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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기사수정 : 8월 1일 오후 2시 36분]

일제 침략이 가시화되면서 힘을 키워 국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인재를 길러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도 활발해지는데, 이 과정에서 '도서관'을 통해 인재를 길러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대구에 세워진 '우현서루'(友弦書樓)는 1904년 경주 이씨 가문의 금남(錦南) 이동진(李東珍)이 사재로 설립하고 그의 아들인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가 운영한 '도서관'이다. 우현서루는 한때 국내외에서 수집한 일만 권의 장서를 보유했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만권당'(萬卷堂)이었던 셈.  

일제의 국권 강탈 과정에서 대구 지역에서 일어난 도서관 건립 시도는 흥미롭다. 경주 이씨 가문이 세운 우현서루뿐 아니라 남평 문씨 가문은 '인수문고'(仁壽文庫)라는 문중문고(門中文庫)를 만들어 가문 차원의 인재 양성에 힘을 썼다. 인수문고 역시 만권당으로 불릴 만큼 장서량이 많았다. 

대구의 또 다른 만권당, 남평 문씨 인수문고
 
남평 문씨 ‘인수문고’ 인흥 세거지의 남평 문씨 서고는 인수문고를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인수문고 왼편에는 ‘거경서사’(居敬書舍)가 오른편에는 ‘중곡서고’(中谷書庫)가 자리하고 있다. 남평 문씨가 자리잡은 인흥 마을은 인흥사 옛터로 일연 스님이 11년 머물며 <삼국유사>의 뼈대에 해당하는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작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 남평 문씨 ‘인수문고’ 인흥 세거지의 남평 문씨 서고는 인수문고를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인수문고 왼편에는 ‘거경서사’(居敬書舍)가 오른편에는 ‘중곡서고’(中谷書庫)가 자리하고 있다. 남평 문씨가 자리잡은 인흥 마을은 인흥사 옛터로 일연 스님이 11년 머물며 <삼국유사>의 뼈대에 해당하는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작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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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에 있는 남평 문씨 인흥 세거지에는 지금도 인수문고가 있다. 남평 문씨는 고려 때 목화씨를 전한 문익점의 후손으로, 근래에는 대구시장 문희갑, <서울신문> 사장 문태갑을 배출한 집안이다. 남평 문씨가 인흥에 자리를 잡은 것은 1830년 무렵으로 역사로 따지면 2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인흥마을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이 11년 동안 머문, 인흥사가 있던 절터다. 

대구한의대 송의호 교수에 따르면, 1910년 수봉(壽峯) 문영박(文永樸)은 부친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과 함께 '광거당'(廣居堂)을 짓고 영남과 서울, 중국에서 서책을 사서 모았다. 이렇게 모은 귀한 서책으로 '만권당'을 열었다. 이것이 '인수문고'의 시작이다. 책이 모이자 학식 있는 사람이 모이고 이들과 교류가 시작됐다. 영남 유학자뿐 아니라 정인보, 임창순, 조병옥 같은 명사도 광거당에 묵어 갔다고 한다.  

만권당은 1970년 '존안각'(尊安閣)을 거쳐, 1975년 현대식 서고를 다시 지으면서 '인수문고'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1095종 6948책의 장서를 가지고 있고, 서책은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하고 있다. 

만권당을 연 수봉 문영박은 "서책은 부형이 애써 간직한 것으로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애호하여 펼쳐볼 때는 더럽히거나 찢어지지 않게 하라. 또 가볍게 남에게 빌려 주어서는 안 된다. 만약 하는 수 없이 빌려 주게 되면 반드시 장부에 기록했다가 곧 돌려받으라"는 규약을 후손에게 남겼다. 그래서인지 인수문고의 서책은 이빨이 빠진 '낙질'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서책을 모아둔 도서관에 그치지 않고 광거당은 목판을 새겨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남평 문씨 집안의 책 모으기와 도서관 운영은 선조 대에 그치지 않았다. 중곡 문태갑은 한국학 자료를 인사동 고서점을 통해 수집하고 지금도 꾸준히 책을 모아 별도의 건물에 보존하고 있다. 인수문고 옆에 자리한 '중곡서고'(中谷書庫)는 중곡이 수집한 현대의 책을 갖추고 있다. 인수문고가 '고전'(古典)을 수집한 도서관이라면 중곡서고는 '현전'(現典)을 갖춘 도서관이다. 

