 여러분은 나를 통해 배우는 수업'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그리고 도서관과 책방을 뒤져 북한 관련 책은 모조리 구해 학기 내내 거의 매일 밤새워가며 공부했다."

- 결국 북한에 대해 연구하고 강의하게 되면서 더욱 평화통일문제의 중요성을 느낀 것인지?
"그뿐만이 아니다. 국내외의 다양한 자료들을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 현대사의 적지 않은 부분이 특히 북한과 관련해 널리 잘못 알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980~1990년대 미국에서 대학원 다니면서 북한에 관한 왜곡과 편견이 우리 사회에 꽤 퍼져 있으리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심할지는 몰랐다. 한편으로는 뒤틀려 서술된 역사에 억누르기 어려운 분노를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하나 새롭게 깨우쳐 가는 과정에 짜릿한 쾌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 붕괴,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 지난 1998년 김영삼 정부 시절 정부의 방해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약 5억 원을 모아 북한에 식량을 보냈고, 이를 계기로 1998년 전라북도와 함경남도 자매결연을 추진해보겠다며 일주일간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평양을 처음 방문하고 느낀 감회가 많을 것 같은데?
"1998년은 북한 경제가 바닥을 쳤다고 하던 때다. 여기저기 많이 다니면서 지방뿐만 아니라 평양시내에서 극심한 경제난의 실상을 직접 보고 겪었다. 어딜 가든 길가엔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등에 봇짐을 짊어진 초라한 행색으로 힘없이 걷는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길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 드러누운 사람들도 보였다.

이렇게 끼니도 잇지 못할 정도로 어렵다면 차라리 붕괴되어 남한에 흡수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품을 정도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남한과 미국에서 북한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거나 몇 년 안에 붕괴될 것이라는 주장이 기승을 부릴 때 난 강연이나 논문을 통해 북한 붕괴는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반박하던 터에 말이다."

-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 2016년 대선 후보일 때부터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오히려 힐러리 클린턴 후보보다 낫다고 주장해왔는데 그 이유는?
"그의 대외정책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정책 기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트럼프가 내세운 고립주의(isolationism)는 미국이 자신의 국가안보에 지장이 초래되지 않는 한 세계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외교방침이다. 국제기구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나 지원을 줄이고 군대의 해외파견을 자제하거나 이미 외국에 주둔하는 미군을 철수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세계경찰' 같은 광범위한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클린턴이 내세운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는 말 그대로 미국의 국제적 역할을 유지하거나 확대하겠다는 외교방침이다. 국제기구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나 지원을 늘리고 군대를 해외에 전진 배치시키며 세계문제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개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주의 대외정책을 앞세우며 100번 넘게 전쟁을 일삼았다. 그런데 트럼프는 미국이 다른 나라로부터 직접 무력공격을 당하지 않는 한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가 성차별, 종교차별, 인종차별을 일삼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개죽음을 당할 수 있는 전쟁은 단 한 번이라도 덜 치르리라고 예상한 것이다."

-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평가하는지?
"미국의 패권주의 대외정책이다. 급속하게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한국전쟁을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주한미군을 유지할 명분이 약해지거나 사라지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을 유지하기 위해 평화협정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것이다."
 
- 남북이 분단된 지 어느덧 74년이 된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에서는 빈부격차도 많이 나고 이질적인 '두 나라'가 통일되기 보다는 차라리 계속 따로 사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남북한의 통일정책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이 나오는 것 같다. 특히 남한의 통일정책은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을 통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가운데 빈부격차와 이질감을 줄이면서 서서히 통일하자는 것이다. 급격한 통일은 사회혼란과 막대한 경비가 들겠지만, 점진적 통일은 사회혼란을 초래하지도 않고 막대한 경비가 들어가지 않으면서 분단에 따른 엄청난 폐해를 없앨 수 있다."
 
"남북, 평화협정 맺어야 하며, 북미수교로 나아가야"

 
 이재봉 교수
 이재봉 교수
ⓒ 이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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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30일 문재인, 김정은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모두 함께 판문점 DMZ에서 역사적이고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다. 향후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서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의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보는지?
"이제 첫걸음을 뗐을 뿐이다. 우선 전쟁부터 끝내야 하고, 평화협정을 맺어야 하며, 북미 수교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비핵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 최근까지 지난 3년간 함석헌학회 회장을 지냈는데 함석헌 선생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그의 '비폭력' 사상과 운동 때문이다. 나는 1990년대 미국 대학원에서 평화학과 비폭력정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함석헌 선생이 가장 존경했던 간디를 나도 가장 존경한다. 간디나 함석헌이나 나는 폭력을 거부한다. 내가 이메일을 포함해 각종 SNS의 아이디로 쓰고 있는 'pbpm'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peace by peaceful means)'의 약자다."
 
- 통일운동가로서 향후계획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제1목표로 삼고 싶다. 1950년대의 한국전쟁을 아직도 끝내지 못하고 있잖은가. 전쟁종식이나 평화협정 체결은 정부차원에서 하는 것이지만, 민간차원에서 그런 분위기나 여론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 이재봉 교수는
1983년,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정치외교학사)
1990년, 미국 텍사스텍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석사)
1994년, 미국 하와이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경력
1994-1995년, 동국대학교 국제관계학 강사
1996-2019년 현재,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
1999-2019년 현재,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 대표
2002-2003년,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방문강의교수
2009-2016년 현재, 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장
2013-2015년, 원광대학교 사회과학대학장
2013-2016년, 원광대학교 한중정치외교연구소장
2015-2019년 현재, <통일경제포럼> 공동대표
2016-2019년, <함석헌학회> 회장

대표 저·편·역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2000.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 2001.
<두 눈으로 보는 북한>, 2008.
Korea: The Twisting Roads to Unification, 2011.
Korean Reunification: Alternative Pathways, 2012.
<G2시대의 한중관계>, 2014.
<이재봉의 법정증언>, 2015.
<문학과 예술 속의 반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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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