만권당 우현서루를 아시나요? 
 
량치차오(梁啓超) 중국의 근대 개혁가이자 사상가, 교육자인 량치차오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제자로 무술변법운동의 주역이다. 무술변법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쑨원(孫文)의 중화민국에 합류했다. 정치 활동을 이어가다가 정계를 떠나 교육과 강연, 연구에 몰두했다. 량치차오는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큼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 량치차오(梁啓超) 중국의 근대 개혁가이자 사상가, 교육자인 량치차오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제자로 무술변법운동의 주역이다. 무술변법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쑨원(孫文)의 중화민국에 합류했다. 정치 활동을 이어가다가 정계를 떠나 교육과 강연, 연구에 몰두했다. 량치차오는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큼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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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만권당이지만 남평 문씨 인수문고와 달리 우현서루는 그 대상을 경주 이씨 문중에 한정하지 않았다. 대구와 영남은 물론 전국의 인재에게 열린 공간이었다. 교육기관조차 드물었던 그 시절, 만권지서(萬卷之書)를 모아 '도서관'을 통해 인재를 키워내자는 시도 자체가 근대적 접근이 아닐 수 없다. 

1905년 금남 이동진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아들인 소남 이일우가 우현서루를 이어받아 운영했다. 이일우는 1904년 우현서루에 이어 1905년에는 우현서루에 '시무학당'(時務學堂)을 만들었다. 

'시무학당'은 중국의 지식인 량치차오(梁啓超)가 처음 사용한 말로 중국인에게 신학문을 가르쳐 부국강병을 통해 중국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의미였다. 이일우도 같은 맥락에서 시무학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나 싶다. 

우현서루는 도서관이고 시무학당은 일종의 학교였다. 우현서루와 시무학당을 분리해서 운영한 것으로 보이진 않고 도서관과 함께 교육기관을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정나라를 구한 현고
 
춘추시대 제후국 분포도 정나라는 주나라와 송나라 사이에 위치했다. 서쪽 지역의 패자 진나라는 정나라 내부의 호응을 이용해 정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정나라를 멸망에서 구한 사람은 상인 ‘현고’다. 현고의 기지로 정나라는 침략을 피했고, 목표를 바꾼 진나라 군대에 의해 활나라가 멸망했다.
▲ 춘추시대 제후국 분포도 정나라는 주나라와 송나라 사이에 위치했다. 서쪽 지역의 패자 진나라는 정나라 내부의 호응을 이용해 정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정나라를 멸망에서 구한 사람은 상인 ‘현고’다. 현고의 기지로 정나라는 침략을 피했고, 목표를 바꾼 진나라 군대에 의해 활나라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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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友弦)이라는 이름은 '현고'(弦高)를 벗 삼는다는 말이다. 현고는 사마천의 <사기> '세가'에 등장하는 춘추시대 인물이다. 기원전 628년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하나였던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정(鄭)나라 내부에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움직임이 있자 정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맹명시(孟明視)를 장수로 한 진나라 군대는 정나라로 쳐들어가던 중 현고라는 정나라 상인을 만난다. 현고는 진나라가 정나라를 침략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한다. 자신이 팔기 위해 몰고 가던 열두 마리 소를 정나라 군주가 진나라 군사를 위로하기 위해 보낸 소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정나라가 진나라의 기습을 미리 알고 있다고 생각한 진나라 군대는 정나라 침략을 포기하고 활(滑)나라를 멸망시키고 철수했다. 외세에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시도가 있었음에도 현고라는 상인의 순발력 있는 대처가 정나라를 멸망으로부터 구한 것이다. 

'우현서루'라는 이름은 '현고'를 벗 삼으려는 선비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고 실력을 기르는 곳이라는 의미로 지었다. 일제 침략과 친일 부역 세력의 준동으로 나라 운명이 풍전등화 같던 시대, 현고처럼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할 수 있는 인재를 기르자는 뜻이 '우현서루'에 담겨 있다. 

'우현서루'라는 이름에 서린 뜻
 
소남 이일우 이일우는 1870년 10월 4일 태어나 1936년 8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금남 이동진이 세운 ‘도서관’ 우현서루를 이어받아 운영했다. DGB대구은행 북성로 지점에 새겨진 소남 이일우 상.
▲ 소남 이일우 이일우는 1870년 10월 4일 태어나 1936년 8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금남 이동진이 세운 ‘도서관’ 우현서루를 이어받아 운영했다. DGB대구은행 북성로 지점에 새겨진 소남 이일우 상.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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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서루는 해마다 중등학생 이상 자격을 갖춘 학생을 20-30명을 모집해서 숙식을 무료로 제공했다. 고명한 강사를 초빙해서 강연과 토론을 진행하고, 국내외에서 수집한 만 권에 달하는 책도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했다. 

1905년 3월 4일 <황성신문> 기사에 따르면 우현서루는 조선과 동서양 역사, 지리, 수학, 물리, 화학, 경제, 농업, 상업, 공업, 법률, 의학, 군사학 분야 책과 신문, 잡지를 두루 갖췄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 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갖춘 도서관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우현서루는 큰 주목을 받았다. 

700평 대지에 자리 잡았던 우현서루는 사면이 도로에 접하고 3개의 건물을 갖추고 있었다. 본관, 서고, 방과 마루를 갖춘 별채 3개의 건물은 각각 교육 공간, 도서관, 숙식 공간으로 활용했다. 우현서루 부지 가운데 빈 공간은 운동장 겸 강연장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동편에 있던 도서관, 즉 서고는 나무로 지은 단층으로 일(一)자 형태 건물이었다. 

한편 1907년 4월 결성된 신민회는 교육을 통해 실력을 키워 국권을 회복하자는 '교육구국운동'을 펼친다. 이승훈이 1907년 세운 평안북도 정주에 세운 오산학교, 안창호와 윤치호, 이종호가 1908년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 이동휘가 1905년 강화에 세운 보창학교, 안중근 의사 삼형제가 1908년 세운 진남포 삼흥학교, 여운형이 1907년 세운 광동학교가 이때 세워진 학교다. 사립학교는 붐을 이루며 그 수가 3천 개에서 4천 개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세워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학교도 꽤 있다. 1905년 세운 양정의숙은 양정중고등학교, 보성학교는 고려대학교로 이어지고 있고, 1906년 세운 휘문의숙은 휘문중고등학교, 진명여학교는 진명여자중고등학교, 명신여자학교는 숙명여자중고등학교, 보성중학교는 보성중고등학교, 중동학교는 중동중고등학교, 기호학교는 중앙중고등학교, 1908년 세운 동원여자의숙은 동덕여자중고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일제는 1906년 8월 보통학교령을 공포했다. 일본은 본토에서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제국대학으로 이어지는 학제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가 본토와 달리 조선에서 초등 교육기관 이름을 '소학교'가 아닌 '보통학교'라고 정한 이유는 조선인의 교육을 초등교육에서 끝내려 했기 때문이다. 1909년 개정한 고등학교령을 통해 '중학교'의 명칭을 '고등학교'로 바꾼 것도 조선인 교육을 대학교가 아닌 중학교 단계에서 마무리하려 한 의도가 담겨 있다.

이런 정책을 폈음에도 조선인이 세운 학교가 크게 늘자, 일제는 이를 규제하기 위해 1908년 8월 사립학교령을 공포했다.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학교 설립이 가능하고, 검인정 교과서만 사용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폐교를 명령할 수 있도록 했다. 일제는 1909년 2월 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과 4월 지방비법을 잇달아 공포해서 기부금과 지방재산에 의존하던 지방 사립학교에 운영에 타격을 가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하는 학교가 수백 개가 넘을 정도로 속출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쇄된 우현서루 
 
DGB대구은행 북성로지점 우현서루 옛터에 세운 DGB대구은행 북성로지점은 건물 외관이 독특하다. 외벽에 우현서루와 소남 이일우 모습, 책을 새겨 놓았다. 도서관이 있던 자리에 새롭게 들어선 건물이 ‘사라진 도서관’을 외관에 새겨 놓았다.
▲ DGB대구은행 북성로지점 우현서루 옛터에 세운 DGB대구은행 북성로지점은 건물 외관이 독특하다. 외벽에 우현서루와 소남 이일우 모습, 책을 새겨 놓았다. 도서관이 있던 자리에 새롭게 들어선 건물이 ‘사라진 도서관’을 외관에 새겨 놓았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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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시작했다. 1911년 8월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조선교육령을 통해 향교와 서당 같은 조선의 교육시설과 선교사가 운영하는 사립학교를 규제했다.

이 과정에서 우현서루도 1911년 일제에 의해 문을 닫게 된다. 인재 양성을 통해 국권을 되찾으려는 우현서루를 일제가 방치할 리 없었던 것이다. 우현서루는 문을 닫았지만 계명문화대학교 전 총장 김남석이 지적한 것처럼, 교육과 민족계몽을 위해 조선인 스스로 도서관을 설립하려는 활동은 일제 강점기 동안 꾸준히 이어졌다.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된 만권당 우현서루는 어디에 있었을까? 대구부 팔운정 101-11(대구광역시 중구 수창동 101-11번지), 지금의 DGB대구은행 북성로지점 일대에 우현서루가 있었다. 우현서루는 700여 평의 규모였는데 지금의 DGB대구은행 북성로지점은 우현서루의 남동쪽 일부분에 해당한다. 

DGB대구은행 북성로지점은 독특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은행 건물 외벽에 우현서루와 소남 이일우 모습과 함께 "민족계몽과 지성, 자주독립과 우국의 현장 우현서루 옛터'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도서관 옛터에 세운 건물이 과거에 존재했던 도서관을 건물 외관을 통해 기념하고 기억하는 건물은 이곳이 유일할 것이다. 

이일우는 1907년 서상돈과 함께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서상돈은 김광제와 함께 '광문사'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광문사는 3.1 만세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출판사 '보성사'와 함께 독립운동 과정에서 역할을 한 출판사로 기억할 곳이다. 1911년 우현서루가 문을 닫은 후 이일우는 1912년 대구은행 창립에 참여했다. 

우현서루 설립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소남 이일우가 이후 '친일' 행보를 보였다는 지적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오홍석 대구지부장은 여러 자료를 발굴해서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이일우의 친일 행적을 조명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 소남 이일우의 행적은 앞으로 자세히 규명할 필요가 있다. 

우현서루, 교남과 대륜을 거쳐간 사람들 
 
이상화 시인과 이상정-권기옥 부부 왼쪽부터 이상화 시인, 권기옥 비행사, 이상정 장군.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은 시인 이상화의 형이다. 이상정의 아내이자 이상화 시인의 형수인 권기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공군 비행사로 공군 창설에 기여했다. 중국에서 활동하며 일본 도쿄 황궁 폭격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상화 생가에서 재촬영한 사진.
▲ 이상화 시인과 이상정-권기옥 부부 왼쪽부터 이상화 시인, 권기옥 비행사, 이상정 장군.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은 시인 이상화의 형이다. 이상정의 아내이자 이상화 시인의 형수인 권기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공군 비행사로 공군 창설에 기여했다. 중국에서 활동하며 일본 도쿄 황궁 폭격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상화 생가에서 재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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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우현서루는 1904년부터 1911년까지 7년밖에 유지되지 않았지만, 이곳을 거쳐간 사람의 면면은 화려하다. 나라를 걱정한 우국지사가 우현서루를 찾았고, 상해 임정 대통령 박은식, 초대 국무령 이동휘,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 도쿄 황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여운형, 김성수를 비롯한 150여 명의 우국지사가 이곳을 찾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 이육사와 이상화도 우현서루 출신인데, 특히 1926년 <개벽>을 통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 시인 이상화는 우현서루를 운영한 이일우의 조카다. 중국군 장군으로 복무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이상정 장군은 이일우의 조카이자 이상화의 형이다. 

일제에 의해 우현서루가 폐쇄된 후 이일우는 강의원(講義院)이라는 교육기관을 운영하다가 1921년 9월 교남학원, 1924년 교남학교 설립을 지원했다. 교남학원의 '교남'(嶠南)은 조령 남쪽의 경상도라는 의미로 '영남'을 이르는 말이다. 우현서루에서 사설강습소로 출발한 교남학원은 1921년 9월 15일 이일우의 지원과 그를 따르던 홍주일, 김영서, 정운기가 주도해서 설립했다. 1924년 5월 21일에는 교남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반월당으로 학교를 이전했다. 

교남학교는 1940년 10월 서병조가 인수한 후 1942년 대륜학교로 이름을 바꾼 후 수성동으로 이전했다. 서병조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의 아들이지만 대구의 대표적인 친일파다. 

학교 측은 교명인 '대륜'(大倫)이 유교 사상인 '군신부자인지대륜'에서 빌린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효도"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1940년 11월 1일자 <조선민보>도 교명과 관련해 "'대륜'(大倫)이란 충효의 일로 국민 도덕의 핵심이다. '교육칙어'에 '천황에 충의를 다하여 효도하라'는 분부를 봉체하여 본교 교육의 큰 방침으로 정한 바 있다"라고 전한다. 대륜학교는 1963년 석강 김덕룡이 인수한 후 지금의 대륜중학교와 대륜고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과 함께 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정보부 박선호 의전과장으로부터 권총을 넘겨받아 차지철과 박정희를 차례로 쏘았다. 김재규는 1947년 8월부터 1년 넘게 대구 대륜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지냈다. 박선호는 대륜중학교 졸업생이다. 선생과 학생으로 대륜중학교에 적을 뒀던 두 사제의 인연은 중앙정보부로 이어진다. 

김재규와 박선호, '야수의 심장으로 유신을 심장을 쏜'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서울의 봄'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대륜중학교 교가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시인 이상화가 작사했다. 대륜중학교 사제가 주역이었던 10.26으로 '서울의 봄'이 왔음을 생각하면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싶다.

<민족일보> 대표로 5.16 쿠데타 직후 사형당한 조용수와 국회의장 이만섭, 작가 유시민과 정치인 유승민도 대륜중학교 졸업생이다. 시인 정호승, 소설가 하일지는 대륜고등학교 출신이다. 

이상화 집안과 이재욱 집안
 
이일우 고택 우현서루를 세운 이일우 고택. 지금도 남아있는 이일우 고택 바로 옆이 초대 국립도서관장 이재욱의 생가다. 두 집안은 이웃이었을 뿐 아니라 이일우 집안의 이상화 시인과 이재욱 집안의 이장희 시인은 ‘절친’이기도 했다.
▲ 이일우 고택 우현서루를 세운 이일우 고택. 지금도 남아있는 이일우 고택 바로 옆이 초대 국립도서관장 이재욱의 생가다. 두 집안은 이웃이었을 뿐 아니라 이일우 집안의 이상화 시인과 이재욱 집안의 이장희 시인은 ‘절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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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서루와 함께 우리가 눈여겨볼 인물은 초대 국립도서관장 이재욱이다. 이재욱은 1905년 9월 20일 대구 서성정(西城町) 103번지(지금의 대구시 중구 서성로 1가 103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이다. 이병학은 대구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친일파다. 

'봄은 고양이로다'를 쓴 시인 고월 이장희는 이재욱의 삼촌이다. 1900년 11월 9일 태어난 이장희는 이재욱보다 5년 먼저 태어났다. 삼촌 이장희뿐 아니라 대구 출신 문인으로 유명한 시인 이상화가 1901년생, 소설가 현진건이 1900년생, 시인 백기만이 1902년생으로 이재욱과 그리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재욱 생가 바로 옆에 우현서루를 세운 이일우 고택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재욱은 1926년 대구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북고등학교)를 8회로 졸업하고 1928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문학과에 입학했다. 극소수만 입학할 수 있었던 경성제대에 합격한 걸 보면 그의 성적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 해에 이재욱은 배녹점과 결혼했다. 1929년 조선 전래 동요를 필사본으로 정리한 <동요집>을 완성한 이재욱은 1930년에는 영남 지역을 답사해서 <영남전래민요집>을 완성했다. 이렇게 정리한 자료를 바탕으로 1931년 <영남민요연구>라는 논문을 제출했다. 

이재욱이 결혼한 다음 해인 1929년 11월 3일 삼촌인 고월 이장희가 음독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목사가 되려 한 이장희는 조선총독부 관리로 취업하라는 아버지 이병학의 강요를 거부했고 아버지와 큰 갈등을 빚었다. 신경쇠약을 앓던 고월은 스물아홉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이장희의 죽음은 이재욱에게도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재욱은 경성제대 졸업 후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취직하며 삼촌 이장희와 대조적인, 조부 이병학이 원했던 길을 걷는다.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우현서루와 경북대학교 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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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